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유기농 쌈채소 농장 ‘두리농원’ 대표 김상식씨
69. 유기농 쌈채소 농장 ‘두리농원’ 대표 김상식씨
  • 마스터
  • 승인 2011.03.0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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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 길은 농촌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고 졸업후 산업현장, 귀농, 또 도시생활 전전…
1996년, 다시 귀농하면서 유기농 실현 결심
현재 1만평 비닐하우스에서 16가지 쌈채소 생산
두리농원 연 매출 12억

“중학교 때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보다 등록금으로 돼지를 사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는 마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3남6녀로 아홉명이나 되어 가정형편이 썩 넉넉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9남매의 막내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에게 똑같이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공고를 졸업하고 나서 공사현장에서 토목기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시골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김씨의 귀농에 대해서 형제자매들은 반대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김씨는 수북면 황금리 집으로 돌아와 농촌생활을 시작했고, 30여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두리농원’의 연매출은 12원억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씨는 비닐하우스 토마토 농사를 지었다. 영향을 준 사람은 담양군 관내에서 시설원예의 주춧돌을 놓은 김천환(작고)씨였다. 김천환씨의 영향을 받은 수북면 황금리 사람들은 35년째 토마토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 처음에 김씨는 2동(300평)에 토마토를 길렀다. 여유자금이 없어서 철제터널 대신 대나무터널로 하우스를 지었다.


“첫해 소득은 마을분들의 절반수준 이었습니다. 책만 보아서는 안되고 경험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2동의 소득이 아버지가 지은 논농사 스물세마지기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논농사 경작권도 저에게 일임해 주셨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 둔 것이 잘 했다는 생각이 들고 더 많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 소도 기르고 한창 붐을 타고 있던 알로에도 재배했습니다.”


김씨의 집에서는 소를 한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새끼를 낳았다. 새끼를 일년 넘게 정성들여 길러 팔았다. 그 소를 팔고 시장 한 구석에서 한없이 울기도 했다. 새끼를 판 돈으로 송아지 두 마리를 샀다. 비닐하우스에 소득이 생기면 그 돈으로 소를 샀다. 그런식으로 소를 18마리로 늘렸다. 멧돼지 암수 한쌍을 구입해 기르기도 했는데 나중에 80마리까지 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말 소파동으로 김씨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소값은 사료값도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폭락하고, 그 동안 자식처럼 정성들여 키웠던 소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계산기로 두드려 보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농촌생활에 대한 회의까지 들었다. 이 무렵 김씨는 알로에 판매로 적잖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광주의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도 고정적인 납품도 하고 있었다. 소파동으로 인해 농촌생활에 회의를 느낀 김씨는 자기가 키운 알로에 판매와 함께 유명회사 알로에 대리점 영업을 병행하기로 했다. 망설이지 않고 소와 멧돼지를 처분했다.


“갖고 있는 것을 처분하고 농협에서 대출도 받고 해서 당시로선 거액의 자본금으로 알로에 대리점 영업을 시작했는데 일년 반만에 손바닥을 치고 말았고, 농협의 빚은 빚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광주로 나오고 나서 얼마 안있어 무척 후회를 했습니다. 도시로 온 뒤 6개월 후 소값이 폭등을 했던 겁니다.”

알로에 대리점 사업이 망하고 나서 김씨는 다시 빚을 내 통닭집을 열었다. 이 무렵 결혼도 했다. 1990년 1월 1일, 첫아들이 태어났다.
“첫아이가 태어난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그 아이가 뇌성마비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다니다가 전주예수병원이 뇌성마비 치료를 잘한다고 해서 정기적으로 전주에도 갔습니다.”


알로에 장사, 하우스 농사, 통닭집, 아들의 병수발 등 김씨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마음 놓고 편하게 잠 잘 시간도 없었다. 통닭집 가게는 문을 닫는 날이 많아 단골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정신이 없어 통닭집 가스레인지 불을 켜 놓은 채로 전주 병원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 불이 나 가게가 다 타버린 일도 있었다. 경제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밤이면 광주 충장로 2가 입구에서 호두과자 노점상을 했다.


“차량에 기계를 설치해 놓고 하는 호두과자 장사는 광주에서 제가 1호였습니다. 첫날 대박이 났는데 두시간 만에 반죽이 떨어져 영업을 마쳤습니다. 다음날부터는 반죽을 늘려 장사를 했습니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호두과자를 사갔습니다. 그런데 이 장사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단속반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뇌성마비 아들을 안고 동구청에 가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호두과자 장사를 하는데 지치기도 했고,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호두과자 장사는 2년 만에 접었다. 노부부가 찾아와 차량과 장소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김씨는 호두과자 굽는 법과 노점상 단속반을 피해 도망다니는 노하우도 함께 가르쳐 주었다.
1996년 김씨는 다시 귀농을 했다. 다시 귀농하면서 유기농을 실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해에 ‘유기농표시 신고 고유번호’를 부여 받았다.

김씨는 현재 1만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쌈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처음에는 30여 가지의 쌈채소를 생산했는데, 요즘에는 상추, 케일, 치커리, 겨자채, 비트, 셀러리 등 16가지만 생산하고 있다.


“가지 수를 줄인 것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상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겠다는 다시 말해서 소비자 중심으로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다 보니 선호도가 낮은 쌈채소는 적자로 돌아왔습니다. 농업도 경영이 제대로 되어야 농사꾼들이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겁니다. 상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농장의 이름을 ‘두리농원’이라고 했습니다. ‘두리’는 ‘두리뭉술’이라는 말에서 따왔습니다. 씨앗의 모양이 두루뭉술합니다. 두리뭉술한 씨앗 속에서 희망의 싹이 나옵니다. 공동체는 두리뭉술하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김씨는 두리농원을 비롯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언약을 공표한다고 한다.


“바른 농사꾼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귀농자들이 우리 농원을 많이 찾아오는데 뜬구름 같은 이상만 갖고 옵니다. 농촌을 머릿속으로만 그려서는 안되고, 몸으로 겪어야 합니다. 농업기술은 특별한 것은 아니라 체험하면서 자연과 공생하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됩니다.”


김씨는 최근 들어 ‘유기농생태학교’ 문을 열었다. 소비자들에게는 농촌마을 체험, 유기농산물 요리 체험, 농산물 수확, 논 밟기(트레킹), 생태농업인들에게는 재배 기술, 전자상거래를 활용한 농산물 마케팅, 귀농인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경제질서의 재편으로 농촌이 몰락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이제 농촌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농촌은 인류의 식량창고이고 문화의 텃밭입니다. 농민들은 자부심을 갖고 당당해져야 합니다. 지금도 내가 살 길은 농촌이라는 신념은 변함이 없습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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