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마을은 다랑이 논 오지에 피땀과 눈물로 만든 마을입니다. 우리나라의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을 일으킬 수 있게 헌신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대 잊지 말고 기리자는 뜻에서 독일마을을 시작했습니다.”
독일마을 운영대표로 있는 정동양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독일마을의 창시자이자 산증인이다.
독일마을 중앙 언덕에 들어선 웅장한 펜션 ‘베를린성’의 주인이기도 한 그는 24세때 베를린 건설전문고등학교에 입학, 건설전문대, 건설전문 공대에서 토목학을 전공했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무료로 대학을 다닐 수 있고 일자리가 많았지만, 독일 현지인들이 살려고 하지 않아 외국인들이 대신 들어가 도시를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말이 원활하게 통하지 않다보니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현지인들이 하려들지 않은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파독 간호사와 결혼한 정동양 독일마을 대표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애로를 속속들이 파악하게 됐고 그들의 가장 큰 꿈이 고국으로 돌아와 사는 것임을 알게 됐다.
정동양 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정부에 세금을 내고 있고, 이 세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며 “숱한 어려움 이겨내며 벌어들인 돈을 고국에 송금해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은 그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보답하고자 독일마을을 생각하게 됐다”고 들려줬다.
정 대표의 구상은 김두관 당시 남해군수를 만나면서 실행에 옮겨졌다.
당시 김두관 군수는 하수처리장 신축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정 대표의 자연처리 공법을 채택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 독일마을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5년째 상수도가 연결되지 않는 등 선진국 독일에 비해 많은 것이 부족한 고국생활로 일부 교포들이 애써 지은 집을 팔고 마을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내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염소를 넣지 않는 식수를 마시고 맑은 물과 좋은 환경을 복원해 생활하는 자연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원대한 목표는 고리타분한 법규에 발목이 잡혀 십 수년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독일마을을 찾아온 돈 많은 외지인들이 ‘독일마을 별 거 아니네’라며 무시하는 것이 싫어서 베를린성을 지었는데 독일마을 전체가 단독주택 용지로 묶여 있어서 민박 외에 다른 행위는 할 수가 없다.
정 대표를 비롯한 주민들이 규제를 풀어달라고 수차례 요청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청원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정 대표는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는 만큼 발전하고, 반대로 막는 만큼 퇴보한다”며 “개인은 어떻게 하면 손님을 많이 받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것인가를 고민하고 행정은 뭘 해주면 도움이 될 것인가를 묻는 풍토가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