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960년대 담양 마라톤 대표 선수 이우길씨
67.1960년대 담양 마라톤 대표 선수 이우길씨
  • 마스터
  • 승인 2011.02.1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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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 달리는 꿈을 꿉니다”

용면에서 담양중까지 30리길 뛰어서 등하교
중학교 1학년때 중고 전교생 마라톤에서 1위
육상부 발탁돼 납부금 면제받으며 훈련 전념

중3때 춘계 3위, 고교땐 광송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당시의 마라톤 선수 이우길씨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스타였다. 마라톤에 있어서 이씨를 넘볼 사람은 없었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담양 사람들은 이씨의 우승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 어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마라톤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이씨는 울먹이며 뒤를 잇지 못한다. 이씨는 마라톤에 한(恨)이 맺혔다고 한다. 이씨가 태어난 곳은 용면 청흥리 3구 청수마을이다. 청흥리 1구는 낙천마을, 2구는 노루목, 3구는 청수마을인데 댐이 건설되면서 모두 수몰되어 버렸다.


“우리 남매는 7남 1녀로 여덟명인데 제가 둘째입니다. 아버지는 마차를 끄셨는데 땔감 장사를 했습니다. 살림은 넉넉한 편은 아니었는데 큰형님은 광주상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아버지는 같이 다니면서 땔감 장사를 하자고 했지만 통사정을 해 담양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읍내 객사리에 방 한칸을 얻어 여섯명이서 자취를 했습니다. 그런데 3분기 납부금부터 못내게 되자 아버지는 형이나 공부시키자면서 학업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약하기 위해 집에서 다니기로 했습니다.”


청수마을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30리(12km)였다. 식사를 마치면 30분정도 준비운동을 한 다음 학교를 향해 달렸다. 처음에는 가방을 왼손 오른손으로 옮겨 들며 달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학교 숙직실에 가방과 교복을 벗어놓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달렸다.


“도림리 뒷산에 있는 비옷재(비슬재 : 현재 용면댐에서 추월산으로 넘어가는 터널)를 넘을 때가 가장 힘이 들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큰물이 질 때는 길이 끊기는 바람에 금성산성 산자락으로 우회하여 달렸습니다.”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중고등학교 가을체육대회때 전교생이 함께 달리는 마라톤 종목이 있었다. 무정면 오룡리를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중고 전교생 1,000여명이 달렸다. 이씨는 이 마라톤에서 전교 1위를 했다.


“이때 박용기 체육선생님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내 마라톤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 선생님이 마라톤 1위부터 12위까지를 모아 담양중고 육상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납부금이 면제되었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이루지 못해서인지 마라톤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옵니다. 이루지 못한 꿈은 한으로 남는다고 하는데 지금도 가끔 마라톤 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씨는 마라톤과 관련한 젊은날의 일들을 바로 어제의 일인 것처럼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한 주일의 마라톤 훈련 스케줄도 기억하고 있었다. 월요일은 양쪽 발목에 5kg씩 모래주머니를 달고 읍 남산리 남촌마을 뒷산 타기를 했다. 당시 이씨는 남촌 마을에서 뒷산 옥녀봉까지 7분대에 주파했다. 화요일은 잔디밭에서 발차기를 했다.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리는 발차기를 매일 2시간 동안에 3,000회를 했다. 수요일에는 105리(42.195km)를 달렸다. 학교를 출발해 곡성군 옥과면 귀열산을 돌아오면 105리였다. 목요일은 몸풀기를 했다. 금요일에는 마라톤 스파이크를 신고 빠른 속도로 학교 운동장을 40바퀴 돌았다. 그리고 주말은 휴식이었다.


중학교 3학때 이씨는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에서 주최하는 춘계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광주를 출발해 화순을 돌아오는 풀코스였다. 중고대, 일반부가 함께 달리는 이 대회에는 280여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이 대회의 1위는 전남대학교 재학생 김해룡이 차지했고, 2위는 함평 학다리 고등학교 김수부, 3위는 담양중 이우길이었다.


“그때 저는 발에 제대로 맞는 스파이크를 새로 구입할 수가 없어서 헌 것을 신었는데 구입한 지가 오래 되어 약간 작았습니다. 결국 발가락이 부르터 피가 났습니다. 정말 고통이 심했지만 1등만 하면 내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뛰었습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바로 그 현장에서 사레지오고등학교, 조선대부속고등학교, 광주농업고등학교, 광주공업고등학교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 박용기 선생님께서 택시를 대절해 나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담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 후로 나흘 동안 집에도 못가고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지냈습니다. 선생님께서 울면서 같이 운동하자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담양농고에 진학하겠다고 했습니다.”


담양농고에 다닐 때, 담양군학예육성회라는 단체에서는 이씨에게 매달 달걀 2줄과 백미 한 말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주위에서 관심을 가져 준 덕분에 고등학교 3년 동안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거두었다. 광송(광주-송정리) 역전 마라톤 대회에서 고등부 1위와 전남대학교 주최 마라톤 대회에서 고등부 3위를 했고, 제44회 전국체전에서 전라남도 대표로 출전해 8위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담양의 체육계 유력인사인 국 아무개씨는 이씨에게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세 차례나 입대 연기를 한 상황이었습니다. 더이상 연기를 할 수 없어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 시절에는 보초를 설 때 마지막 차례를 자청했다. 보초를 끝내고 새벽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씨의 모습이 연대장의 눈에 띄었다.


“하루는 연대장이 부르더니 사회에서 선수생활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주 호남비료, 화순 광업소 대표선수로 활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연대장이 사단 양돈장에 배치를 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이씨는 사단 대표로 육상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서 100m, 200m, 400m, 5000m,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다. 그렇게 되자 당시 국군체육훈련단 정봉수 상사가 찾아왔다. 정봉수씨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영웅 황영조 선수의 코치를 맡았던 사람이다. 이씨는 즉시 국군체육훈련단 선수로 발탁되었다. 군대시절에는 경기도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제대를 앞두고 있을 때 육상을 키우는 모 회사에서 입사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는데 장봉수 상사님은 장기하사로 전환하여 계속 육상을 하라고 했습니다. 잠깐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제대와 장기복무를 놓고 갈등할 즈음 고향 식구들은 제대를 원했다. 마땅한 규수가 있으니 결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씨는 제대후 결혼을 했다. 장인은 당시 용면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학창시절에 달리다 발목이 삐면 이 한약방에 와서 침을 맞았다. 그 시절 곁눈질로 훔쳐보곤 했던 처녀가 이씨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후 이씨는 담양군 농촌지도소 공무원이 되어 33년 동안 공직생활을 했다.


“마라톤을 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시골 촌부로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33년이나 공직생활을 했지만 마라톤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다시 젊어진다면 다시 뛰어서 맺힌 한을 풀고 싶습니다. 다시 젊어진다면 지역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일흔셋인데 부질없는 망상이겠지요?”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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