61.‘원장현류 대금 산조’ 만들어 낸 원장현 씨
61.‘원장현류 대금 산조’ 만들어 낸 원장현 씨
  • 마스터
  • 승인 2010.12.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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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하게 살면 제 꾀에 제가 넘어집니다.”

아버지는 근동에 소문난 대금 연주자였고
숙부는 ‘무형문화재 거문고 산조 기능보유자’
집안 분위기 때문에 중학교때 대금 불기 시작

고교 진학 않고 화순

원장현 씨의 공식적인 직함은 ‘대금 산조 명인’이다. 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 16호 거문고 이수자’이기도 하다.
1950년, 담양 월산면에서 태어난 원 씨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금을 가까이 했다. 아버지와 숙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시골 농부였지만 근동에 소문난 대금 연주자였고, 숙부는 ‘무형문화재 거문고 산조 기능보유자’였다.


“이 길을 통해 성공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덩달아 대금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학교 공부보다는 대금 공부를 하고 싶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화순으로 서울로 김용기, 오진석, 김동진 선생님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이 많은 분들 한 분 한 분이 소중한 스승님이지만 그 가운데서 한일섭 선생님은 저에게 정말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한일섭(화순 출생, 1927-1973)은 13세 때 ‘소년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판소리에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다. 한 씨는 고법(鼓法)에도 남다른 기량을 갖고 있었으며, 아쟁 산조와 태평소 시나위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창극을 작곡하여 국악계의 귀재로 일컬어졌던 음악가이다. 한일섭은 대금 연주자는 아니었다. 한 씨는 어린 시절 대금 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진도 출생)의 연주를 많이 들으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연주에 능하지는 못했지만 대금 산조를 듣고 정확하게 가늠해냈다. 그는 훗날 대금 산조의 명인 한주환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김동진. 이생강에게 대금을 가르치기도 했다.


“선생님은 구음으로 대금 산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이 제 음악에 풍부한 자양분이 되었고, 오늘날 ‘원장현류 대금 산조’도 한일섭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겁니다.”
한일섭에게 사사를 받은 원 씨는 1982년, 제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문에서 장원을 하게 된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던 국악인들의 등용문인데, 원 씨는 이 대회에서 기악부문 최연소자라는 기록을 세운다.

전주대사습 장원 이후 원 씨는 국립국악원 연주자로 일하면서 뒤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연주자로 활동하는 데 굳이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한 과정이라 생각되어 뒤늦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대학과정을 거쳐 쉰 살의 나이에 중앙대 대학원을 마쳤다.


1985년, ‘원장현류 대금 산조’가 탄생한다. 그 해 원 씨는 대금 산조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국립국악원 악사장이던 이승열 씨가 저에게 ‘원장현류’라는 이름을 걸라고 했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주저했을 텐데, 젊은 혈기에 용감하게 ‘원장현류’를 들고 나왔습니다. 주위의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건방지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국악계의 새바람이라면 응원을 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원장현류 대금 산조’ 공연은 성황을 이루었고,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서울대학교 국악과 원장현류를 전공하는 학생도 생겼다. 이후 원장현류를 강의하는 교수도 7명이 배출되었고, 현재 전국의 대부분 대학에서는 원장현류를 강의하고 있다. 1991년에는 원장현류 대금 산조 악보가 출간되었고, 신나라레코드사에서는 원장현류 대금 산조 음반을 출반했다.

1980년대 들어 사람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더불어 국악도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원 씨의 연주활동도 활발해진다. 국내 연주보다 국외 연주가 더 많았다. 1982년, 프랑스, 영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벨기에 등 서유럽순회공연을 비롯하여 2010년, 벨라루스, 루마니아, 미국, 일본 공연 등 원 씨가 국외 연주활동을 위해 움직인 거리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도는 거리가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어느 가을날 경상북도 김천 가야산 청남사에서 비구니들을 위해 했던 연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원 씨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大家)의 반열에 올라섰다. 시쳇말로 몸값도 아주 비싸졌다. 일정을 잡기도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담양에서는 가끔 그의 대금 연주를 들을 수가 있다.
“일정이 겹치지 않는다면 담양에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언제든지 달려올 겁니다. 제가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원 씨의 가족은 모두가 국악인이다. 부인 조경주 씨는 대금 연주가와 한국무용가로 활동하면서 서울에서 ‘금현국악악원(琴絃國樂院)’을 운영하고 있다. 대금을 전공한 아들 완철 씨는 국립국악원 단원이며 중앙대학교 겸임교수이다. 딸 나경 씨는 해금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원 씨의 여동생도 가야금 연주가이다.


“처음에는 대금 산조 명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대금을 불었습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연습을 했습니다. 안면방해를 한다고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대금 공부를 시작할 무렵 우리 집은 살림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이걸 불어서 밥이라도 먹고 살게 되는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것저것 계산도 안 하고 죽자 살자 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 속에서 그의 아랫입술 밑에는 훈장처럼 굳은살이 돋았다. 원 씨는 요즘 국악을 공부하는 젊은 세대들의 성급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노력에 비해 많은 대가를 바라는 성급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거기에 빠져 즐기다 보면 길은 열리게 됩니다. 너무 영리하게 계산하며 살다가는 자칫 제 꾀에 제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에게는 가난한 시절도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 씨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자운영 꽃을 좋아한다고 한다.
“제 어린 시절은 너나없이 가난했습니다. 대개가 보릿고개를 겪고 살았지요. 춘궁기가 되면 양식이 부족해 들에 자라는 나물로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네 살에 대금을 불기 시작한 후 47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그는 대한민국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촌 방방곡곡의 지구인들의 찬사를 받는 명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또 많은 것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 세월 동안 가슴에는 한(恨)도 남았을 것이다. 어느 시인은 원 씨의 대금 소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속절없구나 산다는 일이/온 몸이 젖어 흐르는 젓대 앞에서/무엇을 생각하고 또 무엇을 지닌다는 일이/도무지 부질없구나.
돌아 보지 마라 이 세상일랑/깨어진 꿈들과 글픔 몇 조각/이제 저것들이 다시 모여 또 한 생애가 된다 한들/젓대로 비워내는 저 온전한 세상의/그 하룻밤 사랑이라도 되겠느냐.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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