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식영정의 조영 배경과 경관
⑫ 식영정의 조영 배경과 경관
  • 마스터
  • 승인 2013.01.2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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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정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별뫼(星山) 산자락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조선조 명종(明宗) 15년(1560)에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자신의 스승이요, 장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어준 누정이다. 석천은 서하당의 지극한 정성을 받아들여 65세에 이곳에 들어와 73세에 해남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8년동안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아래로 넓고 푸른 광주호를 내려보고, 남쪽 저 멀리 무등산 서석대(瑞石臺)의 산광이 비춰 보이는 곳으로, 임억령은 그 이름을 장자(莊子) 제물편에 나오는 ‘식영(息影)’이란 말로 명명하고, 세상 부귀영화를 버리고 산림에 묻혀 살고자 하는 뜻을 담아 누정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는 김성원을 비롯하여 자신을 존경하는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ㆍ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함께 신선으로 자처하며,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시적 교유의 즐거움을 누렸다. 때문에 이들을 흔히 ‘식영정 4선(仙)’이라 하고, 식영정을 달리 사선정(‘四仙亭’)이라 하였다.

석천은 또한 주변 산수경계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여 <식영정 20영>, <서하당 8영>을 제작하고, 그 밖의 4선들은 물론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등은 이에 차운한 식영정 제영을 이루어 이곳은 누정의 승지요, 시가문학의 산실로서 유명하게 된 것이다. 송강 정철은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 전원가사의 으뜸이 되는 ‘성산별곡’을 창작하여 송강가사의 산실 노릇을 하였다.
‘서하당유고’에 의하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1560) 식영정과 서하당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철은 이 성산에서 성산별곡 이외에는 <식영정20영>을 비롯하여 <식영정잡영> 10수, <서하당야좌(棲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次環碧堂韻)> 1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겼다.

<식영정기(息影亭記)>를 보면 ‘시내 위 푸른 솔밭 아래 언덕을 하나 차지하여 조그마한 정자를 세웠는데, 네 귀에 기둥을 세우고 복판을 비웠으며 지붕은 띄풀로 덮고 대발로 날개처럼 차양을 달았다. 바라보면 포장친 화방같이…’로 당시에는 초가의 정자로 안에 방이 없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의 모습은 서하당유고의 <성산계류탁열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식영정이 일찍부터 누정명소로 이처럼 널리 알려짐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주변 자연의 형승 때문이며, 정자의 자연 배경으로서 여러 시인들이 예찬하던 승경 스무 가지가 <식영정20영>에 실려있다. 송순이 지석마을의 소쇄원과 충효동의 환벽당과 함께 이곳을 가리켜 ‘일동삼승’이라고 지목한 바도 바로 이러한 승경을 염두한 칭송이었다.

당시 식영정에서 내다보이는 자미탄의 풍광은 비할데 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나 지금의 광주호의 명칭과 둑을 쌓은 구조물이 너무 무미건조하여 아쉽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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