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2
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2
  • /자료제공 담양문화원
  • 승인 2020.03.2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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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향토문화에 대한 원천자료의 소중함이 날로 커지고 있는 시기에 본지는 담양문화원(원장 이병호)의 도움으로 관내 350여개 마을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설화와 전통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지면에 연재한다.
이는 혹여 잊혀 질 뻔한 담양의 소중한 전통과 이야기를 기록하고 알려 기성세대에게는 어릴 적 아련한 추억과 함께 고향사랑과 향수를 일깨우고 자라나는 후배들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야 할 소중한 전통임을 알리는데 목적을 둔다.
단 지면의 내용들이 문헌에 의해 보존되어 내려온 것을 담은 것이 아니라 오랜 구술에 의해 전래된 설화와 전통들이다 보니, 특성상 단지 기억에 의존하여 제보를 해준 구술자에 따라 가공·변형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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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제림

 

# 수해를 막기 위한 관방제림
▲제보자=김귀수(남, 82세)


▲줄거리=관방제림은 관에서 주도해서 쌓아서 관방제림이라 부른다. 1648년 성이성 부사가 수해를 막기 위해 최초로 조성하고, 1794년 황종림 부사가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당시 심은 나무들이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관방제림은 1645년경(1648년 7월~1650년 1월)에 성이성이라는 부사가 담양에 왔을 때 수해가 나서 피해가 나고 하니까 농민들을 동원해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은 것이 시초이다. 관에서 주도해서 쌓았다고 해서 관방제림이다.
농민들을 동원해서 흙을 붓고 나무를 심었다. 그때 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 400~500년 된 나무들이다. 그 뒤로 황종림 부사가 1850년경(1854년)보수를 하고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는데 그때 당시에 심은 나무는 200~300년 됐다.
1933년도에는 엄청난 수해가 나 읍 동정리도 모두 다 잠겨 버렸다.
향교다리 가면 관방제라고 써있는데 그것이 1934년에 세웠다고 기록에 되어 있다.
지금은 문화재(천연기념물)가 되었는데 2010년에 담양문화원이 ‘추억의 관방천 노래비’를 관방제림 밑 조각공원에 세웠다.

1.
조각달이 추월산에 외로이 뜨고
관방천에 물소리는 처량도 한데
임가시고 소식 없는 관방천에서
나와 같이 홀로 섰는 종대가 섧다
2.
풍경소리 양각산에 적막을 깨고
우거진 대밭 속에 뻐국새 울며
정만 주고 떠나버린 관방천에서
바람 따라 같이 우는 고목이 섧다
3.
구부러진 황새목길 홀로 걸으면
잊어버린 옛 추억이 다시 그립다
내 청춘이 시들어진 관방천에서
바람 따라 깜박이는 등불이 섧다.

# 백진강의 유래
▲제보자=이규현(남, 51세)


▲줄거리=송순의 면앙정가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 관방천은 백천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사적 자료나 어르신들의 구전을 토대로 백진강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보통 보면은 백천으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용천은 인자 월산면 쪽하고 용면 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고, 용천 백천이 만나서 영산강 본류로 흘러가는데 현재 오례천을 유천으로 표현을 해놨다. 
그래서 지금 관방천을 백천이라고 했다는 근거는 면앙정가에도 나오고 ‘용천 백천 나린 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천이란 이쪽이 모래가 많았을 수가 있다. 그리고 현재 백진강이 광주 아래까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맞다.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하기는 그러지만은 담양읍을 흘러가는 곳이 백진강이고, 그 밑에는 칠천이여. 칠천은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다.
삼다리 쪽은 용천인데 이쪽이 백천이니까 현재의 백진공원 있는데 까지를 백진강으로 볼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칠천이라고 칠천 다음에 나오는 강이 극락강이다. 극락강 다음에 나오는 게 벽진이고 여기는 서창이다.
용면쪽은 상류인데 어쨌든 영산강으로 불리지는 안했다. 전체적으로 구역마다 용천, 백천, 칠천, 그 다음 극락강, 벽진강, 그래서 강 이름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 바뀌었다.
칠천은 지금 한재 앞에 첨단으로 해서 수북 삼지리 봉산 그쪽 일원 여기를 칠천이라고 한다. 칠자가 옷칠(漆)자. 옷 칠자를 쓰는 데가 이를테면 수북에도 남밭뜰이 있다.
이렇게 범람을 자주 하는 곳들. 그런 데를 대개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무정에도 칠전마을이 있잖아요. 수북에도 남밭뜰, 남전. 그런데가 쪽도 잘 되고 습한 데서 잘 자란다고 그래서 남밭뜰 같은 경우에는 쪽남(藍)자를 쓰는 것 같든데. 넘칠남이 아니라. 어쨌든 이런 식으로 되는 것 같고. 이 부분은 대동여지도나 다른 데를 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그리고 지금 옛날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은 현재의 영산강이 제방 공사를 해놔서 지금의 형태로 있지 이전에는 생룡 밑에까지 강이 갔다가 대전면 태목리 이쪽까지도 올라왔다.
광주 용전이나 이런 데서도 경지정리 해놓은데 그 논을 파 내면은 모래가 많이 나온다.
전에는 배가 이 강으로 해서 위에까지 다녔다.

# 석당간 종대와 까치 전설
▲제보자=김귀수(남, 82세)


▲줄거리=담양이 배의 형국이어서 매놓기 위한 석당간과 배를 띠울 뱃사공인 석인상을 세웠고, 또한 석당간 상봉에는 종대가 달렸는데 구렁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자 까치가 머리로 부딪쳐 종을 울려서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구했다는 전설이다


▲이야기=당간은 뭐를 메어놓는다는 뜻이다. 돌로 만들어서 석당간이다. 뭐를 매놓기도 하고 받치기도 하고. 담양이 못 담(潭)자인데 담양 형국이 배가 뜨고 나는 형국이다. 그래서 저수지가 두 개(담양호와 광주호) 생겼다.
전설에 의하면 배를 매놓을 자리가 있어야 되서 객사리에 석당간이 만들어졌다.
옛날에 배가 뜨고 날려면 사공이 있어야한단 말인데 천변리에 석인상이 사공이라는 의미가 있다. 사공이 있어야 배가 왔다갔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까치가 사람한테 은혜를 입었던 모양이다. 구렁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니 까치머리로 종을 쳐 그래서 있는데  종을 받았지. 칠월 칠석이면 까치 머리가 벗겨진다고 한다. 상봉에 종대가 있는데 이 종을 까치가 머리로 부딪혀 종을 울려서 사람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총무정이 생긴 사연
▲제보자=김귀수(남, 82세)


▲줄거리=총무정은 6·25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양각산 아래에 설치되었다가 현 위치로 옮겨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조사자 : 총무정 근처 거기서 6·25때 사람을 많이 죽였다던데요?)어디서 많이 죽었냐면 관방제 있는데 연화촌 넘어가는데 담양 전씨 제각이 있는데 거기로 세워놓고 무지하게 죽였다.
나도 양각산 아래에 앉아서 있다가 누가 두 사람을 데리고 삼다리 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뒤로 돌으라 하고 쏴죽였다.
활터가 생긴 이유가 6·25 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총무정이 생겼다 한다.
총무정은 원래 양각산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밥술이나 먹은 사람(영감님)들이 한가한 시간에 활도 쏘고 양각산 아래에 있다가 현 위치로 왔다. 읍 양각리에 가서 부자들이 많이 살아서 총무정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천변리 우시장 소울음 소리
▲제보자 박정권(여, 72세)


▲줄거리=우시장에 끌려온 소들이 밤에 울면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애처로운지 소가 짠해서 잠이 안 와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지금은 옮겼지만 옛날에는 천변리 담양장에 소전(우시장)이 있어 가꼬, 밤 12시 넘으면 소가 ‘음메~ 음메~’혀. 그럼 내가 따라서 울었제. 두 서너 시가 되면... 우리 공장자리에 소전이 섰어. 공장자리가 원래는 소전인디, 근데 지금은 소를 소차가 다 실어 날린디, 우리가 살때만 해도 시골에서 소를 끌고 와서 팔아. 그렁게 새벽에 걸어서 온갑데 여그를. 그렇게 여기다 가따 놓으면 ‘음메~음메~’하면은 나는 잠은 안오고, 그 소리를 듣고 슬퍼서 아주 소가 짠해서 죽을 뻔을 했어. 그러다가 이제 소전(우시장)이 다른 데로 가버린게 좋더라고.
그리고 그 옆에 도살장에가. 저기 수바레가 있었어. 도살장에 가 소도 죽이고 한 걸 무섭기는 해도 동네 애들이 구경을 했지. 근데 그 소리에 애처로워가꼬 잠이 안와. 그래서 따라서 울었당게 내가. 그 소리, 소 울음소리가 얼마나 처량했다고.

천변리 농악대
▲제보자=조동호(남, 91세)


▲줄거리=광복 이후에는 8·15 광복절을 경축하기 위해서 일개 읍면에 한 팀씩 농악을 하였는데 천변리 농악대가 담양읍을 주도 하였으며, 명절에 주민단합과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마당밟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야기=해방 후에 농악을 일개 읍면에 한 팀씩 농악을 했어.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풍물을 한 것이 아니라 8·15를 경축하기 위해서 한 것이여. 천변리 노인들이 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은 그때만 해도 설 명절에 모다 여기에 모여 명절이라 술 한 잔쓱 먹고, 굿치고 장구치고 놀았어. 읍면에 하나씩 나오라고 하거든. 그럼 담양읍에선 누가 나오들 안 혀. 그때부터 천변리 농악이 괜찮았어.
천변리는 농촌 절반 도시 절반이여. 강쟁리 주변에서 농사도 제일 많이 친 곳이 천변리여, 그전에는 이장 밑에 이써기(이서기)가 있었어. 그전에 박명숙씨 아들이 이써기를 하고, 황이장이 하고, 치과에 김남수씨가 하다가 고리 넘어가고 하고 했는디. 그전만 해도 사람만 있었지 마이크하고 그런 것도 없었고 중간에 요런 것이 생겼지. 긍게 명절때면 요렇고 술 한 잔쓱 먹고 거시기 할라고 굿을 치고 한디. 그렇고 풍물을 치고 했어. 상도 많이 타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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