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10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10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06.17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홉바위

 

아홉바우 이야기
▲제보자=김보윤(남, 1944년생)
▲줄거리=아홉 바우 고개에 마방집이 있었는데 이 집에 바우 아홉 개가 있었다. 원님이 마방집 주모하고 이미 정을 통하였는데, 서울서 원님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뵈려고 왔다가 밤이 늦으니까 마방서 하룻저녁 자다가 주모하고 또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외지에 입소문이 잘못 나서 마을 지명을 두고 ‘아홉바우 갈 놈’ 이라는 나쁜 뜻으로 통하는 말이 생겨나자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았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아홉바우가 없어져버렸다.
▲이야기=담양 아홉바우 하면은 주막집 객주 여그가 담양고을 원님이 있어가지고 오면은 거기를 들리면은 그 집을 들리고 원님이 심심 허면은 내려와 가지고 마방집 주모하고 정을 통하고 했는데. 서울서 자기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뵌 지가 오래 되아서 뵐려고 왔는디 밤이 늦으니까 거그서 하룻저녁 자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주모도 원님아들인지도 모르고 그 아들도 원님하고 정을 통한 주모라는 걸 모르고. 그래서 거그서 하룻저녁 정을 품은 것. 그것이 난중에 모다 입소문이 나가지고. 그 주위에서 저 사람이 원님아들이요 한께 곁에 사람들이 소문을 퍼트려가지고 어미인데 정을 통했다 해가지고 거시기 한 것 같은데. 저희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때 당시에 생활패턴이라고 해야 할까 그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조사자 : 그런 일이 있은 것하고 아홉바우 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여기 바우가 그 집에가(마방집 안에)아홉 개가 있었어요. 근데 여기 책에는 이정표로써 우리 마을이 아홉 번째니까 아홉 개가 있다고 하는데 집내에 가서 바위가 아홉 개가 딱 나와 있어요. 마당, 부엌, 학독, 곶간, 마방, 변소 해가지고는 바위가 요러고 따로따로 해가지고 아홉 개가 있었어요.
(조사자 : 집터가 지금도 있나요?)
없어요 저 고속도로 나는 바람에 없어졌어요. 그 바람에 고속도로를 하면서 마을에서 바위 하나를 갔다가 기념으로 부락 표지석 있는데다가 세워놨었는데 (나중에) 옆으로(눕혀)놔가지고 세면해가지고 놀자리를(의자처럼)만들었어요.
아홉바우가 원래는 집터였어요. 마방집. 주막. 옛날에는 말 타고 다니는 사람은 말도 메놓고 마구간이라고 하죠. 여물도 먹이고. 사람은 자고 밥을 사먹고. 아홉바우가 있는 곳이 마방집터였죠. 집이 컸어요. 교통 중심지의 축이였어요. 그전에는 남원으로 많이 다녔어요. 그래서 여기서 자고 가고 그랬어요. 많이 다녀본 사람들은 지금 가면은 다음 여관에 가서 못가것다 해서 여기서 많이 자고 갔지요.
(조사자 : 고개이름이 있었어요?)
아홉 바우 고개라고 하지요. 국도로 되아 가지고는 마방집은 국도 가상에 바로 주막 가상집이 되아 버렸고. 옛날에는 구르마 길로 되았었는디 바우 1개는 88고속도로 공사하면서 마을입구 회관 정자나무 앉는 의자로 만들어놨어요. 세면으로 밑을 해 놔가지고 모르죠.

면앙송순과 신거무장 이야기
▲제보자=이광우(남, 1928년생)
▲줄거리=장성에 신거무 장이 있었는데 송순의 아들이 장성 현감으로 갔을 때 신거무를 죽이고 그 원한이 거미가 돼서 괴롭힘을 당해 아들 해관이 죽자 원한을 풀어주려고 아들의 시체에 매질을 하고 신거무장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장성에 신거무 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슨 일이 파삭 시작해가지고 흐지부지 말아버려. 그걸 신거무장 파하듯이 한다 그러거든. 신거무장하고 송면앙하고 연관이 있어.
아까 그 송면앙 큰아들이 장성 옆에 진원면 그 당시에는 진원현이거든 거기의 현감을 지냈어. 현감을 지내는데 그 당시에 신아무개라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 있어가꼬(흉측한 외모 때문에 거미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해서, 고약한 짓을 했다 함) 현감들이 가면은 성가셔.
여간 괴롭게 해. 현감으로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 그러니까 송면앙의 큰아들이 진원현감으로 갔어. 가서는 버릇을 고친다 하여 갔는데 신아무개가 어찌나 말을 안듣고 고약하게 굴었던지 잡아다가 곤장으로 때렸든가벼. 곤장을 과하게 때렸든가 죽어버렸어.
신아무개가 죽었는데 원귀가 되어가지고 거무가 되았다고 그래. 그래서 신거무라는 말이 나왔다는데. 이 사람이 거미가 되아가꼬는 현감(송순의 큰아들)을 괴롭혀서 죽었어. 그 소식을 듣고 면앙이 그 당시 면앙정이라고 관직을 그만두고 면앙정에서 쉬고 있을 때인데 면앙 선생이 생각 해 본게 아무래도 이 신거미를 달개야 할 것 같아 그 귀신을 원귀가 되아가꼬 그런디.
이놈을 달개야 쓰겄다는 생각이 들어서 옛날에는 다 걸어 다녔으니까 진원서 생여(상여)를 메고 요리와. 송순선생은 면앙정에 계시고 그런데 생여가 저만치오는걸 보니까 면앙의 눈에만 보이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제. 상여 우게 가서 시커멓게 거미가 붙어가꼬 춤을 추면서 따라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보여도 송면앙의 눈에만 보이드라는 것이여.
그래서 이웃사람을 시켜가지고 매를 한 다발 꺽어 가지고 오라고 했어.
상여가 면앙정에 도착을 하니까. 면앙이 그 거무를 달래기 위해서. 상여에서 시체(송순 큰아들)를 끄집어냈어. 그래서 거미 앞에서(시체를)매를 때리면서 하는 말이.
“이 나쁜 놈의 자식 애비 말을 안 듣는 너는 불효자식이다. 니가 진원현감을 갈 적에 내가 뭐라고 하더냐. 심아무개를 잘 달개서 잘 모시하고 않더냐. 니가 애비 말을 안 듣고 그 사람을 괴롭게 해서 죽었어. 얼마나 원통 하겄냐.”
하면서 죽은 송장을 사정없이 매를 때렸어. (부모 앞서 간 불효와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데 대한 벌이었다.)그러니까 그때 거미가 한이 좀 풀렸던가. “대감 이제 됐습니다. 제 한이 이제 풀어졌는데.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은 고향에다가 장을 하나 세워주시오.”
그래서 “그래라. 그렇게 하마.”
그 당시 송면앙의 권리로는 안 되는 게 없지. 감사까지 지낸 분인데. 그래서 진원면에다가 장을 세웠다는 것이여. 장을 만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장이 스며는 제일 늦게 가는 사람이 하나가 죽어. 그렁께 서로 안 남을라고. 마지막 가면 죽으니까. 얼릉 왔다가 가버려. 파삭 시작을 했다가 흐지부지 없어져버려. ‘신거무장 파하듯 한다.’는 말이 이 근방에 있어. 시방은 진원장이 없어졌다고 그래.

조리터 형국 송산마을
▲제보자=김보윤(남, 1944년생)
▲줄거리=마을이 터가 쌀을 이는 조리터라 재산이 차면은 엎어져버렸는데 마을 앞에 고속도로가 생겨가지고 이제는 재물이 안 흘러간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무정면 오봉리 티미봉이라는 산에 가서 이조시대에 담양골 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원님이 저희 부락에 마방집이 지금 같으면 여관이지. 옛날에는 말도 재우고 사람도 자고 하는 마방집이 있는디. 내가 알기로는 경주 김씨가 살았는가 어쨌는가. 그전부터 산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집을 사서 들어왔으니까. 그전부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여기가 배맷등이란 말입니다. 배를 맸던 자리라고. 옛날에 여기가 바다였어요. 영산포 맹키로 바다였어요. 그러니까 여그 매맨자린데 지금도 거시기를 함서 보면은 농사일을 함서 파보면은 뻘이 나오고 조개껍딱이 나오고 한걸 보면 여그가 배맷등이 맞는 거에요. 근디 인자 김해김씨가 1820년에 왔다는데 그 손들이 살고 있제. 금정 김씨도 있고 경주 김씨도 있고. 나중에 온 사람들이고.
(조사자 : 송산마을 이름 유래가 어떻게 될까요?)
그전에는 구암이라고 했는데 거북 구(龜)자 바위 암(巖)자를 써서 구암이라고 했어요. 구암이라고 해서 아홉바우다 해서 구암이라는 말이 있고. 송산이라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제가 알기로는 개명을 한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자기 일본 한문으로 써있거든요. 솔 송(松)자 산 산(山)자를 써서 송산마을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저희 마을이 터가 쌀을 이는 조리터라고 합니다. 조리에 쌀이 하나 차면 이렇게 붓습니까. 긍디 지금 저희 부락이 조리터가 맞았어요. 이 앞에 고속도로가 생겨가꼬 이제는 재물이 안 흘러간다 이 말이요. 그전에는 농사도 짓고 이래가지고 했는데 지금은 하우스도 없고 아무것도 안하는데 아들들이 다 잘 먹고 사로. 재산이 차면은 엎어벌고 엎어벌고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러니까. 고속도로가 없었을때는 예전에 봉산면 삼지리 와우리까지 쭉 그냥 내려가 버려. 지금은 인자 고속도로가 막아 버린 게 돈이 안 빠져 나간다. 이것은 저도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었어요.

죽림마을 판소리꾼 용인득
▲제보자=이진채(남, 1934년생)
▲줄거리=판소리꾼으로 담양에서 유명한 용인득씨가 노래하다가 자식도 없고 문하생도 없고 후계자가 없어 안타깝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용인득 씨라고 판소리를 잘했어요. 공연한데서 초청을 하면 가가꼬 하고 했어요. 자기 혼자 다녔데요. 저도 봤으니까요. 판소리꾼으로 담양에서 유명했어요. 이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봤습니다. 살아계시면 대략 110세로 추정합니다. 후계자가 있어야 되는디···.가족도 아무도 없고 노래하다가 아그들도 없고 문하생도 없고. 집터는 저기 있기는 해요 다른 사람(현재 김태식씨)이 살지요.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9번지
  • 대표전화 : 061-381-1580
  • 기사제보 : 061-382-4321
  • 인쇄물,기념품,광고문의 : 061-381-3883
  • 팩스 : 061-383-211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근
  • 법인명 : 담양군민신문
  • 제호 : 담양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232호
  • 등록일 : 2006-9-14
  • 발행일 : 2006-9-14
  • 발행인/편집인 : 최광원
  • 담양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담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dy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