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전국 대학 박물관에 수많은 고미술품 납품
궁동 예술의 거리에서 고미술품·고서화 전시장 운영
영화·역사드라마 대도구·소품 제작에도 소

곡성 옥과에서 태어난 김씨는 담양으로 들어오기 전에 광주 궁동 예술의 거리에서 30여년 동안 고미술품(골동품) 매매업을 했다. 그동안 광주전남 고미술품협회장, 광주시 동구청에서 건립한 ‘무등미술관’ 관장, 광주 충장축제 추진위원 등을 지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미술품의 미음(ㅁ) 자도 몰랐습니다. 장래 희망도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고려청자 한 점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제 인생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겁니다.”
1970년 초 김씨가 군대에 복무하고 있을 때 일이었다. 하루는 간첩이 출몰했다는 첩보를 받고 작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신조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필자는 그 무렵 용면 가마골에도 무장공비가 나타났었고, 그 가운데 일부 세력이 담양읍까지 진입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담양읍에 진입했던 공비들은 남초등학교 건물 환기통 밑에 무기를 숨겨놓고 활동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실제로 여기저기서 무장공비가 출몰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작전병력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작전을 시작했는데 너무도 쉽게 간첩이 잡혔습니다. 생포를 해서 조사를 했는데 간첩이 아니라 주거가 확실한 민간인이었습니다. 검색을 했는데 무기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배낭 안에서 오래 된 그릇들이 나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통제구역 가까이 접근했는가를 물었는데 시원하게 대답도 하지 않고 뭔가 감추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배낭 안에 들어 있던 그릇 하나를 주면서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이 골동품에 대해서 잘 모르던 때였습니다. 신분도 확실하게 밝혀졌기 때문에 풀어주었는데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호리꾼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씨는 그 호리꾼이 준 그릇을 들고 서울 인사동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 팔았다. 그런데 상상도 못할 정말 놀라운 값을 받았다. 당시 김씨가 받고 있던 월급 3년치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제대후 집으로 돌아온 김씨는 다시 한 번 고미술품의 가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 집 벽장 안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쌓아둔 책이 있었습니다. 몇 대 조부터 보관해 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고서(古書)들이었습니다. 그걸 광주의 골동품 가게에 보였더니 희귀본(稀貴本)이라면서 꽤 값이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미술품에 대해 수집도 하고 매매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이 분야는 아직 어두웠기 때문에 메리트가 있었습니다.”
30여년 동안 서울, 부산, 대전, 광주 등 경향각처(京鄕各處)의 대학 박물관에 수많은 고미술품을 납품했다. 1990년에는 궁동 예술의 거리에 4층짜리 건물을 1층은 고미술품 가게, 2층은 고서화전시장, 3층은 서양화전시장으로 운영했다. 화순 동면에 이른바 ‘예술인촌’을 조성하기 위해 꽤나 넓은 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고미술품을 취급하면서 돈도 벌 만큼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화순 동면에 예술인촌 조성을 취소하고 부지를 팔았습니다.”
부지를 팔자 수십억원의 큰돈이 생겼다. 당시 서양화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값은 호당 200만원을 넘었다. 김씨는 투자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서양화 시장이 시들해지면서 호당 30만원대 이하로 떨어졌다. 그 후 김씨는 폐교가 된 월산동초등학교 건물을 매입해 작품을 보관하고, 한편으로는 영화, TV드라마 대도구와 소품제작을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방송국에서 역사드라마를 촬영할 때 김씨에게서 소품을 빌려다 쓰고 있었다. 그리고 구할 수 없는 것은 제작의뢰를 해왔는데 이것이 대도구나 소품제작의 계기가 된 것이다. 20여년 동안 김씨가 소품 제작을 맡았던 영화로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취화선’을 비롯해 ‘전우치’ ‘황산벌’ ‘황진이’ ‘형사’ 등이 있고, 드라마로는 ‘대장금’ ‘신돈’ ‘상도’ ‘주몽’ ‘대왕사신기’ ‘국희’ ‘선덕여왕’ 등이 있다. 선덕여왕의 주인공 ‘미실’이 최후를 마쳤던 용상(龍床)은 송학랜드에 전시되어 있다.
2000년에 들어서서 김씨는 그동안 꿈꾸어 왔던 개인 박물관 건립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평에 건립할 생각으로 부지 1만평을 매입했다. 그러다가 담양에 건립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담양으로 정한 것은 내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담양은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으며, 가사문학, 음식문화 등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도로가 사통팔달이어서 전국 어디에서든 하루 일정으로 찾아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관람객 유치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03년 송학랜드가 문을 열었다. 송학랜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뒷산의 이름이 송학산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씨의 아내의 이름이 ‘송학(宋鶴)’이기도 하다.
“개관을 하고 나서 처음에는 관람객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관람객이 줄어 운영에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은 내 사업 구상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익 창출만을 생각하는 일반 사업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하는 사업은 문화사업입니다. 문화사업은 단 기간에 성패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투자해야 하는 것이 문화사업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2011년 들어 송학랜드는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먼저, 청소년 수련 프로그램을 도입해 학생들의 체험활동 공간으로 활성화해 나갈 계획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금성산성 오르기 등을 통한 호연지기 기르기, 청소년들에 대한 우리 고미술품에 대한 교육, 인절미 만들기, 황토염색하기 등 선인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보는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주, 담양, 장성 등의 학교에서도 관심을 갖고 상당수 학교에서 신청을 해 놓은 상황이다. 송학랜드에서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문화(性文化)’ 관람과 체험이다.
“성(性)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 하고 남의 눈치를 살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송학랜드에서 기획하고 있는 이 일이 관람객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아울러서 건전한 성문화를 만들어가는 데도 일익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밖에도 송학랜드는 지속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해 정체되어 있는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 거듭 새로 나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문화사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50, 100년을 내다보는 심정으로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담양의 명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김씨는 이를 위해 중국, 일본, 베트남 등지를 돌아다니며 5,000여 점의 성 관련 작품과 유물을 수집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