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지도> 91. ‘모녀 삼대 쌀엿 공방’ 윤영자씨
<인물지도> 91. ‘모녀 삼대 쌀엿 공방’ 윤영자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3.3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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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은 수시로 변하는 여자의 마음 같아요”

 
창평 쌀엿은 언제 때부터 비롯되었을까?

조선시대 3대 임금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 때부터라는 말도 있고, 후에 인조 임금이 된 능양군 때부터라는 말도 있다.


양녕이 한 때 창평에 낙향한 적이 있는데 이때 동행했던 궁녀들이 쌀엿을 만들었는데 이로부터 일반인들에게도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창평현에 부임한 현감들은 궁중 대감들에게 이 창평 쌀엿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능양군과 관련한 또 하나 창평 쌀엿의 유래도 있다. 능양군이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월봉 고부천을 만나기 위해 창평을 찾아온다. 이 거사는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월봉은 능양군의 뜻에 동의하지만 함께 행동할 수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월봉이 광해군의 녹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서 후산마을의 오희도를 추천한다. 능양군은 발길을 고서 후산마을로 돌리면서 창평의 너른 들녘을 보면서 ‘쌀의 소출이 많으니 엿을 만들어 먹어도 좋겠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창평 쌀엿이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 유래가 어떠했든 창평 쌀엿은 이 지역의 특이한 산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현재에도 대규모 공장 말고도 가내 수공업으로 엿을 만들어 겨울 한철 쏠쏠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 집이 40여 호가 넘는다. 그렇다면 창평 쌀엿이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얻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맛 속에 생강이나 깨 같은 향이 들어 있고, 씹을 때 바삭바삭 부서지면서 입안에 붙지 않고 찌꺼기가 남지 않은 식감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는 것 같습니다.”


창평 유천리에서 ‘모녀 삼대 창평 쌀엿 공방’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가내 수공업으로 엿을 만들고 있는 최영례(46세)씨는 창평 쌀엿의 특징을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 최 씨는 모녀 삼대 가운데서 삼대 째가 된다. 친정어머니 밑에서 전통 방식의 엿 만들기를 배워 본격적으로 엿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올해로 17년이 된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녀 삼대 가운데 이대 째인 윤영자(78세)씨다. 윤씨 역시도 친정어머니 고인순(작고, 생존해 있다면 98세) 씨에게서 엿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삼대에 걸친 여인네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결국은 친정마을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일대인 고인순씨는 창평에서 태어나 전북 순창으로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징용으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이 되는 바람에 세 살 된 윤영자씨를 등에 업고 친정마을로 돌아와 눌러 살았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는 사진 한 장도 남겨놓지 않아 윤씨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이대인 윤영자씨는 월봉산 고개 너머 대덕 입석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이듬해에 남편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잠시 친정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뒤 남편이 제대한 다음에도 친정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시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예 친정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라서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저금을 나야 하는데 갈 데도 마땅한 곳이 없어서 친정동네로 이사 왔제. 되짚어 본께 여남은 살부터 친정엄니 밑에서 엿 맹그는 일을 도왔응께 칠십 년 가차이 엿을 만들었는 갑소.”


윤씨의 얼굴에는 시종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삼대 최영례씨는 친정마을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 같은 마을의 총각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남편 김성계씨와는 스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늘 가까이 지냈다. 4H활동을 같이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어 결혼에 이른 것이다.


엿을 만드는 절차는 이렇다. 쌀은 5~6시간 물에 불린 다음 깨끗이 씻어 1시간 동안 찜통에 찐다. 엿기름을 체에 3~4회 걸러 놓는다. 항아리에 끓여서 60℃로 식힌 물, 엿기름물, 쪄낸 밥을 함께 넣고 골고루 섞은 후에 뜨거운 방에 담요로 덮어 10시간 정도 발효시킨다. 재료가 다 발효되면 면포에 거른 후 꼭 짠다.

걸러진 국물은 센 불에서 1시간 30분 동안 넘치지 않도록 끓인 후 중불에서 4시간 정도 저으면서 끓인다. 이때 냉수에 떨어뜨려 굳어진 엿을 먹어 보아 이에 붙지 않고 바삭거리면 달이기를 끝마친다. 이것을 800g씩 나누어서 두 사람이 10분 정도 잡아 당겨 늘인다. 이를 초벌늘림이라고 하는데, 늘이는 과정에서 통깨와 곱게 다진 생강을 함께 섞는다. 이것을 잠시 묻어 둔다. 다시 말해서 숙성을 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물을 끓여 김이 나게 하여 그 위에서 두번늘림을 한다. 수증기를 쐬어야 결이 형성되고 엿이 하얗게 되면서 바삭거린다.


어언 백년 세월을 넘긴 모녀 삼대의 쌀엿의 단골들은 사백여 명이 넘는다. 엿을 만드는데 드는 쌀은 한해 40㎏짜리 200가마 정도가 된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데는 나름의 제조법이 있다.
“무엇보다 엿기름이 좋아야지라우. 그러고 엿물(식혜물)을 대릴 때 불도 잘 맞춰야 허고요.”


윤씨가 모녀 삼대 쌀엿의 제조법을 이렇게 말한다. 엿기름을 기르기 전에 겉보리에 서리를 맞게 한다. 그래야 당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엿물을 다릴 때는 장작불로 한다. 엿물의 상태를 보면서 불길의 세기와 약하기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스불로는 불길의 조절이 쉽지 않다. 엿물 다리기는 베테랑 윤씨의 몫이다. 엿물의 온도를 측정할 때 온도계가 필요 없다. 윤씨의 손바닥이 바로 온도계인 것이다. 


“저도 어느 정도 이력이 붙었지만 이 엿이라는 것이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릅니다. 땀이라고 해서 엿의 겉에 끈적거림이 생기면 그 엿은 실패했다고 봐야 합니다. 비가 오는 날은 공치는 날입니다. 비가 오는 날은 백발백중 땀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엿을 변덕이 심한 여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어느새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머니를 따라 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1988년 태풍 ‘올가’로 인해 비닐하우스가 날아가는 바람에 살길이 막막해진 김성계·최영례 부부는 윤영자씨로부터 엿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농사일 틈틈이 했는데 지금은 주업이 되었다. 김성계씨 부부는 대학에서 식품영양을 전공한 딸이 가업을 이어받아 ‘모녀 사대 쌀엿 공방’으로 발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앞으로 농업은 죽는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창고인 농업은 장기적으로 볼 때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쌀엿 공방을 체험장, 관광농업 등 6차산업으로 반드시 발전시키고 말 것입니다.”
김성계씨의 단호한 말 속에 희망이 예감된다. 지금은 비록 한적한 시골길 가에 위치하고, 간판마저도 보일락말락하는 ‘모녀 삼대 쌀엿 공방’도 머지않아 더욱 눈부시고 멋지게 변신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은 2017년 3월 28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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