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7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7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05.1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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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교리 대숲

 

효자의 부모 선산을 찾아준 구름다리 전설
▲제보자=이상진(남, 1959년생)
▲줄거리=옛날 어느 효자가 중국으로 장사를 떠났는데, 고향의 산소를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조상 묘를 찾으려면 구름을 타고 물구십리를 건너서 삼만리를 지나 옥뫼라는 데를 가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담양의 마을 이름을 찾아 묘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다.
▲이야기=구름다리라고 했어요. 구름 운(雲)자 다리 교(橋)자 해서 운교리라고 불렸죠. 옛날에는 이런 말을 들었어요. 옛날에 효자가 살았어요. 그 효자가 중국으로 장사를 떠났는데, 자기 부모들이 여기 살아계셨는데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와보니, 오래되어서 산소를 못 찾는 거예요. 찾아 헤매고 하다 보니까 못 찾고 잠을 자다가 꿈을 꿨는데 산신령이 나타나서 “조상 묘를 찾으려면 구름을 타고 물구십리를 건너서 삼만리를 지나 옥뫼라는 데를 가면 찾을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마을 이름을 찾아 묘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예요.
저기 옆 동네가 삼만리예요. 어른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미풍양속이 전해지던 삼다리 백중제와 당산제
▲제보자=전이규(남, 1927년생)
▲줄거리=외다 마을을 일으킨 밀양박씨와 천안전씨는 마을에 기증을 많이 하고 수익금으로 칠월백중날과 당산제에서 동네잔치가 크게 벌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외다, 동다, 서다 해서 삼다리여. 왜 차 다(茶)자가 들어갔냐 하면 죽로차가 그게 많이 생산되는 고장이었어. 옛날 어르신들 말을 들어 보면 외다 보다도 동다나 서다 쪽에 대밭이 엄청나게 많거든. 거그가 차나무가 아주 서식하기가 좋은 지역 이었던가봐. 그래서 아마도 삼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추측을 해보지.
외다, 내가 살던 마을은 그 마을이 형성된 지가 400년 가차이 될 거여. 처음에는 우리 천안전가하고 밀양 박씨하고 그 성받이가 마을을 일으켰어. 거기에 좋은 미풍양속이라고 그럴까 전통이 있는데, 우리도 어려서 어른들한테 듣고 그래서 그런 갑다 했는데.
두 마을이 형성 될 적에 밀양박씨는 지금 같으면 하천부지를, 말하자믄 공안지를 개간을 해서 마을에 내놨어. 지금도 그 재산이 유지되고 있어. 일반 밭이 4,000평이야. 그러고 우리 전가들은 물레방아를 만들어 가지고 동네에다가 기증을 했어.
내가 거기서 살 때만 해도 칠월 백중날은 잔치를 해. 그때만 해도 동네서 물레방아를 어떻게 관리 할 수가 없으니까 경영자를 말하자믄 모집을 해. 입찰을 부쳐. 그러면 나락 다섯 섬을 써낸 사람이 있고, 거기서 많이 써낸 사람한테 일 년간 경영권을 줘. 그래가지고 그 비용가지고 동네 경비도 쓰고 긍게 칠월백중날은 동네에서 그렇게 큰 잔치가 없어. 돼아지 잡아가지고 다 어른들 모시고, 요새 같으면 경로잔치라 그럴까. 그런 문화가 있었어.
시방 그래가지고 물레방아가 시세가 없으니까 일반 방앗간으로 개조해서 운영하다가 동네서 팔아버렸지. 그래서 흔적이 없어져 버렸어. 우리 어려서는 그 물레방앗간이 쉽게 말하자믄 낙차가 좋아가지고 여기 양각리나 객사리 일대 전부가 와서 도정을 해가지고 가고 그런 때가 있었어.
당산나무는 350년 내지 400년이나 됐지. 마을 형성될 때 심었으니까. 옛날에는 정월 보름날에 모셨어. 그러면은 소위 그 당산제를 지내는 제주가 누가 되냐. 비교적 주변이 깨끗한 사람 쉽게 말하면 애도 못 낳고 깨끗한 분. 그 분이 제주를 해서 음력 정월보름이 얼마나 엄동설한이여. 일주일간을 냇가에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모셨어. 그런 풍토가 있어요.
그 대신 동네에서 그 제주에게 무엇을 보상해 주냐. 동네소유 논이 30두나 있었어. 그 중에서 보상의 일종으로 동네소유의 논에서 닷 마지기 정도 띠어서 지을 수 있는 경작권을 줬어. 그런 아름다운 문화가 있었어.

금불이 나온 탕건바우
▲제보자=김한영(남, 1940년생)
▲줄거리=마을 위쪽에 탕건바우라고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발파작업을 할 당시 바위 아래서 금불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야기=마을 전설로 보자믄 여기 우게 탕건바우라고, 바우가 상당히 엄청 컸어. 근데 일제 강점기 때 폭발을 했어. 왜냐믄 발파작업 해가꼬 그 독(바위)을 쓰기 위해서 야지공사라고 폭발을 했는디, 거그서 금불이, 부처가 나왔다고 혀. 그때 당시에 근데 그 부처는 보관이 안되고 어떻게 되았는지 일본 놈들이 없애버렸는지는 몰라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
근데 그 후에 여기 절이라고는 다 없어져 버렸는디~묘허니 백련사라고, 거기도 삼만리 땅이여. 백련사가 명맥을 이을라고 여기로 왔어. 96년도에 왔다고~

봉산면 대추마을

봉산 대추마을 유래
▲제보자=김용오(남, 1936년생)
▲줄거리=대추리는 가을에 풍성한 마을이라고 해서 대추리라고 하는데,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그 만큼 가을에 나락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큰 대(大)에다가 가을 추(秋) 가을에 풍성한 마을이라고 해서 대추리라고 합니다. 벼 같은 거 평야지대기 때문에 나락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해서 대추리다. 대추나무(이야기)는 옛날에 아주 큰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대추리라고 했는갑만. 옛날 어르신들이 고인이 되아 가지고 이야기해줄 어르신들이없어.
여기가 하남정씨가 많이 살았어. 그렁께 년대는 잘 모르겄는디. 하남정씨 집성촌이었어. 그런데 다 이사 갔지. 동네가 커서 130호가 됐지. 지금은 성받이가 객지에서 들어온게 사성이 되어버렸어. 옛날에는 그랬어요. 남면 면장보다 대추마을 이장 하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여기 앞뜰이 꽃남쟁이인데 없어져 버렸어. 그 근방 들판이름이라 지금도 그렇게 불러. 개정지는 감나무밭 사이에 여기하고 서봉마을 사이를 개정지요. 마을 뒤 냇가에 고리가 유목징이여. 그리 지어서 그런가 거기에 소 돼지를 많이 키워. 고리 옛날 어른들이 짓기를 그렇게 지어놨는가벼.
동네 가운데가 서당이 있어서 서당거리요. 평야 거기가 서당골목이지.

새마을운동과 박정희 대통령 방문
▲제보자=김용오(남, 1936년생)
▲줄거리=전남에서 새마을 운동 모범마을로 선정 돼서, 박정희 대통령이 두 차례나 방문을 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5·16혁명 박정희 대통령이 두 차례나 방문을 해서 방앗간도 세워주시고 딸기도 대추리서 전국으로 퍼쳐나가는 게 대추리여. 새마을운동으로 모범부락이다고 봉산면에서 대추리가 제일 전기가 먼저 들어왔어. 요 앞에 새로 진 집이(그때 진 집들이여)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 때 와서 정미소 지어주고 전기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도정공장을 전기로 해서 700만원을 융자를 해서 지어주었어요. 두 차례나 방문을 했어. 새마을 운동 전남에서 모범마을로 선정 돼서 그때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지. 묵은 집 뜯어 벌고. 쉽게 말하면 취락 개조. 5·16혁명 이후 1962년부터 했지.

봉산 제월마을 유래
▲제보자=이금섭(남, 1944년생)
▲줄거리=제월마을은 백제시대 고분이 발견되는 고터이며, 거북 모양 산의 꼬리에 위치하여 구미동으로 불리다가, 제월봉 이름을 따서 제월리로 개칭되었다.
▲이야기=전주이씨가 입촌하여 오랫동안 자자일촌하여 살아온 마을로 이윤황 선생의 사당 나벽당에서 후손들이 음력 시월 초하룻날 제사를 모시고 있는 양반마을이다.
전주이씨가 입촌(이태효)해서 일촌하고 살았지. 옆 산이 거북이 모냥인데 그 꼬리에 자리하고 있어서 구미동(龜尾洞)으로 불르다가 제월봉 산 이름을 따서 제월리로 바꾼거지. 그래서 마을 회관 앞에 거북이 모양 바위가 있어.
(조사자 : 나벽당은 전주이씨의 사당인가요?)
이윤황(시조 이태효의 방질이라 함)은 그 선생님 이름이고 나벽당은 호를 따서 만든 거고 거기는 이윤황 선생님의 사당이지. 군에다가 왜 보수비를 못 받냐 하면 당나라 친구들과 서신을 교환을 하고 여기 반룡리까지 제자가 없는 사람들이 없는디 그 후손이 곤란해져 버린 게 서적이고 뭐이고 보존할 수 있는게 다 없어지고 사당만 있어
음력 시월 초하룻날 제사를 모셔. 직계 손이 이영신(현 이장) 그때 당시 요샛말로 말하면 부면장까지는 나와 있거든/ 석천 뭔 군수 했다는디···.
(조사자 : 제월리에 고분도 있다던데요?)
고분은 마을 뒤로 가서 쇠창으로 쑤신거 있잖아요 그걸로 금반지도 캐낸걸 봤거든요. 그러고 지금 저한테도 있는데 일본사람이 80년 초에 현장을 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 선물 받은 전자계산기가 지금도 있어요. 거기가 백제문화고분으로 80년대 초에 왔어요. 캔 사람은 양해채라는 사람이 발굴을 했교 옛날 봉산 주조장을 50~60년대에···지금 거기를 일본 사람들이 아니까 지금도 이 일대를 발굴을 하면 뭐가 나올랑가는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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