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게이트볼 담양군연합회 고문 박채규씨
78. 게이트볼 담양군연합회 고문 박채규씨
  • 마스터
  • 승인 2011.06.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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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볼 경기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1995년 예순여섯 살에 게이트볼 운동 시작
군연합회 사무국장 맡아 12개 읍면 팀 조직
한일 교류대회, 아시아대회 등 국제경기 선수
생활체육 담양회장, 전

올해 여든두살인 박채규씨는 예순여섯살이 되던 1995년에 게이트볼 운동을 시작했다. 노년에 들어 게이트볼을 시작했지만 그 열정은 남달랐다. 박씨는 현재에도 게이트볼 담양군연합회 고문과 전라남도연합회 상임고문을 맡으면서 게이트볼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그동안 게이트볼과 관련하여 수 많은 직함을 갖고 일해 왔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도 많이 받았다.

박씨는 젊은 날 일간지 주재기자, 담양군언론인회장 등을 맡으며 언론인 생활을 했다. 그 이후는 주로 체육회와 관련한 일을 했다. 체육회와 관련해서는 주로 게이트볼과 관련한 일을 했다. 담양군육상협회장, 국민생활체육 전남게이트볼 사무국장, 국민생활체육 담양게이트볼연합회 회장, 국민생활체육 전남게이트볼연합회 회장, 국민생활체육 전국게이트볼연합회 이사, 국민생활체육 전국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씨는 젊은 날 지역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지역의 언론인 가운데는 지역사회에서 원성의 대상으로 지목받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의 시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의 기사를 놓고 한쪽이 좋아하면 다른 한쪽은 안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까닭으로 애매하게 원성의 대상으로 낙인찍히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인으로서 박씨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본인에게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한 말이 기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왜곡되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15년 동안 지역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정의를 생각했고, 약자편에 서려고 애썼습니다. 기자생활 그만 두고 19년 동안 모 보험회사 소장을 했습니다. 기자생활 하면서 손가락 받는 행동을 했었다면 어떻게 긴 세월 보험회사를 했겠습니까? 지역의 언론인들은 모두가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은 고쳐져야 합니다. 물론 기자들이 여럿인데 지탄받는 사람 한두명이 왜 없겠습니까?”

박씨는 스스로를 스포츠맨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도 게이트볼 전라남도 대표선수로 출전한 박씨는 요즘도 매일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4~5시까지 게이트볼 경기를 하고 있다.


“주의의 권유로 게이트볼 담양군연합회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가입하면서 곧바로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담양군 전체회원이 15명이었습니다. 연합회라는 명칭이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게이트볼의 저변확대를 위해 먼저 회원수를 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굿을 해도 사람이 많이 모여야 흥이 나는 법 아닙니까?”


박씨는 사무국장을 맡고 나서 12개 읍면의 게이트볼팀을 조직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1995년 12월까지 해서 모든 읍면의 게이트볼팀이 만들어졌다. 팀이 많아지자 관내 대회의 규모도 커졌고 대외적인 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팀들을 초청해 대회도 열수 있게 되었다.


박씨는 게이트볼 담양군연합회 사무국장을 무려 9년 동안이나 맡아 여러가지 일을 해냈다. 사무국장 9년 동안 한일 교류대회, 아시아대회, 한일 친선대회 등 국제 경기에 대표선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동안 받은 공로패나 표창패는 진열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담양의 게이트볼이 활성화 되고 도 단위나 전국 단위의 대회도 개최하게 되었는데 제대로 된 게이트볼 경기장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전천후 게이트볼 경기장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여러가지로 운이 따라 비교적 수월하게 2003년도에 창평에 8면의 전천후 경기장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창평에 소재하고 있는 전천후 경기장의 부지는 창평면체육회 소유로 되어 있고 건물은 전라남도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한다. 창평의 전천후 게이트볼 경기장은 애초에 순천에 건립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지매입에 문제가 생겨 순천 건립이 무산되었다. 이때 창평면체육회에서 무상으로 부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박채규씨는 창평에 전천후 게이트볼 경기장이 들어 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생활체육회 전국연합회 상임부회장을 맡고 있던 조상호씨의 도움이 컸다고 술회한다. 조상호씨는 대전면 출신인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의전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요즘 게이트볼 경기장은 시골 면 소재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체육시설물이 되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게이트볼 인구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 게이트볼에 대한 편견은 있다. 노인네들만이 하는 경기라는 편견이다.


“게이트볼을 순발력이 떨어지고 힘없는 노인들이나 하는 경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이 든 노인네들이 대충 해도 되는 경기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게이트볼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룰도 거의 100가지가 됩니다. 노인네들이니까 대충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게이트볼을 노인들의 심심풀이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무슨 운동이 될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운동이 많이 됩니다. 게이트볼은 정적으로 보이지만 동적인 운동입니다. 힘없는 늙은이들이 소일거리로 하는 운동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게이트볼이 남녀노소를 망라한 전 국민의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박씨는 2003년 담양고 게이트볼팀을 지도해 전국대회에서 준우승과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팀은 선수들의 졸업과 동시에 해체되고 말았다. 박씨는 담양 관내 초중고에서 게이트볼을 육성한다면 스포츠마케팅의 효과를 거둘 수 있고 나아가서 담양의 또 다른 자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게이트볼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경 프랑스 남부 농민들이 양치기가 쓰는 끝이 굽은 막대기로 공을 쳐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문을 통과시키는 페일 메일(Paille maille)이 발전하여 크로케가 되었다. 이 경기는 영국과 미국에도 보급되었고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홋카이도(北海島)에 살던 스즈키 가즈노부(鈴木和伸)가 1947년 크로케 경기에서 힌트를 얻어 나무로 스틱과 공을 만들어 어린이들의 야외 공놀이로 ‘게이트볼’이라는 경기를 처음 고안해 냈다. 일본 사람 스즈키 가즈노부가 어린이들의 야외 놀이로 고안해 낸 게이트볼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들의 경기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젊은 사람이 게이트볼 경기를 하면 놀림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게이트볼은 5명이 한 팀을 이루어 경기를 한다. 이 팀원들은 나이가 지긋한 편이라서 경기 도중 가끔 자기주장을 하면서 감정적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저 역시 지금도 경기에서 지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경기도중 팀원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집에 와서 많이 반성합니다. 경기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게이트볼을 하면서 날마다 수양을 하고 있습니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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