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3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3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7.1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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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농악

와우마을 형성과 지명유래
▲제보자=이현민(남, 1942년생)
▲줄거리=와우리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와우리라고 했다하며 마을에 항정목, 황소구렁이터, 소구시 등 관련 지명들이 있다.
▲이야기=한 500년 서씨가 개척을 했다고 해요. 지금은 현재 서씨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고 고씨는 8집이 살아요. 화순 능주에서 왔지요. 능성구씨가 화순 능주에서 왔고. 여기는 자자유촌보다는 여러 타성들이 삽니다. 광산김씨도 있고 김동언씨가 제 큰동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와 와(瓦)자를 써서 와우리라고 했다가. 와우리라고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와우리라고 했다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그 이야기는 문헌에는 없어요. 와우리가 첨부터 생겼다고 봐야죠.
느티나무가 이 앞에 있는 것은 관리를 잘못해서 원래는 죽어버리고 없고 마을 뒤쪽에 큰 느티나무가 있고 그런디 뒤쪽은 250년 되고 500년 된거는 뒤에 죽어가지고 있어. 형태만 남아있어.
항정목이라고 있어. 목항(項)자라고 해. 양지리 넘어간 디를 항정목이라고 있는가. 저그 입구 대밭 양지마을 가운데서 와우리로 넘어온 디가 항정목이여. 항정목의 소목이여. 여그가 황소 구렁이터지. 그전부터 황소구렁이라고 그래요. 지금은 지역이 메우고 파버려서 달라졌지만은 방천뫼는 항정목에서 대밭이 쭉 둘러가지고 여기 까지 돌아가. 그걸 가지고 백호라고 그러고 우리 마을을 좌청룡 우백호라고 그래요. 방천뫼는 바로 여기 뒷산이지. 방천뫼라는 지명이 있어. 황소구렁이 마을에서 보면은 오른쪽에 있고 방천뫼는 왼쪽에 있고. 연동마을 앞에 들시암이 소구시. 들판가운데 연못을 소구시로 봤다고 그전에 어른들이 그랬어요.
마을 입구에 (입석이) 있어요. 독이 선풍기 만하게 액맥이 독이라고 그 독을 가지고 회관 옆에다가 놔뒀던가 그런디 어느새 없어져 버렸어. 하나는 마을 꽃밭에 세워놨거든.
최장영 공덕비는 요 마을 앞에 있지. 최장영씨는 송덕비고, 구남림 공적비도 마을 앞에 나란히 서 있당게. 구남림씨가 도 과장을 했어. 겨울에 김장할 때 여기를 오셔가꼬 김장 한디를 따라갔던가 그래서 봤다 혀. 추운디 냇가상을 우리 동민들이 건너는 걸 보고 돈을 알선 해다가 다리를 놔주셨어. 그런게 얼마나 고마웠다고 우리 마을 전답이 다 삼지리 앞에가 있었는디.
군의회 의장을 했는디 그 양반 할머니여. 최성길 증조모여. 증조모가 이강문이라고 지금 현재도 잘 보존이 되어 있어. 이름이 열녀각이여. 그때 사차선도로가 날 때 옮겨줬어. 확실한 것은 잘은 모른데. 정조를 지키고 최성길이 할아버지 하나를 키우면서 젊어서 애를 쓰셨는갑도만 그래서 난중에 최성길이 할아버지가 자기 어머니를 기린다고···그때 어마어마한 돈이여. 최병오씨가 열녀각을 세웠지.

와우마을 천제와 농악 전통
▲제보자=이현민(남, 1942년생)
▲줄거리=와우마을은 농악전통이 강한 마을이어서 해마다 정월대보름 전날 천제를 지냈는데 박정희 정권 때 미신이라고 금해서 1961년부터 그쳤고,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동언의 주도로 지금은 마을의 안녕을 위한 샘굿을 치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농악놀이는 계속 쳤죠. 양지리도 농악이 심했제. 양지리도 장구재비 정진만씨가 상쇄는 정진갑씨가 하고 그 양반들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어. 그래서 요 금방은 다 불려 다녔지. 김동언씨는 김오채 선생이라고 그분한테 배웠지.
때가 되면 백중이나 추석이랄지 자기 동네에서 치다가 와우리로 넘어와서 치고. 지금도 하제. 때는 농악을 침으로서 집집마다 돌아대님서 그해 그 집안에 행운이 돌아오기를 빌고 무병장수 하라고 집집마다 돌아감서 쳐주면 그 집에서 술밥을 내놓고 그 전에는 먹는게 아쉬울 때 아니었더라고 그러면 그 집서 점심때 닭 한 마리 잡아서 죽을 쒀서 먹으면 동네 사람들이 같이 나눠먹는 그게 농경사회 미풍양속으로 전해졌제.
천지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대보름날이 아니여. 14일날 저녁이여 음력으로 열 나흗날 15일날 대보름 아니여, 열 나흘날 마을에서 십시일반 제 준비를 혀. 어떤 사람이 재관을 하냐면 깨끗하니 자식들도 많들 않고 정결하고 정직한 사람. 마을에서도 저분이 여튼 마을에서 인정을 하는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 그 간에다가 맡겨. 그게 문제가 있는 게 뭐냐면 외출도 삼가고 내외간에는 삼가고. 이 앞에 보면 서낭당이라고 있거든요. 그럼 그 꽁대기가지 올라가 제물을 짊어지고 올라가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이 핑야 60년대 초에 국가에서 못 허게 해가지고 안 해버렸어. 했으면 시방까지 이어졌을랑가 몰라. 60년대 초에 국가시책으로 미신이라고 언급을 해버려서 국가 시책으로 중단되아버렸어.
300년이 넘게 내려온 건데 안한다고. 박종기시는 집안가닌데 이장을 안했어. 농악팀은 김동언씨가 주로 많이 동네 시암굿 같은 거 동네서 일부로 안녕을 위해서 쳐주고. 이장이 적극 지원을 해주고 지금도 매년 치고 있습니다.

반월마을 전경

반월마을 해방촌
▲제보자=이화언(남, 1945년생)
▲줄거리=해방 이후 일본에 강제 징용 갔던 사람들이 고향 찾아 돌아오자 올 때 갈 때 없는 사람들을 기거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줘서 생긴 해방촌이 반월마을이다.
▲이야기=1945년 해방 이후 일본에 강제 징용 갔던 사람들이 고향 찾아 돌아오는 데 올 때 갈 때 없는 사람들을 그때 면장이 봉산면으로 들어온 사람을 기거할 수 있는 곳을 이 마을에 만들어 줬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이 기거 하고 있다가 여기서 잠자는 곳은 해결이 됐지만 벌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그 사람들은 다 여기를 떴어. 일차로 여기를 다 떴어. 땅을 희사하신 분이 있는 분이 담양에 국씨 집안 이었다도만 방 한 칸에 부엌은 공동으로 사용 할 수 있게 해줬지. 그때 당시 면장은 이남구씨고. 이것은 마을이 창촌된 연혁이여. 그런데 인자 그분이 가정이 거시기 해졌는가 국가에 다시 사가라 했나봐. 그래서 국가에서 땅을 사가지고 있다가 그 사람들이 집을 비우고 나가면 담양에 정말로 집한 채 돈도 없는 사람들이 그 집을 사서 들어 온거야. 임대주택 주드끼 저렴하게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지.
가지각색으로 모여서 담양에 싼데 있으면 사는 식으로 살다가 또 다 나가고 거기서 돈 번 사람들은 그냥 살고 그런 식이여 그래서 우리 마을이 좀 가난해. 예초에 있던 분들은 한 분도 없고 나는 인자 마을에 처음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고 수북 주평리서 살다가 광주서 직장 생활하다가 봉산면서 사업을 할려고 들어왔지. 식당을 했어. 식당을 그만두고 팔고 이 마을에서 살게 됐지. 반월마을은 해방촌이라고 해. 해방촌이라고 해. 해방촌으로 된 데가 수북면에도 한군데가 있는 갑도만. 원래는 이집들이 양쪽에 방 한 칸 씩 부엌을 공동으로 쓰게끔 져줬데. 그 뒤로 반월 마을이 적으니까 연산 마을 탄금마을 고리 인자 행정 쪽으로 속해 있다가 1980년에 분리를 해서 살게 되었어. 해방촌일 때는 17호 정도 되았지. 지금은 26호까지 되었어.


김삿갓의 죽시 이야기
▲제보자=이화언(남, 1945년생)
▲줄거리=김삿갓이 화순 동복에 지내면서 담양읍 국씨 집안에 세 번을 다녀갔다. 죽시라는 것은 다른데 보다는 담양에서 지은 것 같다. 옛날에는 아홉 바우를 지나가 담양을 갔는데 김삿갓이 담양을 가다 쉬어가다가 그때 당시에 반월 옆으로 대밭이었는데 쉬어가면서 대나무를 보고 지은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담양 국씨 집안에 조대 교수님이 그 이야기를 해줘가지고 국씨 집안에 이조 말 때 시집을 가신분이 있어. 그때 김삿갓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경상남도 어디서 초당선생을 하다가 전라도를 갈라고 내려 오는디 화순 동복을 지나가다가 아파가지고 쓰러져 있는디 동복에서 지나가던 마을 사람 한분이 김삿갓인지는 모르고 아퍼서 있으니까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전부 치료를 해줘서 완쾌가 되았어. 그래서 그 분 집에서 삼년간을 거처를 했도만. 그러면서 김삿갓이 지팡이가 대나무 지팡이여. 삿갓을 썼지. 다 대로 하는것이여. 담뱃대도 다 대로 만든 것이고. 대나무하고 인연이 깊어서 인지 담양에 세 번을 국씨 집안을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국씨 집안에서 나온 거거든
그래서 내가 담양 동복에서 국씨 집안을 가는데 우리 마을 옆을 지나게 되아서 그때 당시에는 반월 마을이 없었어. 우리는 해방 이후에 생긴마을이라. 옛날에는 아홉 바우를 지나가 담양을 갔잖아. 김삿갓이 담양을 가다 우리 동네서 쉬어가다가 그때 당시에 우리 동네 옆으로 대밭이었데. 근데 여그서 쉬어가면서 대나무를 보고 죽시 대나무로 지은 시는 딱 한편이여. 어디서 어떻게 지었다는 걸을 찾아보는데 그것을 못 찾아. 그래서 내가 죽이라는 것은 다른데; 보다는 담양에서 지은 것 같다 이 말이여. 그래서 담양을 다니면서 뭔 시를 지어도 이 김삿갓이 어느 서당에서 짓는다든지 누구 뭐시기를 보면 어디서 어떻게 지었네가 관계가 되어서 다 적어져 있는데 죽시만큼은 그것이 없어. 그래서 여그서 앉아서 휴식을 하면서 주위 경치를 보면서 지은 시다. 인자 그렇게 내가 생각을 한 거여. 그 시가 뭐이냐 그러면 요것이 죽시거든.
근데 인자 내가 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도자기를 했어. 금호고등학교 행정실서 근무를 했는데 대나무 연 같은 거 하고 도자기도 하고 도자기를 할 때 우리 친 할아버지가 초대 국세청장을 하신분이여. 광주에서는 원로로 지내면서 지내신 분인데 그 할아버지가 운연이라는 호를 지어 줬는데 이 마을에 와서 구름운자 베풀 연자를 써서 지어 졌지. 내가 성질이 빠닥 빠닥해서 불의를 보면 못 참아. 한때 군수하고도 일 년 간을 쌈을 하고 그랬다니까. 잘못하면 껀껀이 다 말을 하지 그래서 그런 것을 지나고 보니까 김삿갓이 죽시를 우리 마을에서 지으면서 다음 세대에 이 시를 보고 거울삼아 살으라고 나를 위해 지은 시 같다. 그래서 김삿갓 시인에 대해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해줬어.
그래서 더욱 관심을 쏟고 이 마을에서 김삿갓이 죽시를 지음이 틀림이 없다. 생각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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