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 89. 열여섯 살에 일제에 끌려간 곽예남 할머니
<담양인물지도> 89. 열여섯 살에 일제에 끌려간 곽예남 할머니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3.0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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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잊었어도 아리랑은 기억해요.”

     
 
 
1940년 봄, 일제에 빼앗긴 들녘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그리고 그해 봄날도 여느 해처럼 햇살은 그지없이 따스했고, 바람은 부드러웠으리라.


여자 열여섯 살이면 채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나이다. 홍조 띤 얼굴에는 솜털이 보송하고, 열여섯이라는 그 나이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예뻐 보일 때다. 그야말로 삐비(삘기) 속살처럼 부드럽고 향기로운 시절이 여자 나이 열여섯이 아닐까 싶다.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대산마을, 소산마을 안양골의 곽예남은 열여섯 나이로 1940년의 봄을 맞았다. 2남 4녀의 둘째딸로 태어난 곽예남은 소학교(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위의 오빠와 언니들은 소학교를 마쳤다. 당시로 봐서는 시골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곽예남은 소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1940년 4월 어느 날, 면서기와 주재소 순사가 와서 달콤한 말로 꼬드기며 선전을 했다. 아직 미혼인 처녀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말로만 희망자를 뽑는 것이었지 거의 강제로 지목을 했다. 이때 곽예남도 지목을 받았다. 이때 안양골에서는 곽예남 또래들 다섯 명이 그들에게 끌려가듯 고향을 떠났다.


“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돈을 많이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이제 아흔네 살이 된 곽예남할머니는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이종조카 이관로(59세) 씨의 도움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곽예남할머니는 부분적인 치매현상까지 보이며 우리말을 많이 잊어 버렸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군대트럭을 타고 여러 날이 걸려 도착한 곳이 중국 흑룡강성 어딘가였다. 그곳이 일본군 위안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때부터 지옥 같은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차마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목숨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안부’라고 말한다. 곽 할머니의 이야기를 대신하여 들려주던 이관로 씨는 위안부라는 말에 목소리를 높여 강변을 한다.


“그게 어떻게 해서 위안부입니까? 일본놈들이야 미화해서 그렇게 부를 수는 있겠지만 피해를 당한 우리들도 위안부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측에서 끝까지 사죄를 안 하는 것도 이 위안부라는 말에 함정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성노예가 맞습니다.”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은 미국·영국·네덜란드·소련·중화민국 등의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항복하게 된다.

이 태평양전쟁에서 진 일본군은 곽예남 할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마치 헌 궤짝 버리듯 남겨놓고 퇴각해 버렸다. 이때 곽 할머니의 나이 이제 스물한 살이었다. 흑룡강성에 도착하여 6년이 지났지만 민간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던 터라 곽 할머니의 일본어나 중국어 사용은 원활하지 못했다. 몇 개의 낱말을 조합하여 어렵사리 의사소통을 했다. 


중국 관리가 곽 할머니에게 고향을 물었다. 그런데 글자를 전혀 몰랐으므로 정확히 답변할 수 없었다. 곽 할머니는 고향과 관련하여 세 지역을 말했다. 광주, 대명(담양), 대정(대덕)이었다. 중국 관리는 세 지역 중 광주에 대해서만 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곽예남할머니가 향한 곳이 중국 광동성의 광주(廣州)였다. 중국 관리는 전라도 광주(光州)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곽 할머니 역시도 중국 관리가 시키는 대로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정은 참으로 멀고 힘들었다. 광저우까지는 몇 달이 걸릴지 알 수도 없었다. 석 달이 걸려 도착한 곳이 안휘성이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지쳐 어디든 머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수중에는 돈 한 푼도 없어 무작정 식당이나 농가에 들어가 일을 거들어 주고 구걸하여 먹고 연명했다.

그러다가 중국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첫아들을 낳았는데 세 살에 날려 버렸다.

그런 저런 이유로 그 남자와 헤어진 다음 이번에는 전처와 사별을 한 나이 차이가 많은 남자를 만났다. 최 씨 성을 가진 중국인이었는데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가 5남1녀나 되었다. 재산도 꽤 많은 남자였다. 이른바 재취(再娶)였던 것이다. 5남1녀의 새엄마로 20년을 살았는데 남편과 사별을 했다.

그 사이 자식들은 장성을 해 제 갈 길로 가고 곽 할머니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런데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살았다. 혼자 살면서 저혈당, 세포암, 백내장 등으로 고생을 했다. 혼자 지내다 가끔씩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노래 한 가락을 흥얼거렸다. 아리랑이었다. 우리말을 많이 잊어 버렸는데 아리랑은 또렷이 기억했다.


“혼자 살면서 왜 고향이 그립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무식해서 어디 찾아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보지도 못했겠지만 그보다도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겠지요. 물론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은 이모님의 잘못이 아니지요. 굳이 탓을 돌리자면 역사지요. 역사의 잘못을 왜 여자에게 돌립니까?”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는 40일 동안 버티다가 항복한다. 이후 청나라는 소현세자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녀자들을 끌고 간다. 끌려간 부녀자들은 오랑캐들에 의해 몸을 망치고 노예로 살다가 귀향한다.

그런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미 절개를 잃었다 하여 오매불망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환향녀들은 자결하기도 하고 비구니의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것이 ‘화냥년’의 어원이다.


고향이 그리울 때, 치가 떨리도록 부끄러운 옛일이 떠오를 때, 몸은 아픈데 혼자 있다는 것이 너무도 무서울 때, 그 무엇인가를 간절히 붙잡는 심정으로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살아가던 곽예남할머니의 귀국의 실마리를 풀어낸 것은 안휘성에 만난 두 번째 남자의 둘째아들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곽 할머니의 손자인 것이다. 그 손자가 강소성방송국의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곽 할머니의 이야기가 전파를 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미 곽 할머니의 이름은 ‘곽예남’이 아니라 ‘왕수운’이었다. 개명을 한 것이다. 이 방송이 다시 한국에서 방송되고 급기야 ‘정대협’이 안휘성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곽 할머니는 그의 이름을 ‘곽여남’, 또는 ‘박영남’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대덕면’ 역시 ‘대정면’으로 기억했다. 정대협은 대한민국에 ‘대정’이라는 지명을 살펴봤다. 제주도와 강원도에 ‘대정’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그곳으로 가서 수소문을 했는데, ‘곽’씨와 ‘박’씨는 살지 않았다.

다시 ‘광주’와 ‘안양골’을 추적했는데 담양 ‘대덕면’으로 연결되었고, ‘대정’은 ‘대덕’을 잘못 발음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결론이 맞아떨어졌다.


마침내 2004년 4월 1일 곽 할머니는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228번지 안양골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오는데 참으로 길고도 긴 64년이 걸렸다. 그리고 때마침 그날은 곽할머니의 친정아버지 제사 전날이었다.


곽 할머니는 2년 전 폐암4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명 연장 3개월의 소견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곽 할머니는 부분적 치매 증세를 보이는 것 말고는 건강한 편이다.


“의사 진단의 몇 배를 사는 것은 이모님이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과 오빠를 만나고, 옛집에 가는 것이 이모님의 희망이지요.”


요즘도 곽 할머니는 잠을 자면서 수시로 경기를 일으킨다고 한다. 너무도 가슴 아픈 옛일들이 악몽으로 곽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고 한다. 곽예남할머니에게 아리랑을 청했더니 주저 없이 부른다. 아흔네 살의 할머니의 얼굴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가 번진다. 그 수줍고 천진한 미소가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이 글은 2017년 3월 8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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