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2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2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7.0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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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마을 정기동 효열비
증암철교

 

마산마을 지명유래
▲제보자=이경주(남, 1929년생)
▲줄거리=마산 마을뒷산이 꼭 말 안장처럼 생겼는데 그 말이 증암강에다 입을 대고 물을 먹는 형국이라 전체적으로 마산마을은 갈마음수형 명당터라는 이야기이다.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석과 입향조 전주이씨가 심은 당산목 팽나무가 있다.
▲이야기=남원 둔덕이 전북 문화재 마을이거든, 그때 왕이 하사한 사필한 동네요. 여기 온지가 400년 되아. 유산리는 삭녕최씨가 들어오고 마산은 전주 이씨가 들어오고. 남원 둔덕에서 같이 왔어. 그 다음에는 전북 순창에서 고령신씨가 왔어.
마산 마을 뒷산이 꼭 말 안장처럼 생겼어. 근디 그 말이 이 증암강에다가 입을 대고 물을 먹어.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그런디 그 말 안장터가 마산마을이여. 지금도 그 말 표시가 있어.
(바우가)바우모퉁이에 가서 하나 있고. 그것은 우리 논 독박이라고 해서 우리 논에 세워놨어. 마산리 들어가는데 독바위, 남쪽은 여석, 북쪽은 남석이라고 해서 세워놨어. 얼릉 말을 하자면 수호신으로 봐야 혀. 수호석으로 봐야지.
당산목에 있는 것은 400년은 되았어. 저기는 유산리는 삭녕최씨 육일당이 심은 거고. 마산리는 당산목이 팽나무인데 우리(전주이씨)10대조 할아버지가 심은 거여. 그것은 기념식수여. 노목으로서 고사했어.
마산리 뒷산에 가면 부엉이골이 있고, 서당골이 있고, 도독골이 있고. 서당골 도독골이 별도로 있어. 도독골은 의병 때 임시 병령만으로 일개 대대가 있었어. 임진왜란 때 그래서 거기가 의병대장이 도독 아닌가. 도독이 벼슬이름이여. 여기 뱀골도 병골이여 원래는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이 병골을 잘못 듣고는 뱀골, 뱀골하고 부르지. 근디 유산리도 유산촌, 유산촌하지.
여그가 광주에서 담양까지 담양에서 남원까지 철도를 놓을려고 순창까지 길을 내 놓고(증암철도)담양까지는 해방을 못 새고(철이 부족해서)뜯어갔어. 철로를 뜯어가지고 보름 만에 해방되었어 쓰도 못하고 철로를 뜯어다가 부산가 있다 혀. 써먹도 못하고 뜯기고 15일 만에 해방되었어. 그걸 안 뜯었으면 지금 열자가 다닐 텐데.

마산마을 하마비와 인화비
▲제보자=이경주(남, 1929년생)
▲줄거리=유산마을 모퉁이에는 하마비가 있고, 마산마을 회관 앞에는 인화비가 있어서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이야기=하마비는 유산리에 모퉁이가 하마비가 써있어. 거기는 내릴 적에 병골도 있었는가. 양반네 사는데는 상놈(서민)들은 못가니까. 반듯이 말에서 내려서 하마를 하고 말을 끄꼬 갔어. 그래서 상놈들은 말에서 내려서 말을 끌고 지나가라는 비석이 하마비여. 하마라는 말을 말에서 내린다는 말이여. 양반들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마산리에 회관 앞에가 인화비가 있어. 화목하게 산다고 해서 단합비여. 광산김씨 향산 김권수씨의 글자여. 인화라는 두 글자를 세워서 지금도 현존하고 있어.

양지마을 유래
▲제보자=정진흥(남, 1937년생)
▲줄거리=양지마을은 평산신씨가 입촌하여 동래정씨와 순흥 안씨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여러성받이가 함께 살고 있고, 마을산인 소락산이 소가 일어나는 형국이라고 한다.
▲이야기=성씨가 여기가 평산신씨가 왔다고 했는데···. 동래정씨하고 순흥안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았는데··· 지금은 여덟 개 성씨가 살아. 성이 많이 있더라고.
소락산은 소가 일어나고 그런다고 비에다가 써있는데···, 여기가 있거든. 소락산은 여기서 보면 남쪽 보름날에 가면 제도 지내고 그러더라고. 요교 요 강정등이라는 것은 강정이라는 산이 냇가 쪽으로 있어. 마을 오른쪽 들어오는 산이여.
개내는 저짝 동쪽에 밭하고 있었는디 논 되아 버렸어. 궁개들에 뱀이 많았어.
(강정 남쪽에)요거이 소락산이여. 지금도 소락산이라고 하지 딴말은 없어.
저기 월전 양지리1구, 2구, 3구가 있는데 가운데가 옛날에 요만한 연못같이 있어. 그 금방을 통까상이라고 그래. 지금도 통까상이라고 그래 산 밑에 쪽으로. 제방 만들기 전에 제방이 이렇게 컸지. 지금은 정비가 되았는디 예전에는 이렇게 되아 있었지. 퉁수방천 이라고 말했지. 한마디로 둑이지.
팟박지기는 여기 산을 말해. 여기 와우리하고 경계를 황정목이라고 그래. 와우리인게 소가 누웠다는 뜻이겠지.

양지마을 효열비와 강학비
▲제보자=정진흥(남, 1937년생)
▲줄거리=제보자의 고조부가 효성이 지극해서 부모가 학질로 아프자 허벅지살을 떼 준 효자를 기념하여 동래정씨 집안에서 효열비를 세웠으며, 동래정씨 집안에 마을에서 한문을 가르치신 분의 뜻을 기념하여 강학비도 세웠다고 한다.
▲이야기=여기 보면 비석 세워놨더라고. 효자비라고 우리 집안 분인디. 옛날에 효도를 했는 갑데. 고것이(후원재)제실이여. 동래정씨 제실. 음력으로 10월 20일 21일 시제를 모시고 광주·전남종친회 회원들 초청을 했어. 효자비도 하고 제실에서도 중앙신문에도 나오고 했어. 효자비는 오래 되았지. 우리 집안 나로써는 고조부님이여. 묘는 광주 각하동서 선산이 있어서 거그서 관리인이 있어. 효성이 지극해서 비를 세운 거여. 부모가(학질로)아파서 허벅지살을 떼 준 사람이지. 호열재인가 무서운 병이더라고. 지금 사람들은 다 모르더라고요.
안씨들 열녀비도 있어. 그리고 강학비도 있고. 동래정씨 인디. 그 양반이 여기 어렸을 때 나서 살았어. 여기서 할아버지가 어렸을적에 한문도 가르치고 그랬는갑데.

유산마을 유래
▲제보자=김용순(남, 1937년생)
▲줄거리=다리 쪽에 버드나무가 있어 유산리라 했는데 지금은 죽고 없다. 당산나무 한 번에 잎이 피면 비가 많고 물이 많아서 풍년이 들고. 밑에서부터 위로 피면 물이 적다고 흉년이 든단 말이 있다.
▲이야기=창강리 쪽이 먼저 됐다도만요. 삭녕최씨가 들어왔어요. 과거에 정씨하고 최씨하고 양씨하고 세 성이 살았어요. 내가 이사 와서 보니까 양씨는 서너 닙 살더만 최씨가 자자유촌하고 그런데 지금은 최씨는 없다시피 하고 정씨가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 양씨가 들어오고
버드나무가 저그 다리 있는데가 있다 혀. 그래서 버들 유(柳)자 유산리라고 한다.
(조사자 : 그 나무가 당산나무에요?)
아니요. 버드나무. 과거에 다리 쪽에 있었어요. 오래 돼서 인자 죽어버렸지. 시정 이름이 양산촌이라고 되어 있어요. 원래 마을이 위쪽에 있었는데 도둑이 많아서 아래쪽으로 내려왔답디다. 당산나무는 없어져 버렸어요 당산제도 안 지냈고 여기도 지내다가 말아버리고. 옛날에는 지냈지요.
(조사자 : 옛날에 어르신들이 당산나무 잎을 보고 한해 농사 점을 쳤다던데요?)
지금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당산나무 한 번에 잎이 피면 비가 많고 물이 많아서 풍년이 들고. 밑에서부터 위로 피면 물이 적다고 흉년이 든단 말이 나오더만요.
현재 세 나무 인가 있지. 나머지는 죽어버리고 불나버리고 고목 되아가지고 죽어불고···.
유산교는 일제 강점기에 말들어졌지. 유산교 철로를 합해서 쌍교인데 지금은 삼교지 세다리
21가족 계 세운비가 여기 가면 있어요. 창평 해곡리하고 유산리하고 숫자가 비슷할 거요.

무량터 이야기
▲제보자=김보윤(남, 1944년생)
▲줄거리=무량터라는 저수지 골짝이 애들이 죽으면 묻던 곳인데, 6·25 때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곳이고 익사 사고도 있었다. 숲도 우거지고 여시 같은 짐승도 잘 나타나 무서운 곳이었다.
▲이야기=발전소 있는데 창평서 들어와 가지고 오른쪽에 보면은 골짝이었어요. 조그마하니 개인이 둠벙을 만들어서 요것이 우리 부락의 안 좋은 이야기여.
여기 저수지서 쏴 죽여서 6·25때 그건 저도 알고···.무량터 작물터 거그가 아주 골짝이라 무사가꼬 못가. 전부 애들 죽으며는 시집을 안가서 죽은 애들은 모두 거기 길가에다가 묻고 그랬어요. 거기를 전부다 무서워서 안다녀. 창평이나 요 근방에서 총각이나 애기들이 죽으면은 작물터, 무량터 길가테다가 묻었죠. 작물터는 축협 퇴비공장이 들어왔죠. 남부 신한기업도 무량터고. 축협에서 재 넘으면 바로 신한 기업 있는 데가 나오죠.
저수지 뚝에서 학살을 당했제 엄청 깊었어 저수지에 사람이 잘 빠져 죽었어. 익사 사고도 2번 있었어요 첨에 어린애 죽은 데는 깊었어요. 큰 애기 죽은 것은 지금보다는 깊었지.
옛날에는 솔찬이 숲도 우거지고 산골짝이면서도 짐승이 잘 나타났죠. 우리 어려서만 해도 늑대 여시가 있었는디. 내가 어려서만 해도 여우가 어린애들 뫼 파버리고 그러거든. 그런 것은 내가 어려서 실지로 봤어요. 그런 자리를 보고 거시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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