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4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4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0.07.2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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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방연과 신평마을 전경

 

월전마을 형성과 지명유래
▲제보자=김재길(남, 1940년생)
▲줄거리=월전 마을은 독소골과 새터 두 마을이 합해진 마을로 뒷산이 달과 같이 둥그래서 월전마을이라 불렀다. 독소굴에는 독립운동가 송홍진씨가 이름 있고, 새터에는 주민들 공력이 많이 들어간 월전저수지가 있다.
▲이야기=그전에는 새터라고도 불리었고 지금은 양지리 2구 월전마을이여. 조선시대에 안씨와 정씨가 먼저 들어왔지. 지금은 범씨, 김해김씨들 있고, 경주김씨도 있고, 송씨도 있고···.
송흥진씨라고 교회 장로를 하셔가꼬, 독서굴(독소골)이라고 거기 합해서 월전이여. 거기로 원래 오시기를 오셔서 독립운동도 하고. 여기가 쇠테. 저그 우게가 독소굴. 쇠테하고 독소굴을 합해서 월전이라고 했어.
방천(월전저수지)을 밀가루 방천이라고 하거든 거기를 막았지. 말하자면 비가 많이 오면은 큰물이 져. 밀가루를 줘가지고 막았지. 월전 저수지 바로 우게가 말하자면 굴이 있거든. 광주댐을 막아가지고 그 굴을 많이 만들었어. 광주댐 물이 고리 흘러 내려가게. 근데 굴이 생겨버렸어. 광주댐 수로가 굴이 된 격이지. 수로를 낼라고 굴을 뚫었지. 그 굴에 물이 내려온디 이 물이 광주 생룡동까지 물이 나가. 일종의 수로지. 근데 산을 뚫었으니까 굴이제.
여기 뒷산이 말하자면 달과 같이 뚱그래. 그래서 달월(月)자 밭전(田)자를 써서 월전이야.

신평 마을 형성과 지명유래
▲제보자=신대섭(남, 1943년생)
▲줄거리=신평마을은 연방죽이 있어 방화동이라 불렀다가 양반들이 산다고 댁리로 불리다가, 삐비는 해마다 새로 난다 해서 삐비신(新) 평평(平)을 써서 신평마을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이야기=연방죽이 화방이라고 해.(방화동이라 불렀었다)신가들이, 송씨들이 폐하고 나서, 나로써는 고조부할아버지가 무주로 갔다가 와가꼬 수북면 나산리로 가서 큰물이 지고해서 애기들이 무섭다고 한 게 여기 터를 잡았제.
우리 평산 신가들이 고조부 할아버지가 터를 잡아가지고 지금은 한 20가호 사는데 지금은 송씨는 없고 다른 성받이가 많이 살제
모괴나무거리라고 방앗간이 봉학으로 넘어가는 길에 외딴집이 있었는디 거기를 어른들이 방화동이라고 그려. 신평마을은 댁리였어. 집 댁(宅)자 댁리. 댁마을 산 양반 행실 허고 댁리라고 했다. 그래가꼬 삐비는 새로난다 해년마다 간다고 해서 새 신(新) 평 평(平)을 썼지.

봉학 형국과 부업쟁이 이야기
▲제보자=추서영(남, 1941년생)
▲줄거리=뒷산이 봉학이 새끼를 낳을려고 알을 품고 있는 형이라 봉학이라 했으며, 예전에는 와우리가 소 형국이고 봉학이 쇠 죽 써 준 부업쟁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이 근방서 우리 마을 생긴 지는 모른다 혀. 처음에는 담양전씨가 살았다혀. 현풍곽씨는 하나도 없고 전주이씨, 김해김씨, 추성최씨 등···.
학같이 생겼다 혀. 마을 뒷산이 봉학처럼 양쪽 날개도 있고 봉학이 새끼를 낳을라고 알을 품고 있다고.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디 소나무가 없어져 버렸어.
저 아래가 천석굴이여. 땅이 좋아서 천석의 나락이 난다고 해서 천석굴이라고 했다 혀. 저기 봉학을 부업리라고 하지. 원래가 부업리라고 불러왔죠. 옛날에 부업쟁이여. 예전 분들은 봉학리를 부업쟁이라고 불렀어. 옛날 선고 때 이름이 부업쟁이여. 옛날에 와 부업리냐면은 와우리가 소 형국이고, 그 안에 가서 인자 본께 뭐이냐 신평리 앞에 아따 가루방천 있는디. 그래서 이가 부섶쟁이라고 쇠죽 써 준 부업쟁이라 혀. 글고 천석굴은 뭐이냐면 하천밭이라 해서 천석굴이라고 그랬고···.

관과정과 봉남제
▲제보자=추서영(남, 1941년생)
▲줄거리=마을 앞에 나락이 익으면 그 모습이 보기 좋다 해서 마을 모정이름을 관과정이라고 지었고 김해김씨 제각 봉남제는 좋은 샘물이 지금도 나는 곳이라 한다.
▲이야기=여기 시정이 관과정이여 이 앞에 써 있어. 나락을 본 정이라는 말이여. 놀라고 그러지. 주로 들에서 일하고 온 사람들이 쉬지요. 우리 마을에 박씨가 몇 집 살았어요. 박국현씨라고 그 분네가 관과정이라고 지었다. 왜 그랬냐면은 이 마을이 시정이 없었는데  시장을 지으면서 상량 글씨에다가 그 분이 관과정이라고 들판이 다 낡이라. 지금인게 항수가 신게 그러제. 예산ㄹ에는 나락이 누런히 익어가꼬 너울너물 해. 들에서 요리 마을로 들여온다 해가꼬 소쿠리 띠다 해가꼬 마을 앞에 터 있는 디를 마을에서 걷어 드린다 해 이 마을에 그런 유래가 있다.
이겨서 보면 대전면, 창평면, 수북면, 장성 진원면까지 담양 평야 8할이 다 보여.
봄남제는 저기 우게 제각이여. 김해김씨의 제각. 여기 샘물이 담양군서 일등이였어. 이 말을에 공돔생이 무지 좋아. 우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항상 그대로 쓰지 않고 상수도가 들어 왔어. 지금도 올라가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고. 우리 마을에 와서 물도 많이 떠가고 시방도 물이 그대로 나가. 비가 오나 가무나 샘이 다 있어.

삼지리 형성과 유래
▲제보자=김형기(남, 1941년생)
▲줄거리=삼지리는 동네 앞에 섬이 3개가 있어서 삼도천이라고 했으며, 추마실서 신흥리로, 신흥리서 삼지리로 세 번 옮겨서 삼지리라고 한다.
▲이야기=옥천 조씨가 순창에서 왔어요. 지금은 한분도 안계셔요. 광산김씨가 화순서 왔고. 그다음에 금영김씨가 순창에서 왔고, 전주이씨가 창평에서 왔어요.
옛날에 동네 앞에 섬이 3개가 있었어요. 섬이 3개가 있어서 삼도천이라고 했어요. 경지정리 함서 다 없어져 버렸어요. 마을이 추마실서 누에를 키우고 그랬는데 뱀이 많아가지고 신흥리로 왔는데 도둑이 많아서 그 다음에 삼지리로 왔어요. 처음에는 삼도리라고 했어요. 촌말로는 삼도천이라고도 했지요.

물난리에도 인명피해 없는 배터 마을
▲제보자=김형기(남, 1941년생)
▲줄거리=비 오면 와우리 사람들이 집에서 삼지리를 보면 물위에 꼬막을 얹혀 놓은 것처럼 보인다지만, 삼지리는 물이 서서히 들어왔다가 나가서 배를 띄울 수 있는 배 터라 집만 침수가 되지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옛날에는 여기가 저지대라 제방도 없고 가제방으로 있어놔서 물난리나면 지붕위에 올라가고, 곡정리도 삼지리 때문에 물이 거기까지 안가. 여기가 앞으로는 증암천이고 뒤쪽은 영산강물이 합쳐지기 때문에 비오면 와우리 사람들이 집에서 삼지리를 보면 물위에 꼬막을 얹혀 놓은 것처럼 보인데요.
와우리가 높아서 아래쪽을 보니깐 그래요. 그렇게 홍수가 나도 삼지리는 물이 서서히 들어왔다가 나가고 하니까 집만 침수가 되았지.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홍수로는 인명 피해는 없었어요. 물 건너가다가 죽고 목욕하다가 죽고 하지. 여기가 배터라고 해요. 물이 잔잔해서 배를 띄울 수 있다고.

삼도 위자계
▲제보자=김형기(남, 1941년생)
▲줄거리=어머니만 계신 분들 아들로써 구성이 된 유자계가 있었는데 김만기씨가 논을 기증해서 모친을 위해서 비를 세워서 지금도 마을에 그 뜻이 전하고 있다.
▲이야기=개인 위친계라고 해가지고 자기 어머니만 계신 분들 아들로써 구성이 되어 있어요. 위자계라고 해. 어머니 중심이라 유자라고. 모친을 위해서 비를 세워서 지금도 있어. 김만기 씨가 논을 3평인가 기증해서 거기가 세웠는데 길 나는 통에 옮겼지. 그 후에는 여기 옆으로 옮겼어. 다 이사 가불고···. 지금은 장례식장에 있응게 그러지만은 옛날에는 집에서 초상을 치렀잖아요. 그러면 계원들이 부고도 돌려야 되고 상여도 메야 된 게 위친계예요. 그때는 부고장을 부락에 돌아다님서 주고···.


부자마을 강정모퉁이 이야기
▲ 제보자 이승진(남, 1932년생)
▲ 줄거리 강정모퉁이에 말바우와 소바우가 있는데, 성산보를 만들면서 소바우는 훼손되었지만 말바우는 수구맥이라 마을사람들이 지켜내서 부자들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내가 살고 있는 강정모퉁이에 말바우와 소바우가 있어요. 말바우는 위에가 있고 소바우는 밑에가 있는데 왜정 때 성산보를 만들면서 소바우를 깨부렀어요. 정 구녕이 그대로 있어요.
말바우는 지켜 냈어요. 여기를 수구맥(물구멍)이라고 하는데 재물이 다른 곳으로 못 가게 막아주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지켜냈지요.
말바위 밑에 연못 소가 있었는데 명주실 한꾸러미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그래요. 이곳 강정모퉁이에 서부자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기민(유랑민)에게 천석을 내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집 뒷집도 부자였는데 고경석이의 할아버지가 살았어요. 그 집안은 지금도 부자입니다.  그 서부자 집터는 속선속패의 형국이라고 하는데 빨리 부자가 되고 빨리 망하는
형국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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