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9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9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6.0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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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 송순 묘소
학동 샘물

 

송씨문중과 상덕마을
▲제보자=송진모(남, 1942년생)
▲줄거리=면앙 송순 출생지 상덕마을은 송희경 선생이 입촌해서 마을을 형성하고 송씨들이 자자일촌하여 살아왔으며, 대밭이 좋아서 1950년대에 담양 죽제품 만드는 좋은 대는 이곳에서 많이 나갔다고 한다.
▲이야기=300년에서 350년인지 몰라. 송 희자경자 송순선생님의 고조부가 먼저 오셨다고 들었어. 송희경 선생님이 세종, 문종, 단종 삼대에 걸쳐 승문원에 재직을 하시고 일본거시기(회례사)도 갔다 왔고. 1455년에 정착해서 500년이 되았죠.
90프로가 (송씨)자자일촌이지. 10프로는 매제 매향 사우같이 외가나 처가나. 박씨 전씨, 배씨가 살고 있지. 이씨도 있어. 송순 선생님의 출생지인데 1758년에 추성지에 갈모리라고 불려왔대요. 1914년에 상덕리로 되았지.
(조사자 : 상덕마을도 죽제품을 만들었나요?)
다했제. 갱기바구리, 소쿠리, 삿갓 이 세 가지 꺼. 1950년도에는 죽제품 아니면 밥을 못 먹고 살았어. 그게 주업이제. 우리 같은 사람은 농사를 몇마지기 지었어. 주업이 될 정도로 성했어. 대밭이 그때 그대로여. 여기서 대가 아홉바우 구암에서 문발대 다 나가고. 무정면 죽산에 갱기발 바구리대는 말도 못하고 좋은 대가 여기서 다 나갔어.

면앙 송순 생가터
▲제보자=송진모(남, 1942년생)
▲줄거리=상덕리 마을 대밭 속에 송순 생가터가 있으며 매년 10월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야기=자는 수초·성지, 호가 귀촌·면앙정이여. 면앙정인데. 아버지 태와 순창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의정부 우찬참 겸 춘추감사를 지냈어요. 면앙정가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 시를 짓기를 송강보다 많이 지었는디. 맨 정송강 시만 나오지. 우리 송가가 없다 소리거든. 책을  만들 때 넣었으면 했는디 안 넣었응게 생가터가 원래는 면지에는 주소가 잘못 되었는데 봉산면 기곡리 상덕부락 179번지가 기여. 어른들한테 들었던 말로는 여기서 보면은 상덕리 마을 중간에 대밭 속에가 여그가 전전 부터서가 우리 집이여. 봉산면 기곡리 610번지에 500년 된 모과나무가 있었는데 고사되었어. 참말로 큰놈이 죽었어. 대뿌리가 빨라 먹어버리지 그늘져버리지. 그래서 죽어버렸지.
여그도 면앙 선생이 받아서 능안(송순의 묘역)이라고 그래. 송가 선산에 묘가 30기가 있어가지고 매년 시월 정자 들어가는 초정에 제사를 모셔.
기덕제는 능안에 제사를 모시는 제실이여. 제실도 기고 산지기가 있고. 기덕제가 제실이여. 4칸의 3판인가 무지하게 커. 방이 동쪽 방에 나만큼 어르신들을 모시고 서제 방에는 젊은 사람을 모시고 회의도 하고 하지. 400년 내려온 그 집인디 중간에 세가지고 1955년경에 기와를 고쳤어.

학동마을 유래
▲제보자=송현수(남, 1938년생)
▲줄거리=예전에는 마을놀이를 걸궁, 쥐불놀이, 윷놀이등을 했지만 지금은 축구를 하고 있으며, 원래는 샘마을이었으나 지형이 학처럼 생겨 학동으로 바뀌었다는 마을 민속과 지명의 변천 이야기이다.
▲이야기=정월대보름날 집집마다 걸궁을 하고 희사금을 받아서 종을 샀지. 불나면 끄기 위해서 알림을 위해서 마련을 했지. 그리고 인자 연극도 있었네. 춘향전 연극도 청년들이 했지. 60~70년 전에. 집에서 무대장치를 해서
(조사자 : 쥐불놀이를 크게 했어요?)수북면 개동리하고 막 싸웠어. 물 건너 사람들하고 싸웠어. 보름에 윷놀이를 했고, 지금은 리대항 축구를 8월 15일날 해년마다 해요. 봉산면 전체가 합니다. 이번에 장년 청년 2등 했어. 신학하고 학동하고 합해서 나가. 30년 째 한가 몰라. 올해 마항리가 일등을 했어요. 마항, 선봉, 제월해서 세 부락이 함께해서 그래서 일등 났지.
새 학(鶴)자거든. 마을 지형이 학처럼 생겼어. 학터라고도 해요. 원래 마을 이름은 샘마을이요. 신학리 다음으로 생긴 마을이에요.

탄금마을 형성과 옥녀단좌 이야기
▲제보자=김이수(남, 1935년생)
▲줄거리=탄금마을은 김해김씨가 지나가다가 풍수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입항했으며,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으로 옥녀단좌가 있어서 물이 안 떨어지고 부촌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김해 김씨 김남기 씨가 먼저 들어왔죠. 우리가 어르신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선조가 풍수를 했는데 지나가다가 그 자리를 보고 풍수가 마음이 들어서 들어왔어요. 밀양손씨가 순창 방축리에서 들어오고요. 지금은 이씨, 최씨 등 여러 성이 살아.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2004년도에 죽어버렸어. 마을시정 옆에 있었는디. 옛날에는 포장이 안 되고 길포장을 해버리니까. 뿌리가 썩어서 죽어버렸는가봐
나무 수령이 300~400년 된 디. 이 마을 생긴 당시에 심어졌응게. 당산나무가 있고 여그가 마을 회관이 있었어. 옛날 마을길이 1미터도 안되었어. 새마을 사업 하면서 요리가 다 대나무 울타리였는디 새마을 사업하면서 다 뜯어 버리고 벽돌로 쌓았죠. 마을길도 3미터로 확장을 하고···.저기 앞에 무지등(무제등)이고 그 뒤에 높은 산이 옥녀봉이여.
옛날에 길이 없었는데 이개호씨가 행정계장 할 때 길을 내줘서 만들었죠.
옥녀봉 밑에가 서당골이 있어요. 거기에 집이 있어서 서당이 있어가꼬 그때만 해도 이 마을이 부촌이었나봐요. 마산리도 가직하고 서로 왔다 갔다 하고 그랬는갑데요.
반월 가는데 연꽃 방죽을 탄금저수지라고 해.
거문고를 탄다고 해서 탄금이라고 했나 봐요. 여기가 옥녀봉. 그것이 사실인가 몰라. 저기 연동 앞에 물이 많이 안 난가. 여자 자궁이다는 말이 있어. 그런게 거기 물이 안 떨어진다고···. 지금 불추산이 남자의 애무(성기)라고 했고···
옛날 말한 거 보면은 그 묘 하나가 있는데. 그 묘에서 도로 있지 않습니까? 거기 앞에를 안 넘어가면 부자가 된 디. 그 도로를 넘어가면 부자가 안 된다는 말이 있어요.
꽹과리 치고 냇가테서 석전이나 불싸움 하고 그랬죠. 옛날에는 많이 했죠. 냇가 양쪽에 수북면하고 기곡리하고 많이 했죠.
바구리 많이 했죠. 바구리가 옛날에 방축리에서 시작을 했는디, 그때 우리 마을서 계약을 해서 와가지고(방축리에서 기술을 배워다가) 우리도 시작을 했지요.

거문고 소리와 옥녀봉
▲제보자=김이수(남, 1935년생)
▲줄거리=마을 앞에 길이 생기니 옥녀봉 아래 거문고 줄이 생겨 좋아졌으며, 마을 앞 차도 소리가 거문고 소리로 들려야 마을이 발전한다 하여 방음벽을 철거 했다. 옥녀봉 밑에 샘에서 1960년대까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야기=인자 옛날에는 여그 길도 없고 그래서 이 길이 생기고 나서 동네가 나아졌어요. 전기줄이 얼키고 한 게 그런 형국(거문고 형국)이 된 것 같아요.
우리 마을 끄터리 아랫주막이라고 주막이 있었어요. 마을 입구 들어온디. 옛날 주막이 있어가꼬 어르신들이 술 먹고. 우리도 그걸 봤지요 쬐깐할 때 저기 가서 걸쳐서 왔다 갔다 함서 보고.
처음에 도로가 야차웠어요. 조께 올려 본 게. 옛날 사람들이 그렇다는 소리가 마을 앞 차도 소리가 거문고 소리로 들려야 마을이 발전한다 하여 방음벽을 철거 하였죠. 앞에 산도 안보고 답답해서였어요.
요 근방 사람들이, 무지등이라고 있어요. 옥녀봉 밑에가 있어요. 기우제를 지냈어요. 옥녀봉에 석간수가 나오는데 물이 안 떨어져요. 상당히 높은디 거기가 물이 계속 나와요. 기우제 지낸 걸 우리도 어렸을 때 봤으니까. 기우제는 1960년에 없어졌지. 개인적으로 시암(지하수)을 팠기 때문에.

삼각산을 밀어 만든 방축마을
▲제보자=장기환(남, 1939년생)
▲줄거리=들너머 소가 풀을 뜯을라고 앉았다 해서 놓을방(放)자 축할 축(丑)자를 써서 방죽이며 마을 앞에 몸쓸 산이 있어서 한쪽을 밀어 마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들너머 소가 풀을 뜯을라고 앉았다 해서 놓을방(放)자 축할 축(丑)자를 써서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고 어르신들이 말했어. 관작정이 먼저 마을이 있었는가 모르겄어. 안동 김가들이 방축마을에 먼저 왔었어. 관작정이 쬐까 높았어. 저수지는 그때는 없었고 일본시대에 저수지를 막았거든. 방축이 몹쓸 산이 있어서 산을 밀어버리고 독도 방지해서 치워놓고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도둑질하고 마을을 못나가고 마을을 빙빙 돌았대요. 느티나무가 네그루 있었는데 한그루가 고사했어요. 옛날에는 걸궁이 있었어요. 예전에도 당산제를 안 지냈습니다. 독거리라고 하지. 옛날에 마을사람들이 독거리 지내간다 했어요. 재앙을 막고 방재한다는 이야기여.
삼각산이 앞에 있는 놈을 이를테면 우리 마을이 교상시럽게 생겼어. 그래서 삼각산을 쬐까 깍아 버렸어. 선돌은 마을 앞에 한 개 세워있었어. 옛날 어르신들이 그 독을 어떻게 갖다놨는가 싶어. 솔챈히 커.
앞에 논에를 밤징이라고 했어. 거기 우물이 있었는디 없애버렸어. 방축전자 옆에 있는디 삼각산 있는디 고리가 기여. 밤징이 초분골. 밤징이 밑에 초분골이 있어. 관작정은 저그여. 우리 부락 시정도 관작정이라고 지었어. 지금 마을이 없어져 버리고 밭을 갈면 기왓장이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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