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인물지도> 114. 국가무형문화재 흥보가 이수자 권하경씨
<담양인물지도> 114. 국가무형문화재 흥보가 이수자 권하경씨
  • 설재록 작가
  • 승인 2017.12.0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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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은 평생 공부해야 하는 학생입니다”

 

담양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담양사랑 하모니’ 공연장에서 권하경(52)씨를 만났다. 권씨의 부모는 현재 담양읍 삼만리에서 살고 있다. 학동리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공연을 마친 권씨는 부모님이 살고 있는 삼만리를 들를 시간이 없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곧장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담양읍 학동마을의 다섯살 권하경은 마을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한 소녀였다. 당시 마을사람들 중에는 국악에 재능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들은 수시로 마을회관에 모여 단가나 민요를 부르고, 단소나 피리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런 어른들의 자리에 끼어 민요를 따라 부르는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는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명창이 되었다.


“마을회관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이 자리에 이웃마을의 송씨 할아버지도 함께 했습니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이름은 모르고 송씨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소리가 너무 구슬퍼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나는 이 할아버지의 소리를 금방 따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재주를 칭찬하며 따로 시간을 내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제 소리공부의 첫 번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권씨는 1966년생인데 호적에는 1968년생으로 돼 있다. 권씨의 아버지는 늘 병치레를 하며 허약한 딸을 2년 늦게 입적한 것이다. 그런 탓으로 권씨는 초등학교 입학이 2년 늦게 되었다. 2년 아래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 때문이지 모르지만 학과 성적은 늘 상위였고, 같은 학년의 아이들보다 체격이 큰 권씨는 학교의 달리기 대표선수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권씨는 학과, 민요대회, 육상대회 등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저는 담양남초등학교 34회 졸업생입니다. 초등학교 때 민요 부르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습니다. 민요대회에서 상을 받고 나서 같은 종류의 상을 반드시 일 년에 세번은 받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명창 송흥록의 이야기를 그린 전설의 고향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소리꾼이 되어가는 내용이었는데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드라마의 시청은 제가 소리에 더 열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만 나면 민요나 단가를 불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저를 보고 아이다운 아이라고 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수영, 육상, 배구 등 여러 종목에서 학교 대표선수를 했다. 소리공부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면 광주시립국악원의 안채봉 사범을 찾아가 공부를 했다. 소고춤의 대가인 안채봉은 ‘쥐춤’의 명수 안영권의 딸이다. 북, 가야금, 대금, 장구, 징 등 민속 악기를 떡주무르듯 했던 안영권은 특히 세(細)피리로 뭇사람들을 홀렸으며 독경에도 뛰어났다. 임방울 명창과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안영권은 고양이가 쥐를 놀리는 ‘쥐춤’의 명수여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을 받았다. 쥐를 구석에 몰아 놓고 만족해하는 고양이 표정과 공포에 떠는 쥐 모습이 너무 익살스러워 초상집 상주까지 배꼽을 쥐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안채봉 선생님을 찾아가 단가, 판소리눈대목, 남도민요, 가야금병창, 장구, 고법(鼓法)을 공부했습니다. 방학 때는 매일 다녔는데 학동에서 읍내 정류소까지 한 시간 반, 광주까지 버스 타고 가 내려서 또 시립국악원까지 40분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날마다 거듭나는 기쁨 때문에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중학교 때는 학과공부와 소리공부를 하느라 하루에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산 옥녀봉을 수시로 올라갔다. 목을 틔워 소리목을 얻기 위해서였다. 마을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옥녀봉에 올라가 소리를 냈던 것이다. 담양댐, 추월산, 관방천의 관산보 등을 찾아가서도 목 틔우기를 했다. 중학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로 광주예술고등학교 국악과에 3년 전액 국비장학생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한애순에게서 박동실제 심청가와 박녹주제 흥보가를 공부했다. 1924년 곡성 옥과에서 태어난 한애순은 11세 때 친오빠 한진옥에게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박동실 문하에서 10년 동안 심청가·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를 배웠다. 13세 때에 콜럼비아음반에 춘향가·수궁가·남도민요를 취입했고, 정정렬(丁貞烈)에게 춘향가를 사사했고, 37세 때에는 박녹주(朴綠珠)의 문하에서 동편제 흥보가 한바탕을 배웠다.


“예고에 다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새벽 네시에 일어나 소리를 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아직 잠을 잘 시간이기 때문에 학교 밖으로 나갔는데 주위가 온통 공동묘지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어쩌면 친구들은 속으로 나를 악바리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전남대에 진학해서는 조상현에게서 배웠고, 이어서 조통달에게서 박초월제 수궁가를 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에서 활동하다가 1991년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1995년 국립창극단 단원이 되었다. 십여년 동안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던 권씨는 2003년 국립창극단에서 나와 새로운 소리인생의 길을 걷는다. 전주대사습 같은 대회에 도전도 했다. 그러다가 2006년 공주 박동진명창명고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는다. 이어서 2008년 포항국창대회에 참가한다. 이 대회에는 그동안 여러 대회에서 대통령을 수상한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다. 그야말로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세 명의 명인을 뽑는 대회에서 권씨는 영예로운 명인으로 등극한다.


“초등학교 때 입었던 육상부 유니폼에는 태극마크가 붙어 있습니다. 나는 이 태극기에 손을 대고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국악전공 교수가 되어 우리의 음악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씨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에서 판소리에 관한 연구로 음악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는 국악과 관련한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예술인은 평생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그렇게 살아오느라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위험천만한 고비를 일곱 번이나 넘겼습니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깨서 보면 병원이었습니다. 너무 일에 매달리는 통에 3년 전까지만 해도 체중이 50㎏을 넘지 못했습니다. 한 때는 잠을 많이 자는 것, 살이 찌는 것이 소원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건강해졌고 또 판소리를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박동실과 이날치는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거목인데 담양출신입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의 99%가 박동실의 계보입니다. 광주·보성 등 서편제나, 구례·남원 등 동편제가 담양을 탯자리로 해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담양의 판소리의 요람입니다. 전주 대사습이나, 남원의 춘향제 못지 않은 대회가 담양에서도 반드시 열려야 합니다. 담양에 국악원을 건립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박동실제 심청가로 대한민국 문화재가 되는 것이 또 하나의 꿈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2월 7일 현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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