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6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6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05.07 16: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님이 골라준 오정마을 우물
▲제보자= 전병룡(남, 1944년생)
▲줄거리= 옛날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오동나무를 비고 그 자리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다’고 하면서 우물자리를 잡아주어 오정마을이 되었으며, 샘물을 먹지 않는 지금도 그 유래를 기념하여 마을에서 샘제를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삼만리는 동네가 세 부락이 있어서 삼만리여. 오정, 삼만(선계), 고도실 이렇게 있지. 오정마을에는 옛날에는 시암이 있었어. 근데 상하수도가 생김서 시암이 막혀버렸지. 그래서 군에서 저렇게 시암 그림(벽화)과 지붕을 만들어줬어. 옛날에는 저 시암에는 물을 떠다 먹고 빨래도 많이 했지. 물이 많~여.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랐제. 옛날에는 정자나무에 구녕이 뚤어져서 속이 비어가꼬. 인자는 다 차버렸지. 그래서 옛날에는 소가 들랑날랑 했었어. 팽나무가 두 그루, 땅버드나무 한 그루, 규목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
옛날에요, 저 우물이 스님이 잡아줘가꼬~(어째서 오정이라고 했냐면요. 오동나무를 비고 정제나무도 비어서 오정이라 이름을 지었어요.) 스님이 잡아 준 게로 거기서 물이 솟아버렸어요. 스님이 “오동나무를 비고 그 자리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다”고 했어요.
옛날에 저기 마을 뒤에가요 권씨들이 좌우를 하고 살았어요. 보호수 있는 마을 말고 뒤에 가면 마을이 또 있는데 그 마을이에요. 권씨들은 지금은 다 이사 가고 없어요.
지금도 마을서 샘제를 지내요. 샘제를 보름에, 열 나흗날 낮에 되면 돼지사고 과일사고 삼실과 준비하고 나물하고 떡하고 저기 삼만리 윗동네에서는 우물서(아이가)하나 빠져 죽어서 이쪽으로 샘을 옮겼제.

무너미고개 이야기
▲제보자= 윤정섭(남, 1934년생)
▲줄거리= 담양댐을 막아서 수로관을 놔가지고 고개를 넘어 담양댐 물이 장성까지 가는걸 보고 무너미고개라 물이 넘어가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담양댐이, 용면 담양호가 막아졌는디. 여짝에 (물이)넘어왔어. 요 마을은 담양읍으로 되었지만은 그전에는 월산면인디. 저쪽에 200m정도 가믄 무너미 고개라는 것이 있어. 무너미 고개서 살짝만 넘어가면 수북면 두정리와 주평리가 나와. 근데 거기가 바로 무너미고개라고 했어.
물이 골짜기서 내려온디, 전에는 무너미고개라고 불렀는디, 담양댐을 막아가꼬 그 큰 도랑을 넘어가더라고, 물이 수로관을 뇌가꼬, 수로교를 놔가지고, 물이 거기를 넘어가버려. 그래가꼬 담양 댐물이 장성까지 간단 말이여. 그런걸 보면 ‘무너미 고개가 물을 넘어가는 것을 말했는갑다.’,‘물이 넘어간다는 소리를 무너미고개라 말했는갑다.’해. 예부터 부르던 이름이 무너미고개여. 무너미고개에 물이 넘어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거든.
담양댐은 70년대 생겼는데, 그전에도(댐이 생기기 전에도) 항시 무너미고개여. 이게 희한혀. 보통소리가 아인여. 어려서부터 무너미고개라고 안게. 그리고 우리 논이 거기에 칠, 팔마지기 있었어. 그래가꼬 그놈을 부를땐 무너미 농사지으러 간다고 했어. 그런디 마을사람이 애기를 했던지, 누가 무너미라고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 때부터서 무너미 고개여.


명마바우 이야기
▲제보자= 윤정섭(남, 1934년생)
▲줄거리= 까치고개 명마바우 옆에 군부대가 생겨 대대장이 관사에서 잠만 자면 죽으니 관사를 폐쇄했는데, 명마바우 신이 싫어한 때문이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까치고개에 명마바우가 있어. 월산면 소재지 넘어간 디, 군부대 앞에, 그 군부대를 신설한 뒤에 인자 군부대 대대장이 중령이 왔어. 중령이 왔는디, 이사람이 서울 사람인디, 근데 군인생활을 한 게 어디를 못간 게 그래서 마누라가 한 번쓱 와. 마누라가 간 날 저녁에 대대장 중령이 죽어버렸어. 중령이 혼자 자다가 죽어버렸어. 정문 앞에가 집이 있는디. 내 생각에는 명마바우가 그 속에 들어간 거 같어. 명마바우는 큰 바우단 말이여.
뒤에 또 다른 사람이 부임해서 왔단 말이여. 그 사람이 또 얼마 못가서 죽어 버렸어. 요것이 이상한 일이여. 근디 두 번째 죽은게, (다음)대대장이 군부대에 와서 관사에는 안 들어가. 안 들어가고 도계동 마을에 방을 얻어서 살아. 지금도 그 대대장 관사는 안 살고 폐쇄되었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몰라. 둘 다 혼자 자다 죽었다는 말이여.
우리가 월산학교 다닐 때 명마바우 위에 앉아서 아그들 보고
“너희들 가서 생끼 끊어와!” 생끼가 뭔지 모르제? 소나무 웃대가리 쭉 올라간 놈, 그놈을 끊어서 깍아서 먹으면 참 달고 맛있어. 외순 나온거 말고 그 밑에치. 그러니까 이 년이 된 소나무 거여. 그놈을 전에는 배고플 때라 깍아서 명마바우 위에 앉아서 우리는 먹어봤어. 명마바우 위게는 여럿이 앉을 수 있어.

삼만마을과 선계마을 지명전설
▲제보자= 김한영(남, 1940년생)
▲줄거리= 옛 나라에 삼무절이 있었는데, 이 삼무절에서 삼만리라는 말이 나왔고, 삼무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계마을이 생겼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삼오절(삼무절)이 있었다고, 그래서 삼무마을이라고 하다가 ‘삼만리’라고 불리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여기 비문에 보먼은 그때 고려 중기 때 정도, 우리 마을 첫 번에 오신 성씨가 양씨가 와서 살았다고 해. 말기 때 김씨가 왔고, 그 이전에 삼오절이라는 곳이 있었을 것이고, 그때는 무인지경이지. 말하자믄 아무 뭣도 없고, 여기 양씨들이 마을에 왔어.
살다보니 그 이후에 김가들이 왔어. 이 마을에, 그 다음에 박씨들이 200년 후에 왔지. 우리가 10대 째, 거기는 시방 7대 배께(밖에) 안 된게. 야튼 몇 백 년 후에 여기에 왔지. 그래가꼬 세 성받이가 시방 한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디, 양씨, 김씨, 박씨, 그다음으로는 많은 성받이가 와서 시방 살고 있제. 애당초 그렇게 와가꼬 여러 성받이가 많이 살았어.
선계라는 마을은 그때 당시에 그 위에 절터가 있었는데, 긍게 절이 없어져 버린 당시인 뒤인게, 여기서 뭣이야, 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계라는 곳이 화장터란 말이여. 근데 여기서(삼만 마을에서)나가꼬 거기(선계마을)가서 살라면 사람이 잘 못산데, 전설적으로 여기서 난 사람들은 왜 그러느냐, 거그는 화장터, 화장터야. 그렁게 거기가서는 성하들 못했다고 혀.

여러 마리 용이 돌아보는 회룡마을
▲제보자= 윤정섭(남, 1934년생)
▲줄거리= 회룡마을은 여러 산줄기가 갈려져서 한곳으로 모이는 곳으로, 여러 용이 여기 마을을 돌아보고 있다하여 회룡마을로 불린다는 지명유래이다.
▲이야기= 여러 갈래로 줄기가 갈라져 내려온디 여그 여 짝에 강동산도 돌아보고 있고, 저그 저 가산리 1구간 산도 돌아보고 있고, 전부 산들이 이 마을을 돌아보고 있다. 지금은 모을 회(會)자를 쓴디 원칙적으로는 돌아올 회(回)를 써. 그래가꼬 여러 용이 여기 마을을 돌아보고 있다. 그렇게 해서 회룡마을이다.
그러고는 바위가 큰 바위가 있단 말이여. 여그 뒤에 가믄 장군 바우가 있어. 그 건너편 저 짝 만치 조적바우라고 봉긋하니 서 있는 바우가 있어. 그리고 지금의 군부대 정문 있는디는 관사를 지어가꼬 지금은 보이지 않는디, 거그가 명마바우라는 바위가 있어. 우리는 명마바우를 뭣도 모르고 ‘명마바우’,‘명마바우’하고 불렀는디, 뒤에 군부대가 들어와서 이상하다 생각혔어. 군부대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되야. 그런디 명마라는 것은 오히려 군부대에서 썼다 그것이여.
저기에서 1구 있는 쪽으로 내려가면 칼꽂재라는 곳이 있단 말이여. 칼로 짜른 놈 마냥 생겼어. 고리 넘어 댕기는 질이 있어. 우리 마을에서 차정리(삼다리)로 넘어가는 길이 있어. 지금은 삼다 내다, 외다 마을이 나오는 곳, 거기로 넘어서 예전에는 담양장을 댕여. 고놈이 가직 혀.
아까 내려 온디가 마재가 있거든, 마재를 넘어가면 뽀쪽히 솟은 봉우리가 투구봉이고, 밑에 봉우리 하나가 장대봉이 있어. 장군바우는 마을 후록(뒷산)에 있어. 거기가 있고, 병풍바위, 마을 뒷산에 넓적하게 큰 산이 있어. 병풍처럼 쫙 피고 있어. 노적바위는 저쪽 장군 바위에서 저 건너에 주령산 밑에가 있어. 예전부터 노적바위에 갔다 왔다 그렇게 말했어. 볏가마니를 천석을 쟁인다던지 많이 모아논 걸 노적이라고 하제.
여그서는 그저 산다는 것이 유교사상 마을이라 평야 촌제 지낸 것도 유교사상의 한도막이거든. 그런게 서당 글 갈치고 여그가 서당재라는 재가 있어. 거기가 집이 있었어. 서당재는 여기 서편 뒤쪽으로 가믄 저 짝에 화방리를 넘어가는 데가 서당이 있었어.
생촌이라고 하고 생말(생마을), 회룡이라고 불리었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나면 68년도 한해가 무지하게 심했어. 그 때 담양댐을 안 막았을때도 여기는 모내기를 70%는 혀. 여기는 생수가 좋은 디여.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여기는 물이 오염 될 때 가 없어요. 긍게 여그 물을 먹고 살면 건강하다고 했어. 생수가 많이 난게 생마을이라 했단다. 근데 이 말은 이치를 안사. 긍게 회룡이 맞어. 용이 돌아보고 있다는 소리도 맞고.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9번지
  • 대표전화 : 061-381-1580
  • 기사제보 : 061-382-4321
  • 인쇄물,기념품,광고문의 : 061-381-3883
  • 팩스 : 061-383-211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근
  • 법인명 : 담양군민신문
  • 제호 : 담양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232호
  • 등록일 : 2006-9-14
  • 발행일 : 2006-9-14
  • 발행인/편집인 : 최광원
  • 담양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담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dy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