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지도>99. 70년대 초 봉산재건학교의 교감이었던 김평택씨
<인물지도>99. 70년대 초 봉산재건학교의 교감이었던 김평택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6.19 13: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젊음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 심훈의 장편소설 ‘상록수’는 브나로드 운동이 전개되었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쓰인 작품으로 일제강점기에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이광수의 ‘흙’과 쌍벽을 이룬다.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농촌에도 심훈의 상록수의 남자주인공 ‘동혁’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여 만든 것 중에 하나가 이른바 ‘재건학교’다. 이 재건학교를 이야기하자면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재건국민운동이란 5·16 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가 국민복지를 이룩하고 국민의 도의·재건의식을 높인다는 이름 아래 벌였던 범국민운동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쿠데타의 목적이 새로운 사회건설에 있었던 것처럼 합리화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끌어 모으기 위한 정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산하기관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설치되고, 본부장에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 박사가 임명되었으며, 이밖에도 주요 민간단체 임원·저명언론인·출판인·교육자·연예인·종교인들을 이 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앉게 했다.


물론 담양읍, 용면, 봉산면 등지에 설립되었던 재건학교가 5·16 군사쿠데타의 하수인은 아니었고, 또한 지시를 받아 운영되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그들은 이면의 목적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어려운 지경에 놓인 청소년을 가르쳐 보겠다는 순수한 열정 하나뿐이었다.


“당시 재건학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던 사람들은 나름으로 올곧고 당당한 신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알이 썩어 많은 알곡을 맺게 하는 밀알의 정신이었고, 상록수와 같은 자세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학생들 역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 일을 해서 당장 형편이 나아지고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사와 학생이 일심동체가 되어 단 1초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70년대 초 전국적으로 이른바 야학(夜學)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김평택(74)씨는 봉산재건학교 교감 겸 국어 교사로 이 일에 참여한다.


봉산재건학교(중학과정)는 1971년 4월 10일 개교식 겸 첫 입학식을 가졌다. 입학생은 32명으로 남학생 14명이고 여학생 18명이었다. 교육과정은 일반 중학교 과정과 같았고 교육기간은 2년으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지리, 가정, 음악을 공부했다.


개교 당시의 교직원 현황은 다음과 같다. ▲교장 : 신현석 ▲교감 : 김평택(국어), 봉산면사무소 근무(와우리) ▲교무 : 진윤식(실업), 담양군양곡가공협회 상무(신학리) ▲교사 : 남재신(사회), 봉산면사무소 근무(신성리) ▲교사 : 정금연(수학), 담양군 새마을과 근무(담양읍) ▲교사 : 정연모(영어, 지리), 담양군 내무과 근무(양지리) ▲교사 : 노준한(주산), 담양주산학원 원장(담양읍) ▲교사 : 김귀순(가정), 신학리 학동마을


“요즘은 국민들의 평균학력이 아주 높아져 주변에서 대학 안 나온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70년대 초쯤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가르쳐보겠다는 취지로 개교한 것이 재건학교였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자’였습니다.

낮에는 가사를 돕거나 직장에서 잔심부름 같은 것을 하다가 밤이 되면 학교에 왔습니다. 교직원들 역시 낮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 퇴근하면 곧바로 재건학교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죠. 학생들도 열심이었고 교직원 역시 열정이 불타올랐습니다. 교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2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 젊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김평택씨의 올해 나이는 일흔네 살이다.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세월 저쪽이니까 김평택씨의 그때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젊은 나이였으므로 체력적으로도 자신이 있었다. 이때 김씨는 담양읍재건학교에서 국어 가르치는 일도 같이 했다. 승용차가 없던 시절이었고 오토바이도 대중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시절이었다. 이동수단은 자전거였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식솔들을 거느려야 하는 걱정도 없을 때였다.
 

“봉산초등학교의 교실 한 칸을 빌려 공부했고, 학교 운영에 따른 경비는 교직원들이 매월 내는 회비로 충당했습니다. 봄가을이면 소풍을 갔는데 이날이면 여기저기서 찬조물품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창평면 뒷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당시 신현석 교장선생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음료수 상자를 어깨에 메고 올라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학생들 역시 정이 많았습니다.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먹거리들을 보자기에 싸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값으로 치면 얼마 안 되는 것들이지만 선생님 가져다주겠다는 푸근하고 따뜻한 정이 담겨 있는 것들이죠.”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떤 감회가 떠오를까? 김씨에게 재건학교에 얽힌 추억담을 듣고 싶다고 했다. 특별하게 기억되는 일은 없고 그 시절에는 늘 마음이 아팠단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학교에 오는 학생들이 여럿이었다. 요즘은 흔해 빠진 게 우산이지만 그 시절에는 귀한 물건이었다.

김씨는 학생들에게 우산을 주고 자기는 자전거로 빗속의 밤길을 달리기도 했다. 날씨가 더워지면 더워지는 대로, 추워지면 추워지는 대로 재건학교의 학생들을 보면서 괜히 우울해졌다고 김평택씨는 지난날을 회고한다.


1973년 4월 14일, 봉산재건학교 졸업생 4명이 고서면에 소재하는 전방군제주식회사(당시는 한일섬유)에 사원으로 취업을 했다. 신입사원의 자격 요건 중 하나가 중학교 이상 졸업자였다.


“더 많이 취업시킬 수 있었지만 희망자가 네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재건학교 학생들은 법적으로 따지면 중졸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당하게 학교장의 직인을 찍어 졸업증명서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물론 한일섬유에서도 그냥 눈감아준 것이었겠죠.”


그런데 봉산재건학교는 개교 2년 만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나서 문을 닫게 된다.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이 없었던 것이다.


“50년이 다 되는 일이라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다시 추억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네요.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그때 우리가 잘못한 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오로지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했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때의 실수를 교훈 삼아 멋지게 잘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16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이 취재는 징역신물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9번지
  • 대표전화 : 061-381-1580
  • 기사제보 : 061-382-4321
  • 인쇄물,기념품,광고문의 : 061-381-3883
  • 팩스 : 061-383-211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근
  • 법인명 : 담양군민신문
  • 제호 : 담양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232호
  • 등록일 : 2006-9-14
  • 발행일 : 2006-9-14
  • 발행인/편집인 : 최광원
  • 담양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담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dy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