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소쇄원의 조영 배경과 경관
⑪소쇄원의 조영 배경과 경관
  • 마스터
  • 승인 2013.01.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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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담양군 남면의 지곡리(芝谷里) 지석(支石)마을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비의 별서정원이다. 소쇄처사(瀟灑處士)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일찍이 한양에 있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 들어 수학하고, 17세에 등과하고도 조선조 중종(中宗) 14년(1519)에 있었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이 전남의 화순 능주(綾州)로 유배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남하여 조영하기 시작한 누정명소이다.
소쇄원은 고문헌 기록과 소쇄원도를 통하여 원래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조선시대 별서정원이다.
정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이곳에 출입하여 내원의 48경을 두고 <소쇄원48영>을 짓기도 하였다. 양산보의 외종형이었던 면앙정 송순(宋純)이 이곳에 왕래하여 한 고을에 위치한 식영정 및 환벽당과 아울러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한 것도 결코 과장된 칭송이 아니다. 소쇄원의 담벽에 있는 애양단(愛陽壇)ㆍ오곡문(五曲門)ㆍ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고 쓴 석판과 목판 글씨들은 우리나라 대표적 명필로 지목하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다.
소쇄원의 내원공간은 애양단 구역(前庭)과 광풍각 구역(溪庭), 제월당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소쇄원의 조영은 양산보 당대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소쇄원사실(瀟灑園事實)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 양자징(梁子?)과 손자인 양천운(梁千運) 등 3대에 걸쳐 경영되면서 제대로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양경지의 방암유고(方菴遺稿) 가운데 근차중부가산30영운(<謹次仲父家山三十詠韻>)인 ‘소쇄원삼십영’은 내외원의 승경 30가지가 소개되어 있어 당시 소쇄원의 원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양산보는 평소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소쇄원은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내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는 곳이 없으니 평천장(平泉莊)의 고사에 따라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후손의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경고한다”고 하였다.
관직을 버리고 자연과 교유하는 전원생활을 했던 양산보는 그와 처지가 같았던 도연명, 주돈이(무숙) 등을 흠모하여 소쇄원 내의 자연적인 바위에 오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광풍각 후면의 축대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도오(桃塢=복숭아나무언덕)라 하였다. 또 애양단 시냇가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오동과 대나무를 주위에 심어 ‘봉황을 기다리는 대’라는 대봉대(待鳳臺)라고 이름을 붙였다.
소쇄원에 대한 송시열의 수필본(手筆本)을 1755년에 판각(板刻)한 소쇄원도가 전하고 있으며 이 소쇄원 그림을 새긴 목판에 하서 김인후가 당시 소쇄원을 보고 쓴 48수의 시제(詩題)가 새겨있다. 지금은 황금정, 소정(小亭), 고암정사, 부훤당, 담장 일부와 오곡문 및 하류에 설치되었던 외나무다리와 물레방아, 석가산 등이 없어졌고 입구의 목교는 1986년 복원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고경명이 <유서석록>에 보고 쓴 것처럼 제월당, 광풍각과 외곽의 긴 담장과 아름다운 계류(溪流) 및 매화, 난, 노송, 자미(백일홍), 죽림(竹林), 지당(池塘)과 상류의 외나무다리 등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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