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112. 대한민국 황실공예 침선장 김금주씨
<담양인물지도>112. 대한민국 황실공예 침선장 김금주씨
  • 설재기 작가
  • 승인 2017.11.1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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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과 연(緣)을 맺었습니다”

 

옷감, 실, 자, 가위, 바늘과 바늘집, 골무, 인두, 다리미, 누비밀대, 실패와 실고리, 반짇고리 등은 바느질과 관련한 도구들이다. 이런 도구들이 우리의 곁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옷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기성복이 등장하자 상가마다 즐비하던 맞춤양복점과 양장점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황실공예 침선장(針線匠) 김금주(63)씨는 오늘도 바느질 도구와 함께 하며 맞춤옷을 만들고 있다.


전통사회구조 속에서 옷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족과 자신을 위해 직접 지어 입었다. 그러나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한 특수층의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옷을 만들지 않고 솜씨가 뛰어난 사람들에게 맡겨 입었다. 서민층이라 하더라도 평상복이 아닌 관혼상제 등에 필요한 특수복은 솜씨있는 사람에게 주문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안에 상의원(尙衣院)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놓고 왕실의 복식을 만들게 했다. 이 기구 안에는 기능에 따라 실을 만드는 제사장(制絲匠), 실이나 천에 물을 들이는 청염장(靑染匠)과 홍염장(紅染匠), 옷감을 짜는 직조장(織造匠)과 능라장(綾羅匠), 천을 다듬고 손질하는 도련장(?練匠), 옷감을 재단하는 재작장(裁作匠), 금박이나 자수 등 무늬를 놓는 금박장(金箔匠)과 자수장(刺繡匠), 그리고 침선장 등을 두었다. 이 가운데서 침선장은 옷의 맵시나 품위, 효용성 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일밖에 모르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합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 때는 왠지 다급한 마음이 들고 하는 일도 진득하게 못하고 건성건성 허둥대는데 바느질감을 손에 들면 달라져요. 마음이 편해지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바느질하는 일과 연을 맺은 것 같습니다.”


침선장(針線匠) 김금주씨의 전생이 견우의 아내 직녀였는지도 모른다. 김씨가 바느질하면서 살아온 세월은 40년이 넘는다. 김씨는 수북면 풍수리에서 3남3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건축 일을 하던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식솔들을 거느리고 광주로 이사를 했다.


“동생들이 많아 중학교를 마친 뒤 열여덟 살에 양재학원에 들어가 옷 만드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복 만드는 일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시절에도 한복은 양장에 비해 돈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복 배우는 일을 잠시 접고 양장점에 취직을 했습니다.

 일이 많아 자정이 다되어 퇴근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밤늦게 귀가하는 저 때문에 걱정하던 부모님은 집 가까이에 양장점을 채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일에 재미를 붙이면 푹 빠져 미치는 성격입니다.”
양장점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이삼년 운영하던 양장점을 접고 서울로 올라갔다. 좀 더 앞서가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삼년 지나 다시 광주로 내려와 시집을 가고 첫아이를 낳았다. 첫아이를 낳고 나서는 다시 양장점을 개업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손님이 많았습니다. 저에게서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또 다른 손님을 데리고 와서 늘 일감이 넘쳤으니까요. 제가 재운을 타고 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잘되던 양장점을 다시 접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는데 간호를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시어머니 간호를 하는데 일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하는 틈을 쪼개 아는 사람의 옷을 한 벌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입소문이 나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씨는 시어머니를 간호하던 그 때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돈을 많이 벌었다.


“두세 달 일하고 나면 집 한 채 값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느질보다 더 쉽게 돈을 벌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경양식 집을 열었다. 식당에 대해서는 경험도 부족했다. 게다가 세 들어 간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 그동안 밤낮없이 옷을 만들어 모은 재산을 모두 날려 버렸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 찾아다니며 물건 파는 일을 했다. 이 일은 반년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반년 정도만 일을 하면 사업 실패로 인해 생긴 복잡한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 같았다.


“어느날은 나에게 단골로 옷을 만들어 입던 선배언니를 찾아가 물건 구매를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배언니가 물건 파는 일은 너에게 안 어울리니까 그만 두고 옷을 한 벌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양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레스토랑 한다고 해찰하고, 돈 없애고 나서 내가 죽을 때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일은 바느질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배언니의 옷을 만들어주고 나자 예전의 단골고객들과도 연결이 되어 일감도 차츰 많아졌다. 그런데 기성복에 밀려 차츰 일감이 줄어들었고, 김씨는 고향 담양으로 거주를 옮겼다. 담양에 와서는 2006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담양군여성회관 양재부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담양에서 활동하면서 오랜 동안 부채를 만들어 오고 있는 공예명인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그분이 제가 만든 옷을 보고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들어 보면 성공할 것 같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분과 만남, 그분의 격려가 제 바느질 인생의 새로운 계기가 된 것입니다.”


김씨는 이 무렵 황토염색과 대나무숯염색에 심취해 있었다. 2009년, 자신이 염색한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전라남도 공예품대전에 도전했다. 공식적인 대회에 첫 도전이었는데 특선의 영예를 안았다. 그 후로 대한민국 황실공예지평선전대전, 대한민국공예대전 등 굴지의 대전에서 연거푸 수상을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담양군 공예명인 침선장, 대한민국 황실공예 침선장으로 선정됐다.


그동안 김씨는 황룡포, 당의, 세자옷, 활옷 등 왕실 옷도 만들었다. 제작비가 100만원이 넘는 이 옷들이 수십 벌이다.


“한복작품을 만드는 일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올해 전시한 작품을 내년에도 출품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요즘도 쉬지 않고 양장 일을 하는 것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양장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작품을 탄생시켜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양장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번 전시하고 나면 박스에 담아 쌓아 놓아야 합니다. 조그마한 전시장이라도 마련된다면 상시로 전시해 놓고 여러 사람들이 보게 하고 후세들에게 자료로 물려 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씨는 바느질을 하고 있으면 오만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아플 틈도 없다고 한다. 외로움도 바느질을 하면서 이겨낸다고 한다. 바느질과 연(緣)을 맺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평한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서양 격언이 있다.

*이 글은 2017년 11월 16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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