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105.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 이영씨
<담양인물지도>105.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 이영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8.3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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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낳아 준 담양에 어떻게 보답하나?”

 

 

국립국악원 정악단(正樂團) 단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국악원 지도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58)씨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피리 연주자다. 뿐만 아니라 이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이수자이며 중요무형문화제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이기도 하다.


이씨가 태어난 곳은 담양 용면 통시암(통천리)이다. 통시암에는 한때 ‘이문환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이문환씨는 근동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유성기(留聲機)를 돌려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들었고, 발동기를 돌려 전기를 사용했다. 이문환씨가 바로 피리 명인 이영씨의 아버지다. 이영씨는 이렇듯 넉넉한 가정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지는 한량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생활 때문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넓은 집을 팔고 오두막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서울로 왔지만 아버지의 병환 등으로 인해 곧바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년동안 신문배달도 하고, 아이스께끼도 팔고, 구두닦이도 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일 년을 보낸 다음 학교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6학년을 마쳤는데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공부를 꽤 하는 편이었습니다. 의사나 검판사가 되겠다는 꿈도 가져봤지만 현실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이씨는 일년동안 공장살이를 하고 나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또 돈이 문제였다. 입학하고 나서 납부금을 한 번도 내지 못했다. 제적을 당할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렵사리 위기를 넘길 방법이 생겼다. 학교 구내 이발소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쉴 시간이나 점심시간, 그리고 방과 후에 이발소에서 잔심부름을 했다. 중학시절 3년 내내 그 일을 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었는데 또 고등학교 진학 문제가 걱정되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미에 있는 금오공고에 진학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체력이 문제가 되어 불합격이 되어 전액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이번에는 국립국악고등학교를 권했습니다. 국악고등학교도 전액장학금으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국악을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선생님의 말씀에 전혀 거부감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접해왔던 친숙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어쩌면 유년시절 용면 통시암에서의 삶이 은연중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때 저는 할아버지로부터 임방울 이야기를 들었고, 유성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음악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국립국악고등학교는 1959년에 설립되었다. 이씨는 1977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다.
국악고등학교 신입생이 되어 오리엔테이션을 갖게 되었다. 이 시간에는 전공도 선택하게 된다. 이씨는 대금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연주자의 자세가 정말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씨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대금 연주자로서 신체적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 길이와 손가락이 짧아 대금 대신 피리를 선택했다.


“사람 사는 것은 고비 고비가 세옹지마이고 전화위복인 것 같습니다. 악기를 오래 다루다 보면 직업병이라는 게 생기가 됩니다. 대금이나 가야금, 그리고 아쟁 같은 것은 연주할 때 자세를 비틀게 되는데 그게 오래 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피리는 국선도 수련할 때처럼 정좌를 하고 호흡도 복식호흡을 하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몸이 건강해집니다.

대금을 하고 싶었지만 피리를 불게 되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저에게 큰 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이게 세옹지마 아니겠습니까?”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이씨의 예비고사 점수는 국악고등학교 개교 이래 최고점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문화방송국으로부터 입학금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대학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다. 입대해서는 육군본부군악대 국악대 소속으로 열심히 피리를 불었다. 제대 말년에는 국악의 악보를 채록하여 정리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폐결핵을 앓은 탓으로 신검에서 번번이 병종을 받아 입대할 수 없었는데 재청을 하고 원해서 군대에 갔습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체력이 강화되었고, 인격이 무시되는 얼차려를 받을 때는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인내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제대 후 복학해서는 박범훈 류 피리산조를 수학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가진 정기연주회 때는 ‘염양춘(艶陽春)’이라는 제목의 피리 독주를 했다. 염양춘은 따뜻한 봄볕이 무르녹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씨의 피리 연주를 듣고 어느 국악인이 정재국씨에게서 더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정재국씨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다. 국악 두 갈래는 산조(散調)와 정악(正樂)이다. 산조는 서민의 정취가 담긴 민속음악이고, 정악은 선비의 정취가 담긴 궁중음악이다. 이씨는 박범훈에게서 산조를, 정재국에서 정악을 수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1987년 국립국악원 단원이 되었다.


“1987년은 국립국악원의 서초동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는 해입니다. 그동안 국립국악원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1987년에 서초동에 건물을 지어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은 제 개인적으로 볼 때 피리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원년이기도 합니다.”


이씨는 국립국악원 단원이 된 이후 해외 연주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동안 27개국 50여 도시에서 연주를 했다. 이씨는 이제 국립국악원 단원으로서 정년을 앞두고 있다.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바른 마음으로 피리를 연주하는 후진을 양성하는 것 하나뿐이다.


“나에게 피리를 배워 연주 활동을 하는 후진들은 곧바로 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충해서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독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악계, 그중에서 피리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많고도 많다. 그런데 세간에서 이영의 가족들은 뭔가 남다르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씨는 그에게 배우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 가족 가운데는 진짜 피붙이도 있다. 이씨의 둘째아들은 대학에서 피리를 전공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살아왔던 것처럼 현재는 육군본부군악대 국악대에 복무하고 있다.


“저는 예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풍부한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에 가서 좋은 스승을 만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낳아 준 담양에 어떻게 보답하나? 이것이 제 인생의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2017년 8월 29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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