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107. 봉산축구협회 초대회장 진활연씨
<담양인물지도>107. 봉산축구협회 초대회장 진활연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09.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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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 마을대항 축구대회는 봉산면민 불굴의 정신입니다”

 

해마다 8·15광복절이 되면 봉산면에서는 마을대항 축구대회가 열린다. 그 대회는 올해로 40회를 맞았다. 담양군 12개 읍면 여러 곳에서도 추석 무렵이면 마을대항 축구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그런데 대회의 규모나 주민들의 참여도 면에서 볼때 봉산면축구대회가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빛나는 명맥을 이어오기까지는 신항리에 거주하고 있는 진활연(84)씨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봉산축구협회 초대회장을 지낸 진씨를 만나기 위해 봉산면복지회관을 찾았다. 예사 시골노인의 느낌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진씨에게서는 뭔가 강한 힘이 느껴졌다. 젊은 시절 한가락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진활연씨의 기세는 정말 당당했습니다. 그때 우승팀한테 송아지를 주었는데 다른 마을에서 우승을 하면 진활연씨와 신항리 사람들의 위세 때문에 우승기를 마음대로 갖고 가지도 못했습니다.”


복지관에 동석하고 있던 한 주민이 말을 거든다.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진활연씨는 열두살의 소년이었다. 열두살의 이 소년은 공차기를 좋아했다. 이때까지 이 시골 소년은 실물로 축구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축구를 좋아했다.


“짚으로 새끼를 꼬아 둥글게 만든 것이 축구공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축구공은 돼지 오줌보였습니다. 누구네 집에서 돼지라도 잡는 날이면 기어코 오줌보를 얻어내 바람을 넣어 찼습니다. 그리고 고무신도 흔하지 않은 때라서 짚신을 신고 공을 찼습니다.”


필자에게도 돼지 오줌보를 가지고 축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을 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땅바닥에 문질러 겉에 붙어 있는 기름을 제거해야 한다. 표면의 기름을 제거하지 않으면 팽창이 되지 않으므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없다. 이 공은 가시에 찔려도 구멍이 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축구공이었다.


해방이 되고, 얼마 안 있어 6·25전쟁이 나고 다시 휴전이 된다. 그러면서 진씨는 스무살이 된다. 전쟁 동안 잠시 주춤했던 봉산면 축구 열기도 다시 일기 시작한다. 독수리, 비둘기, 사자, 호랑이라는 축구팀도 결성된다. 이 축구팀들은 봄가을이면 정기적으로 대회를 갖고 자웅을 겨뤘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봉산 축구대회는 1977년에 이르러 획기적인 도약을 한다. 이 해에 정식으로 ‘봉산축구협회’가 출범한 것이다. 이 협회의 초대회장이 바로 진활연씨다.


“제 나이 마흔네 살 때였습니다. 당시 봉산면의 마을이 스물일곱 개였는데 모든 마을에서 출전을 했습니다. 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은 모든 마을이 텅텅 빌 정도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면민이 참여하는 축제였습니다. 폭우가 쏟아져도 대회를 강행했는데 그런 날은 선수들이 흙탕물을 뒤집어 쓴 미꾸라지가 되어 경기를 했습니다. 대회가 열리면 열기가 과열돼 싸움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마을대항 축구대회가 올해로 40회가 되었는데 정확히 따지자면 해방직후부터 시작했으니까 60회가 넘습니다. 봉산의 축구역사도 재정립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씨의 포지션은 센터포드였다. 축구를 좋아한 만큼 실력은 어땠을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박지성이나 손흥민 이상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인물 좋고, 체격 좋고, 실력 있고, 축구대회가 열릴 때 진활연씨는 봉산면 최고 스타였습니다. 코너킥을 하면 100% 성공을 했습니다. 공만 잘 찬 것이 아니라 봉산면축구협회를 위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협회 일이 일번이고 집안일이 이번이었습니다. 협회 기금을 마련하려고 서울이고 어디고 찾아다녔습니다. 협회 일만 아니라 지역의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해 내는 해결사였습니다.”


진씨에 대한 찬사는 끝이 없다.


진씨가 축구협회 회장을 맡고 나서는 우승팀에게 부상으로 송아지를 주었다. 이 송아지는 당시 수북면에서 성암농장을 운영하던 ‘홍박사’가 후원을 했다. 당시 홍박사는 봉산면에서 대단위로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었다. 젖소 사료용 옥수수였다. 그런 연유로 송아지를 희사해 주었던 것이다.


“찾아가 협조를 구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십시일반으로 지역을 위해 찬조를 해 주었는데 모두들 젊었을때 같이 축구했던 선후배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운동을 같이 하다 보면 의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 의리를 앞세워 동분서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해결해 달라는 주위의 요청도 있었지만 그냥 신이 나서 그러고 다녔습니다.”


진씨는 봉산면사무소와 지서 건물을 건축할 때 앞장을 섰다. 1982년 건축된 현재의 면사무소는 본래는 예산이 부족해 단층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면장, 조합장 등과 함께 2층 증축을 위해 모금에 나섰다. 서울, 부산, 광주 등에 살고 있는 출향인사를 찾아다니며 모금을 했다. 물론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을 대상으로 모금을 했다. 성과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모아진 건축자금이 오천만원을 넘었습니다. 요즘 화폐가치로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면사무소를 2층으로 완공하고 나니까 또 해결해야 할 현안문제가 생겼습니다. 지서를 신축해야겠는데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모금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자꾸 손 벌리는 것이 미안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술밥 사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역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안면 깔고 앞장을 섰습니다.”


부지를 희사 받고, 건축비를 모금해 지서 건물을 완공했다.


요즘 진씨는 건강이 안 좋아 가끔씩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복지회관에 나와 바둑도 두고, 담소도 하면서 소일을 한다. 복지회관에는 하루 평균 십여명이 나와 점심식사를 같이한다. 모두들 왕년에 축구경기장을 누비던 선수들이다. 그래서인지 저마다 축구와 관련한 추억담을 이야기하면서 인터뷰 도중에 끼어들기를 한다. 그런데 올해 40회 마을대항 축구대회에 진씨는 참여하지 못했다.


“아직도 마음 같아서는 운동장을 누비면 드리볼을 하고 슈팅을 할 것 같은데 거기까지 걸어갈 힘도 없고 그래서 못 갔습니다. 성황을 이루기를 마음으로 기원했습니다. 지역에 젊은 사람이 많이 줄어들어서 열기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어받아야 하지요. 봉산 마을대항 축구대회는 봉산의 자랑이고 봉산면민 불굴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봉산은 운동선수들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한때 프로농구 삼성의 감독 안준호, 배구 국가대표 강동진, 축구 국가대표 안병태, 축구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체육교사 권혁종 등이 봉산 사람들이다.

*이 글은 2017년 9월 15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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