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팔에 열한 차례 다녀왔습니다. 대통령도 만나고, 총리, 정부 고위직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국이 더 좋을 텐데 왜 네팔에 자주 오느냐고 묻습니다. 안나푸르나봉이 좋아서냐, 아니면 선교의 목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뭐라고 꼭 집어 대답할 수 없지만 나는 네팔이 좋습니다. 전생에 네팔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힌두교를 믿는 네팔사람들은 ‘카르마’를 믿습니다. 불교의 ‘인연’과 같은 것이죠.”
2014년, 광주에 살고 있는 네팔사람이 전성현(58)씨를 찾아와 자기 나라에 한국식 병원을 만들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네팔을 방문했는데 처음 본 광경들이 가슴에 깊이 다가왔었다고 전씨는 술회한다. 젖먹이아이를 등에 업은 또다른 아이, 고무줄놀이 하는 아이들, 흙먼지, 이런 것들이 전씨에게 아련한 옛날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전씨는 올해로 의사생활 서른두 해가 되는 소아과 전문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직함은 ‘네팔광주진료소 소장’이다.
전씨가 병원 진료실 밖의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10년부터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늘 ‘생각으로만’, ‘말로만’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서로를 ‘로만 원’이네, ‘로만 투’네, ‘로만 쓰리’네 하고 놀립니다. ‘말로만’ 하지 실천이 없다는 뜻입니다.”
전씨는 담양읍장을 18년 역임한 최장수 담양읍장 전이규씨의 3남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다. 이렇듯 형들을 만나면 ‘로만’이라고 놀려대고 또한 형들로부터 ‘로만’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전씨가 ‘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나선 것은 2010년 어느 날이다. 병원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가게’를 찾아간 것이다. 누가 권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찾아가서 자신이 아름다운 가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사회봉사’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후 ‘아름다운 가게’ 운영위원이라는 직함을 얻어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후 광주지역의 예술인들을 위해 예전의 전남도청 부근에 ‘메이 홀’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만드는데도 앞장섰다. 메이 홀은 광주 5월을 생각하며 만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홍성담, 황재형, 박불똥 같은 화가들을 만나고, 지역의 문인들을 만나 이런저런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전씨가 즐기는 또 다른 재미라고 한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던 해 저는 의과대학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그때는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도 않았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시쳇말로 범생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지 모를 아쉬움과 미안함 같은 것을 느끼면서 진료실 밖의 세상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를 찾아가 의료봉사를 하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그냥 ‘생각으로만’이었다. 그러다가 2012년 6월, ‘사단법인 희망나무’에서 추진하는 행사에 참여하여 첫 번째 해외의료봉사에 나섰다. 희망나무에서는 한국으로 시집온 해외여성들의 친정나들이를 도와주고 있었다. 전씨는 이때 의료팀의 일원이 되어 베트남 오지로 향했다.
“곧 전복될 것 같은 위태로운 배를 타고, 트럭을 타고, 한참을 걸어서 그야말로 오지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니 온몸 구석구석이 쑤셨습니다. 그런 고생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희망나무와 함께 베트남에 다녀오고 나서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긴급구호를 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했다.
2012년 8월, 필리핀 마닐라를 삼켜 버린 수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 무렵 전씨는 광주시의사회 부회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자주 해외의료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회장을 맡으면서 열 차례 해외의료봉사를 다녀왔다. 이 가운데서 가장 긴박했고, 사람이나 물자도 많이 들어갔던 것은 2015년 4월 25일에 발생한 네팔 대지진 때다. 이 지진으로 구천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곁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무너진 건물 잔해에 묻혀 있는 산모를 발견했는데 그 험악한 상황에서도 산모는 아이를 낳기 위해 산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긴급히 후송하여 제왕절개수술로 출산을 도와 산모와 아이를 구했습니다. 강한 지진을 꿋꿋이 이기고 태어났다고 해서 ‘강진'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지금쯤 아장아장 걸어 다니겠지요.”
전씨는 첫 의료봉사단으로 베트남에 다녀오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오지의 사람들에게 1회성의 진료가 아니라 항구적인 진료를 위해 그 지역에 진료소를 개설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지내는 선후배 의사들에게 그 뜻을 밝혔는데 하나같이 공감을 했다. 광주시에서도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광주시의 지원을 받고 부족한 것은 동참한 의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채웠다. 그렇게 해서 첫 결실을 얻은 것이 ‘캄보디아광주진료소’다.
광주시로부터 적잖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광주시가 제정한 특별한 조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주시는 ‘5·18정신의 아시아 보급’이라는 취지의 조례를 정한 바 있다.
“2015년 4월에 네팔 대지진 의료봉사를 다녀오면서도 현지에 진료소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모두가 동의를 했습니다. 캄보디아에 진료소를 연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네팔 진료소는 적은 돈으로 훨씬 더 쓸모 있는 진료소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016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해 2017년 2월에 문을 연 이 진료소의 이름은 ‘네팔광주진료소’다. 그리고 전성현씨가 이 진료소의 소장이다. ‘다무아’라는 곳에 개소된 이 진료소를 중심으로 9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구 9만에 병원이 하나인 셈이다.
네팔광주진료소는 건물 규모도 2층으로 100평이나 된다. 진료과목도 내과, 소아과, 치과, 안과, 한방과 등 다양하다. 또 병리실을 갖추고 있어 여러가지 검사도 하고 방사선과가 있어 엑스레이 촬영도 한다. 입원실도 있다. 상근 직원은 의사 1명, 간호사 1명, 병리사 1명, 방사선사 1명, 관리사 1명, 모두 5명이다.
그야말로 ‘다무아’에 최첨단병원이 생긴 것이다. 전성현 소장은 1년에 최소 네 차례는 이 병원을 찾아가 며칠간 머물면서 진료도 하고 직원들에 대한 보수교육도 한다.
“예순 살이 되면 의사를 은퇴하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 나이 예순이면 청년 중에서도 팔팔한 청년이다. 그런데 한창 일할 나이에 은퇴를 하겠다니 그 뜻이 궁금하다.
“사람의 수명이 길어져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만 저는 예순 살을 오르막길의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점에 오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애썼습니까? 이제 내리막길에서는 그동안 움켜쥔 것을 내 놓으며 사는 것이 정답일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다른 직종에 비해 사람의 죽음을 비교적 많이 봅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고, 선배님 앞에서 죄송합니다만 길게 사느냐, 짧아도 의미 있게 사느냐, 요즘 그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16일 현재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