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111. ‘강순임슬로푸드’ 강순임 대표
<담양인물지도>111. ‘강순임슬로푸드’ 강순임 대표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11.0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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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으로 시집 와서 출세하고 성공했습니다”

 

2017년 10월 27일과 28일 이틀간에 걸쳐 창평 슬로시티 삼지내마을에서는 ‘쌀엿 잘 만드는 집’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담양 최초로 만들어진 ‘극단 백진’의 창단기념공연이기도 했다.

 이 뜻 깊은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동참해 주었다. 창평의 김성계, 이영미, 강순임씨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창평 유천리에 사는 강순임(53)씨의 도움은 각별했다.


맹렬(猛烈)이라는 말이 있다. 기세가 몹시 세차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로 여성을 지칭할 때 쓰이고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도전한다든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에도 앞장서서 뛰는 사람을 ‘맹렬여성’이라고 한다. 창평 유천리에서 ‘강순임슬로푸드’라는 간판을 내걸고 쌀엿, 조청 등을 만들고 있는 맹렬여성 강순임씨를 만났다.


강씨는 순창 구림 회문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자라고 초등학교도 다녔다. 그리그 스물세살에 창평 유천리 ‘창평 고씨’ 집으로 시집을 왔다. 남편의 누이동생이 소개를 하고 만나 정이 싹터 결혼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시누이가 중신애비 노릇을 했던 것이다. 당시 강씨와 시누이는 순창과 담양에서 각각 4H부녀회 부회장을 맡아 열심히 농촌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마를 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농촌활동의 동지가 올케와 시누이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이 결혼을 반대했다. 뼈대 있는 창평 고씨도 좋고, 농사도 많이 짓는 집도 좋지만 농촌총각이라는 점이 싫다고 했다. 연탄배달 리어커를 끌어도 좋으니까 도시총각을 만나라고 했다. 이렇듯 친정어머니가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순창 구림 처녀와 담양 창평 총각의 백년가약은 맺어졌다. 결혼하고 나서 신혼 초에 강씨는 친정 쪽 이야기를 숨기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다.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친정마을은 오지 중에서도 오지입니다. 남편 친구들이 산토끼하고 입 맞추며 살다가 창평으로 시집 왔으니 출세했다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출세한 건 맞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자가 되고 못 되고를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삶이 즐거우면 성공했다고 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즐겁고, 즐거우면 성공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그래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강씨가 몇 군데 책자에 기고한 글을 보여준다. 한 책자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그 한 부분을 옮겨본다.


<어머니! 어머니는 가난과 아버지의 병환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도 한 번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가난이 싫었고 솔직히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또래의 친구들이 중학생이 되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을 때, 그 비참함은 무엇에 비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좌절하고 우울해 있을 때, 어머니는 간직하고 있던 작은 금반지를 주시면서 ‘이것으로 네 인생을 개척하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강씨의 전 재산은 작은 금반지 하나였다. 강씨는 곧바로 서울로 향했고,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야간중학교,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다시 순창 구림 회문산 산자락마을로 되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


“사실 다시는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농촌을 떠올리면 지긋지긋한 가난이 먼저 떠오르니까요. 그런데 안가면 안될 정말 긴박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강씨의 오빠는 ‘농민후계자(현재의 농업경영인)’로서 정부자금도 지원받아 열심히 농사일을 하는 그야말로 땀 흘리는 농사꾼이었다. 그런데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 갑자기 농사일을 그만 두고 도시로 떠나버렸다. 이렇게 되자 지원금 상환 등의 문제를 나이 든 어머니가 해결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강씨는 도시의 삶에 대한 청사진을 접고 부랴부랴 고향마을로 내려왔다.
 

“정말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힘든 일을 시작해야 하나 암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은 꺼야 하니까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목이 잡혔다고 해야죠. 그렇게 해서 지금 현재 농촌여성 강순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화가 복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그때는 우울했지만 지금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씨는 창평으로 시집 와서 난생 처음으로 쌀엿을 만들어 보았다. 시어머니는 예전부터 엿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판매를 목적으로 대량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절 때면 이웃이나 친척들과 나눠먹기 위한 쌀엿이었고, 때로는 입덧치기(이바지)로 쓰기 위해 주문이 들어오는 쌀엿을 만들기도 했다.


“신혼 초 우리 마을에는 열여섯 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설날이면 모든 집에서 엿을 만들었습니다. 엿은 혼자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품앗이로 했는데, 무거운 쌀가마니를 옮기는 일이나 뒷설거지 같은 것은 제가 도맡아서 했습니다. 제가 가장 젊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엿 만들기가 올해로 30여년이 되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시어머니가 별세하고 이제 강씨 독자적으로 엿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창평 쌀엿의 대중화, 상품화를 고민했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시어머니 생전에는 시어머니가 쌀엿 만들기를 주도를 했고 강씨는 조력자였다. 그런데 주도를 하고 보니 시행착오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좋은 엿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엿기름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해 엿기름을 속아서 구입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두밥과 엿기름을 섞어 좋은 식혜를 만들어야 하는데 엿기름이 안 좋아 밥이 삭지를 않았습니다. 80㎏ 쌀을 통째로 버린 일이 열 번은 될 겁니다.

결국 소먹이로 쓰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남편은 그만 두고 소나 키우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도 따뜻하게 위로하고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요즘은 엿기름을 직접 길러 쓰고 있습니다. 내가 기르지 않은 엿기름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직접 기른 엿기름으로 만든 엿을 드리는 것은 고객에 대한 예의니까요.”


‘강순임슬로푸드’는 2010년에 문을 열었다. 그런 뒤 지역의 특용작물과 엿을 접목한 기능성 식품 오방엿을 내놓았다. 오방엿은 빨강(블루베리와 백년초열매), 노랑(울금), 초록(댓잎), 검정(검정쌀), 흰색(쌀) 등 다섯가지 색으로 만든 엿이다. 생강조청, 댓잎조청, 불루베리조청, 양파조청 등도 내놓았다.


문을 연 지 10년이 채 안되었지만 강순임슬로푸드는 전국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주말이면 전국 각처에서 엿만들기 체험을 하기 위해 강순임슬로푸드를 찾고 있다. 지역 관광활성화에도 한몫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은 2017년 11월 6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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