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뉴욕 한인타운 ‘빛과 소금 교회’ 담임목사 정순원씨
66.뉴욕 한인타운 ‘빛과 소금 교회’ 담임목사 정순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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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1.2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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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이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90년 미국 휴스톤·뉴욕 신학대학원 석사 취득
2000년 빛과 소금 교회의 이름으로 창립예배
창립예배 당시 성도 30명, 10년이 지난 현재 200명
뉴욕 한인

1965년, 필자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무렵 담양읍 시외버스 정류장(당시는 차부라고 했음)은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류장 근처에는 천주교회, 제일약방, 성동인쇄소, 함석집, 세탁소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 성동인쇄소가 담양 최초의 인쇄소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해 겨울방학을 앞두고 나는 성동인쇄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교지(校誌) 편집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성동인쇄소의 사장 이름도 몰랐다. 이번에 정순원 목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 인쇄소의 사장이 정한진 씨(1987년 작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사장의 아들 중에 꽤나 똘똘한 초등학교 1학년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정순원 목사인 것이다. 정 목사는 담양남초등학교(24회)와 담양중학교(26회)를 졸업했다.

정순원씨는 2000년 3월부터 ‘빛과 소금 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다. 정씨는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서른여덟 살에 사별하여 홀로 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7남매를 혼자 기르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그런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셨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아시절부터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자연스럽게 총회신학대학교(총신대)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1985년에 곧바로 총신대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이 무렵, 정씨의 아버지 정한진씨는 인쇄업을 그만 두고 ‘성동죽물센터’라는 상호로 죽제품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씨가 총신대 대학원에 재학중 그 해에 갑자기 아버지가 별세를 했다. 그렇게 되자 정씨는 대학원을 휴학하고 담양에 내려와 성동죽물센터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1990년까지 4년 동안 죽제품 장사를 했다. 이때는 담양중앙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집안 형편상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죽물 장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대학원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아내가 저를 위해 간곡히 기도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 신학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 무렵 저는 허리디스크로 엄청나게 고생도 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다녀도 쉽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내 허리만 낫게 해 주시면 일생 종으로 살겠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허리디스크가 나았습니다. 그 길로 가게 일은 다른 식구에게 맡기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990년, 정 씨는 미국 휴스톤 신학대학원에 편입해 ‘목회학’ 석사를 취득하고, 뉴욕 총신대학원에서 ‘신학’ 석사도 취득했다. 이어서 미시시피 주 리폼드 신학대학원에 ‘기독교 교육학’ 중에서 ‘교회 성장학’으로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1994년 10월 10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서울 모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하 아무개 목사님이 뉴욕의 ‘두란노서원’의 사역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2000년까지 7여 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란노서원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2000년 1월, 두란노 서원에 나와서 양육(공부)하고 있던 어떤 분이 자기 집 가정 예배 목회를 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그 분의 집에서 목회를 했는데 교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2000년 3월, 빛과 소금 교회의 이름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이어서 6월 25일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빛과 소금 교회 창립예배 당시 교인(성도)은 30명이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현재 교인은 150명이 되었다. 뉴욕 한인타운에서 교인의 숫자가 150명이면 중형급 교회라고 한다. 이 무렵 정씨는 교인이 4만~5만 명 되는 서울 모 교회의 부목사 부임 요청을 받았는데 거절하고 빛과 소금 교회를 창립한 것이다.

2010년 말 현재, 뉴욕 주와 뉴저지 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목사는 2천여명이다. 정씨는 2008년부터 이 한국인 목사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회장을 하다 보니까 유학생들에 대한 실제적인 편의와 도움을 주는 일도 있습니다. 저한테 연락해서 뉴욕으로 유학 온 학생 중에는 담양 출신들도 10여명 있습니다. 그런데 공인받은 유학원의 실태를 들여다봤더니 실제 비용의 10배를 받고 있어 유학생들의 부담이 너무 크더군요.

예를 들어 입학허가서가 있어야 학생 비자가 나오게 되는데 유학원에서 4천~5천 달러를 요구하는데 저는 3백~4백 달러이면 해결합니다. 학비도 2배 이상 비쌉니다. 학생은 아르바이트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 없으면 유학도 오지 말라는 식이지요. 그런 학생들은 암암리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 주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고생하면서 유학했으니까요. 아르바이트를 할 때 권총강도를 만나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정 씨는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꽃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대는 저녁 7시부터 아침 8시였으므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곧장 대학원으로 달려갔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면서도 졸았다.
“일요일 교회에 나가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잠이 쏟아졌습니다. 허벅지를 꼬집고 별 짓을 다해도 쏟아지는 잠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의 가장 큰 소원은 일요일에 맑은 정신으로 오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필자가 정 씨와 만나기 얼마 전 모 교회에서 부목사가 담임목사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라고 정 씨에게 물었다.
“교회의 본질적인 역할을 못하고 자기 교회만의 실속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외형적인 규모를 중요시 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외형적 규모보다 하나하나의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한 생명이 천하와도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정 씨는 3년 만에 고향 담양을 찾았다. 이번 고향 체류기간은 길게 잡았다.
“이번에는 설까지 쇠고 갈 겁니다. 18년 만에 설을 쇱니다.” 정씨는 은퇴하면 담양에 돌아와 복음화 활동할 생각이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담양은 뉴욕한인사회에서도 죽제품 고장이며, 물 좋고, 공기 맑은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담양 홍보를 많이 합니다. 설 쇠고 나서 2월 중순 쯤에 한인목사회 증경회장단이 서울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제가 증경회장단 막내여서 그 분들이 어디를 갔으면 좋겠느냐고 상의를 해왔습니다. 이번 기회에 담양으로 초대해서 담양을 알리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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