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조형(造形)을 탐구하는 인장예술가(印章藝術家) 조정숙씨
79.조형(造形)을 탐구하는 인장예술가(印章藝術家) 조정숙씨
  • 마스터
  • 승인 2011.06.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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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프고 나서 내 작품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훈장 할아버지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문공부가 하고 싶어져
한문, 서예, 조형서예 공부한뒤 전각에 심취
소녀시절부터 전

전각(篆刻)이란 서화(書畵)에 찍는 도장(圖章)을 새기는 것을 뜻하는데, 주로 전서체(篆書體))로 새기기 때문에 전각이라고 한다. 그 재료로는 돌, 상아, 뿔, 금속, 옥 등 다양한데 새기는 방법과 쓰임도 다양하다. 성명인은 음각으로 새겨 찍으며 글자 부분이 희게 나타나므로 ‘백문(白文)’이라고도 한다. 이와 반대로 호인은 양각으로 새겨 찍으며 글씨에 인주가 묻어 붉게 찍히므로 ‘주문(舟文)’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서화 작품의 오른쪽 위에 찍는 도장은 ‘두인(또는 수인)’, 좋아하는 문구를 조각한 것은 ‘사구인’. 책의 보관을 위해 조각한 것은 ‘수장인’, 사람이나 새와 물고기 등 동물모양을 조각한 것은 ‘초형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각과 섞여 쓰는 말 중에 서각(書刻)이 있는데, 이는 두꺼운 나무판자에 글씨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둘 다 새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각은 새기는 사람의 다양하고 무한한 창의성이 담겨 있지만 서각은 원재료에 써놓은 글자를 새기는 것을 말하는데 기능적인 면이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굳이 구분지어 말하자면 지금까지 제가 해온 작업을 전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각은 서예, 한문, 서각이 망라된 종합인장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장예술가 조정숙씨의 말이다. 조씨의 호는 효천(曉泉)이다. 전주에서 살았던 서예가 강암 송성용이 지어준 호이다.

조씨는 1954년 금성면 금성리 평신기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일 모레면 이순(耳順)인데 조씨에게서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첫 느낌은 아직도 먼 길을 가기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 매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직도 뭔가를 구상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씨에게서는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에게서 풍겨지는 그런 느낌이 풍겼다. 그 풍겨지는 느낌을 흔히들 ‘열정’이라고 한다.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다산연구소(茶山硏究所) 박석무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효천(曉泉) 조정숙은 우리 시대의 장인이다. 소녀시절부터 초로의 지금에 이르도록 전각에만 매달려 살아왔다. 대단한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인도 젊은 시절에야 열정을 바치다가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오래이면 더러는 정열도 식고 의욕도 줄어들기 마련인데 효천은 그러지를 않는다. 그래서 대단한 일이라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옛날의 역사와 문화를 더듬을 수 있고, 옛것을 더듬어보아야만 새것에 대한 호기심과 창작에 대한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새파랗게 젊고 예쁘던 20대 초반에 만난 효천, 그는 그때부터 옛것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전각의 장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조씨는 어떤 연유에서 전각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저는 마을의 훈장을 하셨던 할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한학(漢學) 읊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유년시절에 들었던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은연중 많은 작용을 했던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문득 한문공부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한문공부를 하다 보니까 서예공부도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각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조씨는 전각을 하기 전에 한문, 서예, 조형서예 공부를 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스승이 있는 곳이라면 먼 길도 마다않고 달려갔다. 화순에 살고 있는 만취 위계도로부터 한문을 수학했고 일몽 안상철, 남용 김용구, 소강 부달선, 묵해 김용옥 등 4명의 스승 밑에서 서예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서예학원 원장님의 권유로 전각을 공부하기로 했다. 곧장 서예학원 원장님의 소개로 부산에 살고 있는 석불 정기호 선생을 찾아가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전각공부를 했다. 도곡 김태정 선생님을 찾아가 조형서예를 사사받았다.


오랜 동안 공부를 한 다음 이른바 작품을 만들어 동아미전, 대한민국 서예대전 등에 출품했다. 조씨의 작품은 심사위원들로부터 독특한 조형미를 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여러 미술대전에서 상을 받은 조씨는 부지런히 개인전도 가졌다. 그동안 광주예술회관(1986년), 부산호텔(1986년), 서울경인미술관(1986년), 광주금호문화회관(1988년), 서울백악예원(1996년) 등에서 열차례가 넘는 개인작품전을 가졌다.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도 전시를 가졌다. 전시때마다 늘 새로운 재료와 표현방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선보였다. 장르도 다양하게 넘나들었다.

조씨는 80년대 중반 몸에 탈이 생겨 여러달 고생을 한적이 있다. 발바닥에 어혈(瘀血)이 생겨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정말 몸이 혹사당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새겼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생겨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고 한약도 먹으면서 가까스로 완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완치를 하고 나니까 몸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맑아진 정신으로 그동안의 작품을 살펴보니까 돈이 묻어 있더군요. 쉽게 말해서 돈 벌기 위해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아픈 후에야 내 작품을 제대로 보게 된 겁니다.”


그 무렵인 1986년에 목판본 소쇄원도(瀟灑園圖)를 복원했다.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원을 만들고 소쇄원이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이 소쇄원도가 도난을 당했다. 이 도난당한 소쇄원도를 조씨가 복원하는 데는 6개월이 걸렸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정말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만 돌면서 활동을 했지 고향에 대해서는 별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서 고향에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봉사라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진정으로 소박한 생각입니다. 그 방안으로 전라남도문화관광해설사, 화순과 담양 숲해설사, 담양 대나무해설사 활동도 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담양의 문화유산인 소쇄원도 복원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2007년 조씨는 ‘청송(靑松)에서 녹죽(綠竹)’이라는 주제로 열한번째 작품전을 가졌다. 이 작품전의 전각 재료는 죽간(대나무)이었다. 이 죽간에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면앙정 삼십영’을 새겼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조씨는 이 작품전을 열면서 ‘새삼스레 고향을 둘러보니 청송(靑松)과 녹죽(綠竹)이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밝혔다.

효천전각연구소 벽면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새긴 커다란 전각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벚나무에 새긴 것인데 2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다. 이 반야심경은 조씨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이다.


/설재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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