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최고 프로 농사꾼입니다”
직장생활·사업하며 모은 자금 고향에 투자
자연농업 참담하게 실패, 한때 유기농 포기생각
전국 돌아다니며 공부 거듭, 상품가치 인정받아
학교 급식업체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명옥헌(鳴玉軒)’ 뒤편 산등성에 3만여평의 감나무밭이 펼쳐져 있다. 이 넓은 감나무밭에서 나오는 단감의 브랜드는 ‘서당골훈장단감’이다. 감나무밭의 주인 오영춘씨가 브랜드를 서당골훈장단감이라고 한 것은 명옥헌의 옛주인 오희도(吳希道, 1583~1623)와 무관하지 않다. 오영춘씨는 오희도의 13대 손이다.
오희도와 능양군(후의 인조)의 일화가 있다. 광해군을 폐위하기 위해 능양군이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려고 오희도를 찾는다. 학문에 여념이 없던 오희도는 완고하게 거절한다. 학문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오희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의 뜻을 펴려 했으나 난데없는 병으로 41세에 생을 마감한다. 아들 오이정(吳以井, 1574~1615)은 물처럼 깨끗했던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명옥헌에 간직했다.
서당골훈장단감 농원 오영춘씨가 본격적으로 단감농사를 시작한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사업에 실패한 뒤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고 고향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했을 겁니다. 누구나 다 해도 오영춘이는 농사꾼이 못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친환경농업으로 단감농사를 짓겠다고 했으니 주위 사람들 눈에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겠습니까? 아마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오씨는 광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으나 졸업후 운수회사에서 입사해 17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다가 회사사정으로 명퇴를 한 뒤 3년 동안 자격증 공부를 해 열관리, 위험물 취급, 고압가스, 냉동 등 7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마흔살에 다시 취직을 했다.
“자격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 다니면서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벌이도 괜찮았습니다. 그때 돈이 생기면 고향마을 야산을 개발하는 데도 투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4천평에다 700주의 단감을 심었습니다.”
오씨가 단감나무를 심은 것은 1990년이었다. 나무를 심기는 했지만 이로부터 IMF가 터지던 1997년까지는 감나무밭에서 얻어지는 소득은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회사에 다니고, 또 그런대로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저축하는 마음으로 감나무밭에 투자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IMF가 터지자 곧바로 오씨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고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되어 1998년 4월에 고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겪었던 어려움을 어떻게 다 말로 하겠습니까? 무시도 당했습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기어코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 농사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해왔던 방식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경상남도 하동에서 자연농법으로 단감을 재배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씨는 곧바로 하동으로 달려가 선진농법을 견학했다. 하동단감을 보고 감탄을 하게 되었고 1주일 후 아내(박명숙)와 함께 다시 찾아갔다. 그 농장 주인은 첫마디에 ‘자연농업’을 모르면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오씨 부부는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사단법인 자연농업생활관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괴산을 오가며 교육을 받고 난 이듬해 1999년부터 오씨는 자연농업을 실천했다. 과수원에 호밀과 헤어로비치 씨앗을 뿌렸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 나는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네는 제초제를 써서 풀을 죽이는데 나는 풀을 기르고 있었으니까요. 감나무는 연간 1500mm의 강수량을 필요로 하는 과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나무밭에 풀을 기르면 수분증발을 막는 효과도 있습니다.”
오씨는 초생재배 외에도 인삼뇌두, 당귀, 생강, 마늘, 쑥 등을 발효시킨 한방영양제와 미나리, 질경이, 죽순 등의 녹즙을 이용하여 미생물을 활성화시켜 감나무밭에 뿌렸다. 주기적으로 바닷물도 뿌렸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저농약과 자연농업을 했는데 단감의 품질향상에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에 전라남도 친환경 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친환경 대상을 받고 나니까 의무감과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005년부터 당장 무농약으로 가자고 아내와 함께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을의 결과는 너무도 참담했습니다.”
유기농 단감을 헐값에 처리하고 돌아오면서 오씨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기농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이때 부인 박명숙씨가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친환경 대상을 받은 사람의 의지가 그렇게 약해서 되겠느냐며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씨 부부는 유기농 성공을 위해 2006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농촌진흥청 ‘Top-Fruite’ 과정, 한국포럼 한국벤처농업대학(충청남도 금산),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유기농전문가 과정, 진흥청 e-business'(마케팅) 과정, 조선대학교 유기농전문가 과정, 순천대학교 마이스터대학 과수반 과정 등 전국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서당골훈장단감의 품질도 좋아지고 시장에서 상품가치도 놓아졌다. 학교 급식업체에도 공급을 하게 되었고 유통망도 늘어났다. 열심히 공부하며 앞서가는 농사꾼 오영춘에 대한 평가도 뒤따랐다. 2008년, 오씨는 농림수산부로부터 ‘신지식인농업인장’을 수여받았다. 단감분야 대한민국 제1호 신지식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유기인증’을 획득했다.
이제,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서당골훈장단감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나 있다. 교육생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연평균 1,000명을 웃돈다. 어느새 단감밭의 규모도 3만평에 8천주로 늘었다. 4천평 700주로 시작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외형상으로 10배가 커졌다. 연간소득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이에 대해 오씨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먹고 살 만큼은 번다고 말한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오씨는 이제 성공한 농사꾼, 이른바 ‘부농(富農)’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씨의 꿈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요즘은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강의도 많이 합니다. 강의 시작 첫 마디가 ‘나는 대한민국 최고 프로 농사꾼입니다’입니다. 그리고 우리 딸이 껍질째 먹는 단감을 생산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 분야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을 프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프로는 일을 잘 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농사꾼들이 모두 프로정신을 가진다면 FTA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FTA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유기농입니다. 이제는 농사꾼들도 벤츠나 비엠더블유 타고 다녀야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오영춘씨 부부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들이 몹시 당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당함이란 가끔 오만함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씨 부부에게서 느끼는 당당함은 아주 기분 좋고 상큼했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당당함이 있다.
/설재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