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100. 6·25 참전유공자 김정인씨
<담양인물지도>100. 6·25 참전유공자 김정인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6.2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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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참 정갈허게 살았구나, 그런 소리를 들어야제”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희(稀)’는 ‘드물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짧아 70세까지 산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70세를 고희라고 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의학의 발달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많이 늘어나 나이 70은 청춘이라고 한다. 대중가요 가수 이애란의 노래 ‘백 세 인생’의 가사 가운데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고 전해라’라는 대목이 있다. 참으로 당당한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올해 아흔 살이 된 용면의 김정인(90) 씨를 만났다. 김씨는 한때 용면농협조합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으로 자꾸자꾸 탄복했다. 70년 저쪽의 일들을 어제 일처럼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한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도 놀랍다.


“열서너 살 됐을 때였을 거여. 하도 배가 고파 면장을 찾아가 일본에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어. 나이가 어려서 안 된다고 허등만. 그러고 나서 몇 년 있다가 해방이 됐어. 내 나이 열여덟이었제. 이제 배부르게 먹고 사는 세상이 왔는가 했는디 해방되던 해 겨울에 어찌나 추웠던지 보리가 다 얼어 죽었어. 그 바람에 해방되던 이듬해 봄은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먹듯 했어. 삼베옷감을 갖고 정읍, 부안 같은 데로 다니면서 감자하고 물물교환을 해서 먹고 살았제. 거기다가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이고 좌익이다 우익이다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제.”


김정인씨는 스물두살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스물셋에 의경에 자원입대하여 우익의 편에 서서 전투에 참가한다. 의경에 입대하면 삼시세끼 밥걱정은 해결될 같아 자원입대를 했던 것이다. 이때 가마골, 용사, 광양 백운산, 화순 백아산을 누비며 빨치산과 대항하여 전투를 했다. 그런 와중에 1950년 6월 25일 6·25가 터졌다.


“6·25가 터지니까 정식으로 징집영장이 나왔제. 그동안 후방에서 경찰을 도와 전투를 하고 다녔는디 전방 어디론가 진짜 전쟁을 하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어.”
그런데 김씨는 독자(獨子)였으므로 징집이 면제되었다. 연거푸 세 차례나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모두다 면제였다.


“나는 외아들이라서 병역법 제68조 의가사에 해당되었던 거여. 그런데 날로 전쟁이 심해지니까 당시 백두산 호랭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 아무개 경찰국장이 의가사고 뭣이고 모두 군대에 가라고 명령을 내리니까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입대를 해서 순천으로 갔제. 어떤 학교 운동장에 장정들을 모아놓고 신체검사를 하는데 거기서 김동호 군의관을 만난 거여.”


여기서 ‘김동호씨’는 한때 담양에서 병원을 운영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 담양의 야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몇 차례 출마했다가 낙선한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된다. 그런데 이듬해 5·16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이 되어 천신만고 끝에 얻은 국회원직을 채 일 년도 안 되어 그만 두게 된다.


“내가 힘없이 있으니까 김동호 군의관이 어디가 아프냐고 묻드만. 그래서 귀가 좀 안 좋다고 하니까 정밀검사를 하더니 고막이 파열되었으니까 귀가를 하라고 하등만. 같은 고향이라고 봐 줬는지도 모를 일이제. 그때 밀고 당기고 전쟁이 아주 심한 때라 군대에 간 사람이 많이 죽었거든.”


김정인씨는 이번에도 병역 면제를 받았다. 의가사로 세 차례, 질병으로 한 차례 면제를 받았는데 스물일곱 살에 또 다시 징집영장이 나왔다. 이번에는 신체검사도 없이 곧장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한 달간 훈련을 마치면 전쟁터에 배치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훈련이 시작된 지 열흘 쯤 되었을 때 휴전이 되었다.


“한 달 훈련을 마친 뒤 연천으로 배속되었는데 나이가 많아 부대원들이 영감으로 불렀제. 그때는 제대라는 말이 없었어. 군대에서 집으로 보내주면 그때가 제대 날짜였던 것이제. 휴전이 되었지만 언제 다시 전투가 개시 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40개월을 복무했어. 그리고 제대를 하고 나니 나이는 서른살이 되었제. 제대하고 집에 돌아오니 벌어먹고 살 길이 막막해. 집사람도 같이 굶어가며 고생을 무지하게 많이 했어.”


그 아내와는 십여년 전에 사별을 했다. 그때 김씨의 나이 일흔아홉 살이었고, 아내는 일흔다섯살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40년 넘게 아내를 뒤에 태우고 다녔던 오토바이도 타고 싶지 않더라고. 그래서 자동차 운전을 해보자고 생각을 했제.”


김씨는 여든 살이 되던 해 운전교습소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그 해에 면허증을 땄다. 필기시험은 68점을 맞아 1차에 합격했고, 실기시험도 1차에 통과했다.


“내가 끌고 다니는 자동차는 내 벗이기도 하고, 내 집사람이기도 해. 혼자서 차를 몰고 이곳저곳 다니면 적적한 생각도 덜해지고 집사람하고 함께 다니는 것 같아 재미지기도 해. 그리고 나 10년 무사고야.”


김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차를 몰고 담양노인복지관에 나온다. 아침밥을 먹고 샤워를 한 다음 차를 몰고 집을 출발해 노인복지관에 도착하면 9시 이전이다. 9시부터 다섯가지의 물리치료를 받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오전 11시30분. 점심은 복지관 구내식당에서 해결한다. 2천원짜리 밥이지만 먹을 만하단다. 그 다음에는 차를 몰고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저녁밥상을 물리자 말자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아홉시 뉴스 보기가 어렵단다. 김씨는 자신의 건강은 규칙적인 생활에서 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김씨는 밥도 직접 해먹고, 빨래도 직접 한다.


“좋은 세상이여. 밥도 전기가 해 주고, 빨래도 전기가 해 주니께. 반찬은 광주에 사는 큰딸이 가끔 해다 주니까 걱정이 없고. 혼자 사니까 시간이 많아. 시간이 많으니까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할 수 있어 좋아.”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김씨의 꽃밭은 잡초 하나가 없이 정갈하다. 입식 부엌의 싱크대 위의 냄비나 그릇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실내 화장실의 욕조도 깔끔하고 샤워 용품들도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이 아흔이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제. 누가 와서 보더라도 그 사람 참 정갈허게 살았구나, 그런 소리를 들어야제.”


이야기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청했다.


“우리 집에 와서 커피 달라고 허는 사람은 참말로 고마워. 그만큼 사람 보기가 귀허다 이 말이제. 자식들도 다 지들 생활이 있는디 부모라고 매일 찾아와 볼 수 없는 것 아니겄어. 자식들 신경 안 쓰게 허는 것이 부모 노릇이고, 부모님 신경 안 쓰게 허는 것이 효도 아니겄어.”
*이 글은 2017년 6월 27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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