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한국전통식품 민속주 명인 양대수씨
68.한국전통식품 민속주 명인 양대수씨
  • 마스터
  • 승인 2011.02.2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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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의 조력자가 되어 줍니다”

선친 “전통주 제조비법 가업 이으라” 유언에 따라
1988년부터 아내와 함께 하루 3~4시간 잠을 자며
증조부께서 남긴 제조비법 토대로 전통주

“똑같은 술을 마셔도 마시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 맛과 반응은 달라집니다. 그리고 술은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의 조력자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한국정통식품 민속주 명인 양대수씨의 말이다. 양씨가 운영하는 술도가 ‘추성고을’에서 빚어내는 ‘추성주(秋成酒)’는 1,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명주이다. 한 가정의 전통주로서도 12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증조부,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4대째인 양대수씨에 이르러 명인이 탄생했고, 그 술은 명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양씨가 ‘한국전통식품 민속주 명인 제22호’로 인증받은 것은 2000년인데 현재 전라남도에서 주류 명인은 양씨 뿐이다.

1986년 9월 우루과이 협상(UR)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협상의 주요 골자는 보호무역의 철폐, 시장의 개방이었다. 이무렵 ‘세계경제의 재편’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모두들 긴장했다. 특히 우리 농민들은 몰락하고 말 거라며 극단적인 우려를 하기도 했다. 이무렵 양대수씨는 용면농협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가지 정부의 지원책이 있었지만 UR협정이 체결되게 되면 모든 지원책이 사라지게 됩니다. 시장은 개방되고, 정부의 지원은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쌀농업이 도산하는 것은 하루아침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으로 쌀을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양씨는 누룽지 공장을 구상했다. 그리고 곧바로 가내수공업 형태로 누룽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판매도 했는데 그런대로 수요가 있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대기업에서 손을 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누룽지 만들기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민속주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유언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양씨의 선친은 아들 대수씨에게 집안 대대로 내려온 전통주 제조비법을 이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양씨의 집에는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족자(簇子)가 하나 있다. 양씨의 증조부가 전통주 제조비법을 기록한 족자이다. 원문은 한자 300자(字)로 되어 있었는데 양씨의 할아버지가 한글로 번역을 했다.

“1988년부터 아내와 함께 증조부께서 남기신 제조비법을 토대로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온 전통주 복원에 들어갔습니다. 증조부가 남긴 비법대로 빚는 술은 이른바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였습니다.”

제세팔선주는 가사문학의 대가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이 회방연(回榜年:과거급제 60년) 기념잔치에 내놓은 술로도 알려져 있다. 당대의 문인 기고봉, 임백호 등이 이 술을 마시고 탄복하였고, 그로 인해 장안의 명주로 칭송 받았다고도 한다.

양씨 부부가 추성주 복원에 매달려 지내던 이무렵 두 사람은 농협과 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술 빚는 일은 퇴근후에 시작되어 새벽 2~3시에 끝났다. 그런 다음 잠시 눈을 부쳤다가 출근을 했다.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3~4시간이었다.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 마침내 추성주가 복원되었다. 그런데 양씨는 이 술을 시판하지 않고 몇몇 주위 사람에게만 선물로 증정하고 술항아리를 밀봉했다. 후손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천년명주를 복원했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황당하게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술을 또다른 천년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요청도 있고 해서 빚은지 18년만에 시판을 시작했습니다.”

양씨는 이 술에 ‘타미앙스(TAMIANGS)’라는 이름을 붙였다. 양씨는 담양 전통주의 세계화와 명품화를 위해 타미앙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말한다.

추월산을 바로 머리맡에 둔 양 씨의 술도가 이름은 ‘추성고을’이고, 이곳에서 빚어지는 전통주의 이름은 ‘추성주(秋成酒)’이다. 추성주는 1990년에 전통주 국가지정을 받았고, 양씨가 주류제조 면허를 얻은 것은 1992년이다. 그리고 1993년에 추성고을 생산공장이 준공된다. 양씨는 추성주의 연원을 금성산성 자락에 있는 고찰 연동사(煙洞寺)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796년 담양부사를 지낸 이석희는 담양의 풍물을 소개한 ‘추성지(秋城誌)’에 연동사 스님들이 보리와 쌀 등의 원료에 절 주변에서 자라는 칡뿌리, 두충, 오미자 등 갖가지 약초를 넣어 술을 빚어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맛이 어찌나 좋아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해서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또다른 전설도 있다. 이영간(李靈幹)은 고려 문종때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를 지낸 사람이다. 이영간은 어린 시절 연동사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연동사의 술독이 자꾸 줄어드는 일이 벌어졌다. 스님의 이영간을 의심하고 회초리를 들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영간은 범인을 잡기 위해 술독을 지키고 있다가 술을 훔쳐가는 늙을 살쾡이를 잡았다. 그러자 늙은 살쾡이는 비서(秘書) 한권을 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영간은 비서를 얻은 대신 살쾡이를 풀어주었고, 그 비서를 통달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담양 이씨(李氏)가 되었다. 그리고 이영간에 의해서 연동사의 제세팔선주가 민가에 전파되었다고도 한다.

추성주는 일본인들에게도 호평을 받은 술이다. 우리 김치가 한창 일본에 수출되던 1990년대 말, 일본인 바이어로부터 ‘추성고을’에 방문하고 싶다는 전화연락이 왔다. 그리고 얼마 후 추성고을을 방문한 일본인 바이어는 공장의 모습을 보고 실망을 했다. 공장의 규모도 작고 낙후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지만 술을 마셔보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주문을 했다. 첫 주문량은 25상자(250병)였지만 한창 호황이던 때는 매월 700상자씩 발주를 했다. 일본에 대한 수출은 1998년부터 2007년까지 하다가 엔화의 변동 등의 요인으로 타산이 맞지 않아 중단하고 말았다.

2004년 추성고을은 생산공장을 확장하여 이전하였다. 1993년 두장리에서 문을 연 추성고을은 추성리로 이전하면서 재도약의 꿈을 꾸고 있다. 새로 이전한 공장안에는 숙박을 겸한 체험장도 만들어진다.

“우리 추성주의 대중화를 위해 체험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체험장에서는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숙박하면서 추성주를 직접 빚고, 이를 보관 숙성한 후 각자의 집으로 가져가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할 겁니다. 전통주 활성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21세기의 전략이 아니겠습니까?”

천년명주의 술도가 ‘추성고을’에는 오늘도 미래를 향한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양씨 가문의 전통주도 4대에서 5대, 6대로 이어지고 있다. 양씨의 아들 재창씨는 양대수 명인의 뒤를 이어줄 명인전수자 이고, 양대수씨의 부인 전경희씨는 명인전수보조자이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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