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5
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5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4.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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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향토문화에 대한 원천자료의 소중함이 날로 커지고 있는 시기에 본지는 담양문화원(원장 이병호)의 도움으로 관내 350여개 마을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설화와 전통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지면에 연재한다.
이는 혹여 잊혀 질 뻔한 담양의 소중한 전통과 이야기를 기록하고 알려 기성세대에게는 어릴 적 아련한 추억과 함께 고향사랑과 향수를 일깨우고 자라나는 후배들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야 할 소중한 전통임을 알리는데 목적을 둔다.
단 지면의 내용들이 문헌에 의해 보존되어 내려온 것을 담은 것이 아니라 오랜 구술에 의해 전래된 설화와 전통들이 보니, 특성상 단지 기억에 의존하여 제보를 해준 구술자에 따라 가공·변형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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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오계리 지명유래
▲제보자=장기두(남, 1950년생)
▲줄거리=읍 오계리의 오현마을은 동네 뒤의 옥녀봉에서 5개의 줄기가 뻗어 나와 오현이라 불렀고 매화마을은 매화 필 때 군부대 마을이 들어서 매화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광주리를 만들어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오실은, 오현마을이라고도 불러. 우리 동네 뒤에 옥녀봉이 있어. 남산리 뒷산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오계리로 들어가 있어. 오현이라는 것은 옥녀봉에 5개의 줄이 있어서 오현이라 불렀대. 다섯 개의 줄이 있대. 오실을 오현이라고 부른다고 해.(옥녀가 타는 거문고 줄이 있다는 뜻=옥녀탄금형 지형)
화목정은 지금은 꽃쟁이라고 그래. 꽃쟁이라는 곳에는 옛날에 한량들이 술을 먹는 곳이 있죠. 길가다가 주막식으로 꽃쟁이는 지금 오계리로 쭉 가다가 성동리 못가서 굽잖아. 집 한 채 있고. 거기가 기여. 매화마을 못가서야. 꽃쟁이는 담양에서 무정 가는 길손들이 쉬어가는 곳인데 거기에 기생들이 있어. 그래서 한량들이 갔지.
매화마을이 군부대 있는 곳인데 그쪽에 마을은 매화가 피는 시기에 지어져서 그래. 광양에 있는 매화마을이 클로즈업 될 때여. 내가 총무계장 할 때 이 마을을 지은 거여. 오계리 1구가 장씨 집성촌이여. 먼저 오현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맹산공 할아버지로 대략 300여 년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어.
오현(오실)현대사를 집어보면 6·25당시 그 마을이 산속에 파묻혀있는 마을이라 피난을 많이 와서 피난촌이여. 우리 마을이 먼저 생기고, 계동이 다음에 생겼는데 많은 성씨들이 들어왔어.
주업은 농업이고, 부업은 죽세공으로 광주리를 만들었어. 광주리를 만들어 생활을 했지. 보편적으로 농경지도 적고 특별한 소득 작목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마을이었지. 그래서 그 마을 애들이 학력이 높지 않아.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해서 그 당시 대학진학자들이 많지 않았어. 그래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거의 공직으로 많이 들어 와버린 거여. 한때는 오실이 우리 군에서 지방공무원을 가장 많이 배출했지.

금강수와 연화촌 보물 이야기
▲제보자=최진안(남, 1945년)
▲줄거리=연화촌 산 밑에 금강소에는 고기들이 많았는데, 큰 자리를 잡아 다시 냇가에 살려주기도 하였으며, 연화촌보는 보주가 엄격하게 관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야기=저기 금월리 고도실 쪽에서 물이 내려왔는데, 연화촌 보 밑에 금강수(금강소)라고 있었는디, 지금은 막히고 없어. 연화촌 산 밑에 금강수라고 저수지가 있었어. 거기 물로 품어서 농사도 짓고 했지. 그 물을 품어서 농사를 짓는데 그 시기에는 가뭄이라 물이 적었제. 그때 자라 큰놈 하나를 구경해봤네. 자라 크기를 보면 등짝크기가 1미터나 되는 자라가 있었어. 근데 자라가 어찌나 큰가 모다들 자라를 냇가에다가 다시 살려주고, 그러고는 금월리서 경지정리 함서 그 금강수를 막아버렸어. 금강수 크기는 폭은 30미터 길이는 80미터 될 거여. 고기 많았제. 근데 인자 가물면 두레박으로 물을 펐제. 그 다음에 경운기 나오니 발통기로 양수하고 했제.
연화촌보에서 물을 먹고 살았제. 첨에는 독(돌)보로 만들었다가 지금은 시멘트로 만들었제. 관산보다 먼저 생겼다고. 관산보는 담양읍에서 강쟁리 쪽으로 가지. 모자라니까 관방천 황새모가지 양수장에서 물을 뽑아다가 물을 올려주지. 그래서 양각리, 수바레, 백동 쪽으로 모~두 다 가지. 그 때 독보를 치워 불고, 시멘트로 만들고, 그때 관산보가 만들어졌어. 연화촌보는 물 담당자가 있어 가꼬, 오늘은 요집 물 대주고 딱 막고, 그 다음에는 다음 집 물대주고 딱 막고, 또 다음에는 다음 집 물대주고 그랬제. 이렇게 차근차근 순서대로 다 대주고, 그리고 또 24시간 근무하고, 아침에는 딴사람으로 교대하고, 그때 가물 때는 다 그렇게 했지. 그래 가꼬 지금도 보주라고 말하잖아. 물 관리하는 사람보고 보주라고 해. 보주한 사람들이 얼마나 저기 했다고 완장 찬 사람이 대장이제.(웃음)

학이 날아오는 마을
▲제보자=이삼순(여, 1928년생)
▲줄거리=학동마을은 학이 많이 날아와서 학동이라 불렸는데, 경치가 좋아서 담양 학생들의 소풍터였고, 봄이면 화전놀이가 많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학이 많았다고, 여기가 학터였어. 삼만리 구름다리 맹키로. 학이 날라 다녀서 학터라고 근다우. 학이 날라 다니는 동쪽마을이라 학터라 근디, 옛날에는 여기로 소풍을 많이 왔는디, 초등학교부터 중학생까지 많이 왔어라우. 여기가 소풍터라요.
허릿질, 사람으로 말하면 허리, 여그가 허릿질이여. 학동 허릿질길이 없었는디 허리를 볼봐 다닌다고 했어라. 소풍 댕긴 데가 허릿질이라우. 저질로 넘어 가라우. 모냐는 넘어 댕겼어.
(조사자 : 허릿질 넘어가면 어디예요?)
인자 순등 나오지 순등, 외추리도 넘어가고, 소리실도 넘어가고 그려.
옛날에는 봄에 화전을 하고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디. 학생들이 소풍을 다 여기로 오지라우. 봄 돌아오면 통~거그서 화전하고 놀았재라. 그나저나 어디 갈때가 없는가 다 학동으로 옵띠다. 관방천부터 다 걸어서 오고, 다 걸어서 가고···.

연꽃 암술에 자리 잡은 마을
▲제보자=최진안(남, 1945년)
▲줄거리=남산마을 꼭대기에서 앉아서 쳐다보니까 동네 뒷산이 연꽃 같이 생겨서 연화촌이라 했으며, 수술 자리에 마을이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저기 남산마을 꼭대기에서 앉아서 쳐다보니까 여기 동네 뒷산이 연꽃같이 생겨서 암술과 수술도 있어. 그래서 연화촌이라 했어. 근디 수술에가 마을이 생겨야 된디 암술에가 동네 마을이 생겨가꼬 큰 사람이 없다 혀. 그래서 평범한 사람밖에 없다고 해. 암술은 가운데가 있고 수술은 암술을 감싸고 있고 꽃잎이 있잖아. 그니까 이 마을은 한가운데 앉아 있당게.
저 동네 생긴 것은 황새모가지에, 동정지 확 굽은 양수장 쪽에 앉아서 여기를 쳐다 본디, 여기가 예전에는 냇물 가운데라고 정자나무 밑에서 담양국씨들이 안거서 쳐다 본디 “저그다가 집을 한 채 지으면 밥은 먹고 살겄다.” 그러고 거기 안거서 이야기 하다가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가 담양 국씨들이 뒷동산에서 집을 짓고 살었어. 요 집이 제일처음 지어진 집이제. 담양 국씨들집이 남산리 2구 5번지에 처음 집이 지어졌어.

물레방아 도는 내력
▲제보자=김병섭(남,1932년생)
▲줄거리=마을 앞에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무정면 성도리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방아가 돌아갔으며, 쿵쿵 방아 찧는 소리가 커서 비락방아라 불렀다고 한다.


▲이야기=이 앞에 수차가 있어, 수차라 함은 물레방아 그래서 방애실이라 그려. 이제는 물레방아가 경지정리가 돼서 집도 어디로 다 없어지고···.
물이 어디서 내려온고 하니, 저기 무정면 성도리에서 내려와. 그 물을 조르르 받아가꼬 거기에 수차가 있었어. 그 물레방아 이름이 비락방아라고 혀. 그 물이 모아가꼬 쏟아지면 텅~하고, 또 물이 모여가꼬 물이 쏟아지면 또 텅~ 소리를 내며 방아를 쪘지. 그게 발전 해가꼬 물레방아가 나왔제. 일제 왜놈들이 들어와가꼬 정미기가 있었지. 물레방아를 정미기로 바꿨어. 기와줄로 연결해서 돌려서 썼지. 물레방아가 뺑뺑 돌믄 기와가 맞아서 뺑뺑 돌아서 그걸로 해서 쓰는 것이여.

쉬엄쉬엄 쉬영고개
▲제보자=김병섭(남, 1932년생)
▲줄거리=담양 입구 지금의 공고 옆에 고개가 있었는데, 경사가 상당히 급해서 쉬어가야 한다해서 쉬영고개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대팔등은 산 능선이 있어. 공고 옆에 국도 쪽이 가깝지. 우리는 예전에 거기서 하루를 했제. 하루는 지금 말로 하면 야구. 야구 하는 식이여. 주먹으로 공을 쳐. 하루를 하고 놀았어. 그 전에는 하루를 50미터만 한 공간이 있어도 했어. 애기 때(초등학생)그러고 놀았어. 쉬엄고개(쉬영고개)가 공고 옆에 있었어. 공고 옆에 재가 있었어. 저기 신기 뒤에 가서 금발등이 있어. 금발등이란 산을 말하는 것이여. 금발등이 있었기 때문에 쉬엄고개라는 지명이 있는 것이여. 일제 때는 차가 포도시 올라갔어. 광주서 담양을 갈려면 쉬영고개를 거쳐야 올라갔지. 그때 당시 어른들 말을 들어보믄 고개가 저그 저 월산면 화방리 위에 고개가 있지. 그것은 암 것도 아니여. 옛날에 석탄차가 달달달~ 가다가 서버려. 뒤에서 밀어야 올라갔제
일제 때 쌀 싣고 가면, 그때 대막대기로 뺏어먹었어. 일제 때 도락부락이 있는데 목욕탕을 가는디 못 올라가. 그래서 거기서 쉬어가믄 대꼬쟁이로 쑤셔가꼬 김을 얻어가꼬(힘을 받아가지고)넘어가고 그랬어. 그만큼 고개가 험했었어. 큰 고개는 아니더라도 고개가 상당히 경사가 급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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