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지도>98. 한국예총담양지회 송창근 초대회장
<인물지도>98. 한국예총담양지회 송창근 초대회장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6.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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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송덕봉 할머니의 14대 손입니다”

1962년 희곡작가 유치진 선생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가 출범한다. 그리고 55년이 흘러 담양 남면 지실마을에 거주하면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송창근(77)씨가 초대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국예총 담양지회가 만들어진다. 예총담양지회를 만들면서 후배들은 만장일치로 송씨를 초대회장으로 추대했다.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송창근 초대회장을 만나기 위해 담양문회회관 2층에 있는 예총 사무실을 찾았다.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서 후배들 격려해 주고 훈수해 주고 그래야 하는데 이렇게 앞장서서 뛰고 있습니다. 직책을 맡긴 맡았지만 잘못됐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송씨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그러고 보니 송씨는 단체의 장과는 인연이 많은 것 같다. 문순태 소설가가 운영했던 생오지 창작대학 학생회장을 맡았고, 졸업 후에는 그곳에서 함께공부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수필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다. 담양예술인협회 회장도 지냈다. 그리고 이제는 담양예총지회장이다. 감투 복이 많아서일까?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송창근씨는 천성이 모질지 못해 주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송씨는 60여년 동안 사진기와 함께 살아온 베테랑 사진작가다.


“1954년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친척이 귀국하면서 카메라를 갖고 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954년이면 6·25전쟁이 막 휴전이 되던 때 아닙니까? 일본에서 온 친척은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져보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직접 셔터를 눌러보고 싶었습니다. 친척이 야속했고, 속으로는 나중에 돈이 생기면 반드시 카메라를 하나 갖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1959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게 된 송씨는 돈을 모아 제일 먼저 카메라를 샀다. 석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송씨는 그 카메라를 자신의 재산목록 1호라고 말한다. 1998년 회사에서 퇴직할 때까지 그는 회사의 전담 사진사 역할을 했다. 집안의 대소사 행사 사진도 도맡아 찍었다.


“퇴직을 하고 나서 여생을 의미있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동안 그림도 그려보고 붓글씨도 써보았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에 한국야생화연구회에 입회를 했습니다.”


한국야생화연구회 입회는 송씨가 본격적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전환점이 된다. 집에서 직접 야생화를 길렀다. 무등산, 설악산, 한라산 등 전국의 이름난 산을 찾아 그곳에 자생하고 있는 야생화를 촬영했다. 백두산도 네 차례나 올라갔다. 2006년, 야생화를 찾아다니기 시작한지 6년 만에 첫 전시회를 갖고, ‘백두산과 남녘들꽃’이라는 사진집을 내게 된다. 송씨는 백두산 촬영의 소회를 이렇게 술회한다.


“장백폭포 소천지 주변을 맴돌면서 일주일이 지나고 동행자들은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홀로 남은 그날 저녁 적적함과 초조, 그리고 내일의 촬영에 대한 기대로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5시가 조금 지나 백두산 천지에 오르니 그 광활한 천지에 나 혼자뿐이었고 아름다운 천지가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백두산과 남녘들꽃’ 전시회는 관람객이 줄을 이었다. 관람객의 발걸음이 이어지자 갤러리 측에서 1주일 더 무료대관을 해주었다. 그리고 전시장을 찾아온 당시 전남예총 하철경 회장(현재 한국예총 회장)은 송씨를 전남미전 심사위원으로 위촉한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첫 전시회와 첫 사진집을 내고 난 송씨는 앵글 속에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정겨운 풍경을 담게 된다. 2009년, 송씨는 두 번째 사진집 ‘가사문학권 죽향’을 세상에 내놓는다.


“무등산에서 흐르는 물은 원효계곡을 따라 풍암정으로 들고 동편에 흐르는 물은 독수정을 지나 소쇄원 앞에 이르니, 이곳 지실에서 합수하여 환벽당, 식영정을 가르며 창계천으로 흐른다. 지금은 광주호가 가로막아 담수되어 영산강으로 흐르면서 옛 모습은 잃었지만 식영정 20영(詠), 소쇄원 48영의 운율에 젖어보면 그 시절의 풍광과 창창하고 아름다움이 보이는 듯하다.”<사진집에 쓰여 있는 작가의 말 중에서>


송씨의 세 번째 사진집은 ‘사진으로 보는 소쇄원 48영’이다. 소쇄원의 주인은 양산보(梁山甫)다. 그리고 양산보의 스승은 조광조(趙光祖)다. 조광조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하여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물거품이 된다.


소쇄원 48영은 이곳을 자주 찾았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쓴 한시다. 송씨는 이 한시를 사진으로 재현했다.


송씨와 만나 한참을 이야기하고, 그가 내놓은 세 권의 사진집을 살펴보다가 문득 그 사진 속에 문학의 정취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사진 찍기를 하면서 이미 문학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나마 문학에 대한 갈망을 해왔습니다. 어쩌면 송덕봉 할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송씨는 송덕봉(宋德峰)의 14대 손으로 현재 ‘홍주송씨대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송덕봉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이다. 미암의 기록을 보면 덕봉의 시문(詩文)은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지녔으며, 그녀의 성품은 명민하였으며 서사(書史)에도 두루 능하였다고 되어 있다.


송씨는 결국 문학의 길에도 당당히 들어섰다. 최근 내로라하는 문예지의 추천을 받아 수필가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장수촌 할머니’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촬영을 다니다가 어느 시골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이야깁니다. 남편은 일찍 죽고, 슬하에는 자식 하나도 없는 아주 외로운 할머니입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할머니는 미처 합방도 못했는데 남편은 일제의 징용에 끌려갔답니다.

그리고 3년만에 중병이 들어 돌아왔답니다.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지만 남편은 일 년을 채 못 넘기고 죽어 버렸지요. 그러다 보니 자식도 볼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 할머니 방 앞닫이 위에는 보자기에 싸인 이불보퉁이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첫날밤 신랑과 함께 덮으려고 가져온 이불입니다. 그걸 풀어보지도 못하고 할머니는 아흔 살이 되어 버렸습니다.”


송씨는 그 이야기를 수필로 썼다. 이 수필이 늦깎기 문인의 데뷔작인 된 것이다.


“송창근씨는 젊게 산다.”


송씨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다. 젊게 산다는 것은 이것저것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산다는 말과 같다. 젊게 산다는 것은 바쁘게 움직이며 산다는 말과 같다.


송씨는 최근 색소폰도 배웠다. 어느새 울고 넘는 박달재 한 곡조는 감칠맛 나게 연주하는 실력이 되었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 했다. 바쁘게 사는 송 씨의 마음은 늘 청춘일 것이다.


*이 글은 2017년 6월 7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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