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돼 온 대나무에 얽힌 설화
구전돼 온 대나무에 얽힌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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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5.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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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설재기 기획국장, 담양예술대학서 강의


봉황새가 굶주려도 좁쌀 대신 먹는다는 竹實
걸죽 죽취일 죽부인 등 이름마다 사연담겨

엄동설한에 죽순 드시고 싶다는 병든 노모 위해
효심 지극한 아

본지 설재기 기획국장이 지난 17일 담양문화원 1층 교육실에서 ‘대나무에 얽힌 설화’에 대해 강의했다.<사진>
설 국장은 담양문화원에서 운영하는 담양예술대학의 교육프로그램 중 지역 문화콘텐츠의 발굴차원에서 이뤄진 이번 강의에서 걸죽, 죽취일, 만파식적, 죽부인, 맹종죽, 대나무 열매, 담양 효자이야기 등에 대한 설화를 소개했다.
또한 그는 대나무 고장이라고 자부하고 있으면서도 대나무에 대한 설화가 빈약한 담양이 앞으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 담양대나무에 대한 스토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의 내용을 발췌해 정리한다./편집자주

◇ 설화란?
설화(說話)를 한 마디로 말하면 노래가 아닌 말로 전승되어 옛날이야기이다.
그러나 옛날이야기라고 다 설화가 되는 건 아니다. 옛날이야기 중에서도 일상적인 잡담이나, 역사적 사실 등 문학성이 없는 것은 설화라고 할 수 없다.
잡담은 일정한 구조가 없고, 역사적 사실은 꾸며내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적 상징이 없다.
반면 설화는 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 낸 이야기로서 문학적 상징을 띠고 있는 것을 말한다.

◇ 대나무 얽힌 설화

# 걸죽(乞竹)
남도에서는 산월(産月)이 가까워진 며느리의 시아버지가 벼슬이나 덕망이 높은 명가를 찾아가 그 집 울안에 자라는 대나무 가지를 베는데, 이를 걸죽(乞竹)이라 했다.
그 대가지로 태어날 아기의 탯줄 자르는 죽도(竹刀)를 만들면 그 명가의 주력(呪力)이 전도되어 아기가 출세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명가들에서는 명운(名運)이 세 나간다 하여 아는 사이 아니고는 걸죽을 거절했고, 그로 인해 야밤에 대나무를 훔치는 일이 종종 생기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대칼로 탯줄 자르는 것은 한·중·일의 공통 산속(産俗)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다.

# 죽취일(竹醉日)의 유래
성질이 곧고 지조가 굳은 대나무는 한번 뿌리를 박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옮겨 심으면 죽고 만다.
그런데 대나무가 일 년에 딱 한번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음력 5월 13일이 바로 그 날이다.
300여년 전에 씌어진 중국의 ‘화용월령(花庸月令)’에 의하면 술에 취하는 음력 5월13일을 택일하여 대나무를 옮겨 심으라고 되어 있으며, 그날이 아닐 경우라도 ‘5월13일’ 이라고 쓴 종이쪽지를 옮겨 심은 대가지에 매달면 뿌리가 활착(活着)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포절군(蒲節君)이라고 일컫는 대나무의 절개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어디로 옮겨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취하는 날이 있다는 죽취일을 통해서 우리는 삼백예순날 내내 맑은 정신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일탈의 사상과 그 미학을 배우게 된다.

# 만파식적(萬波息笛)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진다는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파식적이라고 했다.

# 죽부인(竹夫人)
죽부인의 성은 죽이고, 이름은 빙으로 위비 사람인 운(왕대)의 딸입니다. 그의 선조가 음악에 조예가 깊어 황제가 등용하여 음률을 맡기게 하는 등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 죽씨는 운의 대에 이르러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아우인 당이 익모의 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죽부인이다.
죽부인이 커서 이웃에 의남이라는 청년이 음란한 말로 지분거렸으나 죽부인이 꾸짖자 의남이 부끄러워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죽부인은 너무도 정숙했다. 그녀는 차츰 자라서 이웃에 송대부와 결혼하였는데 송공은 부인보다 나이가 18세나 위였다. 죽부인의 성격이 곧고 두터워서 문여가나 소동파와 같은 이들은 그 모습을 베껴다가 보배로 삼았을 정도였다.
송대부가 신선을 배워 곡성산에 가서 놀다가 돌로 화해 버린 채 돌아오지 않자 죽부인은 혼자 살면서 가끔 시경의 위풍을 노래했다. 부인은 홀로 살면서 절개를 잃지 않아 모두가 그녀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러한 그녀의 행실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임금은 죽부인에게 절부(節婦)의 직함을 내렸다.

# 맹종죽(孟宗竹)
맹종죽에는 중국의 효행설화가 있다. 중국 고금의 효행자 24인을 수록한 ‘이십사효’에는 맹종이라고 하는 사람이 들어있다. 맹종은 삼국시대 강하사람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그의 모친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대나무 순을 먹고 싶다고 해 그는 눈이 가득히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추운 겨울에 대나무 순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효행을 할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자 뜨거운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눈이 녹고 죽순이 돋았다. 맹종은 기뻐하며 이것을 따서 어머니에게 잡수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맹종죽의 기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죽죽(竹竹)
삼국시대에 백제의 의자왕은 친히 병졸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략했다. 이때 윤충이란 장군은 일만명의 병정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고 신라 선덕왕 11년 8월의 일이다. 이때 대야성을 지키던 장수에 죽죽이란 사람이 있었다. 죽죽은 끝내 대야성을 지키다가 죽었다.
죽죽이 순절할 때 그 동료인 용석은 지금의 상황으로는 싸움에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일단 항복했다가 뒤에 다시 일을 꾸며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죽죽은 “네 말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나에게 죽죽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추운 겨울날에도 그 푸름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항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죽을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신라의 왕은 이 말을 듣고 진골이란 왕족의 골품을 하사하고 그 유가족을 왕도로 옮겨서 오랫동안 후대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영주와 충청북도와의 경계에 죽령이란 재가 있다. 이 죽령길을 죽죽이 처음 개설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위에는 돌로 다듬어 놓은 대나무 줄기가 있는데 이것은 죽죽의 이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진주 비봉산과 죽실
신라 말과 고려 초 쯤 풍수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각 지역마다 풍수의 관점에서 복을 취하려는 설화가 많이 생겼다. 대나무열매 설화도 그런 유형 중 하나이다.
산이 봉황새처럼 생겼거나 봉황새가 산다고 생각하여 봉산(鳳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봉황새는 오동나무에 깃들고, 성질이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竹實)를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는 오동나무를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관아 건물 또한 진주의 진산인 비봉 아래에 있는 금롱(金籠)의 형국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비봉산 아래에 죽동(竹洞), 죽전(竹田)마을이 있어 봉황새가 먹는 대나무 열매를 공급토록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한때 대나무 열매가 유용한 양식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들이 곤욕을 치를 때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서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한다.
마을사람들이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데, 뜻밖에도 7월과 8월에 산죽(山竹) 수만 대가 돋아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죽실(竹實)은 보리쌀 비슷하게 생겼으나 보리쌀보다는 약간 작고, 밥을 지을 수도 있으며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도 끓일 수 있었다. 죽이나 술 등의 대용식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상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죽실(竹實)로 죽을 끓여 먹고 병을 나았다는 얘기는 담양에도 있다. 실제로 월산 용흥사 골짜기에 죽실을 맺는 산죽이 많이 자라고 있다.

# 담양 효자이야기
담양의 효자에 관한 이야기는 맹종의 이야기와 유사하나 보다 구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효행이 지극한 아들이 있었는데 병든 노모가 엄동설한에 죽순이 드시고 싶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맹종의 이야기와 전개가 같다. 아무리 대순을 찾아 대숲을 헤매도 죽순은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걸음으로 되돌아오는 아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봄에 만들어 놓은 대바구니였다. 별도리가 없었던 아들은 솥에 대바구니를 넣고 달인 뒤 그 물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전해진다.

<대나무의 식물·사회·문학적 의미와 빈약한 담양대나무 설화는 다음호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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