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5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5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8.1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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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향교 이야기
▲제보자=박문수(남, 1947년생)


▲줄거리=창평향교는 관할 범위가 수북, 대전, 고서, 봉산1구, 남면이다. 특이한 점은 수남 고서에서 수북 대전으로 갈려면 영산강 원류를 건너야 해서, 물이 많으면 수북 대전 사람들이 이곳 향교에 오지 못하기 때문에 대전면에 대성단 사우를 짓고, 공자, 주자, 정몽주를 모셨다.


▲이야기=조선시대에는 유사라고 했죠. 근새 조선말엽부터 전교라고 호칭을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균관에서 향교에도 업무의 편의상 순위를 정하기 위해 직책을 붙였는데 요즘식으로 하면 전교는 교장선생님입니다.


창평향교는 원래 창평현 지금 고읍리에 180년 정도 있다가 지금 이곳으로 옮겨진 것을 몇 년 전에 알았어요. 몇 년 전에 이곳 창평향교 명륜당 상량문을 보면서 연혁을 다시 정리하던 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조선시대 향교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개성에 있던 성균관을 한양에 옮겨 짓고 각 현에 정부지원 사업으로 성균관을 지으라는 교지를 내려서 대부분의 향교들이 조선개국 초기에 건립되었어요. 이곳 창평향교도 1399년 정종 원년에 창건되었다고 읍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숙종 15년 1689년에 현령 박세웅에 의해 대성전과 명륜당이 다시 지어졌어요. 창평향교는 약간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관할 범위가 수북, 대전, 고서, 봉산, 남면인데 이곳 수남 고서에서 수북 대전으로 갈려면 영산강 원류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물이 많으면 수북대전 사람들이 이곳 향교에 오지 못하기 때문에 대전면에 대성단 사우를 지었어요. 거기에도 공자님, 주자, 정몽주를 모셨습니다. 이곳 창평향교는 전통적으로 규모는 작으나 학구열이 매우 높은 곳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창평향교 명당 터 이야기
▲제보자=이승진(남, 1932년생)
▲줄거리=명당인 죽산 안씨 문중 선산을 비우게 하고, 그 자리에 국가교육기관인 향교를 앉혔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원래 창평 향교는 고읍내현 향교골에 있었어. 그런데 지형이 재미가 없어서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그래. 여기가 명당이에요.


산주는 죽산 안씨인데 지금도 고읍리에 살아요. 선산도 그 너머에가 있고. 그래서 조정에서 안씨 문중에다 국문을 보내서 ‘당신들이 원하는 땅을 줄 테니 여기를 비어주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죽산 안씨는 향교 너머에다가 묘를 옮겼어요.


지금 향교자리에 있는 죽산 안씨 묘자리를 파보니까 검은 수소가 무릎을 꿇고 뒷발은 일어선 채로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에 향교를 앉혔다고 합니다.


이 마을 전체가 와우 형국이에요. 안소재라는 정자가 있는데 거기가 소구시(소 먹이통)이고 향교자리가 진구레(소배통),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데가 강정인데 소 똥구녕이에요. 교산리 2구 하북산 마을이 소꼬리에 해당 되요.

덕촌마을 지명 이야기
▲제보자=김용준(남, 1941년생)
▲줄거리=덕촌마을은 남쪽 삼봉산이 장원봉, 열녀봉, 효자봉으로 3덕을 갖추었다고 하여 덕자를 가져와 덕양으로 부르다가 창평현 청사가 지금 창평면사무소 자리로 옮기면서 덕촌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우리 마을은 덕양마을, 명양고을이라고도 부릅니다. 구 창평이라고 물으면 여기가 고읍인 줄 알고 찾아옵니다. 구 창평 고읍 본 마을인 이 마을에는 옛 터의 흔적이 없지만 여기가 현청 터 자리인 것은 맞아요. 저 앞에 보이죠. 저기가 현청 우물터예요. 그러나 이 산 모퉁이(시목정 정자)를 돌아가면 옛 마을 흔적이 많아요.


이암촌 감남쟁이 마을이라는 곳인데 거기에 감남쟁이 시암이 있어요. 지금도 마을 간이 상수도로 쓰고 있는 시암이예요. 우리 마을에는 광역상수도도 들어오고, 계곡에서 오는 유하수도 쓰고 물이 좋아요. 감남쟁이 시암물은 언제나 1급수예요.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숩고, 지금도 우리 덕양마을 사람들이 다 먹고 있어요. 감남쟁이 마을은 구 창평현에서 보면 주 마을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2호가 살고 있어요.


덕촌마을은 1452년 문종 2년 광산 노씨가 형제를 데리고 중국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자손을 번창 한 후 파조 한 사람이 이곳에 터를 정해 덕양촌이라고 했다고 그래요. 노무현 대통령이 광산 노씨로 알고 있어요. 덕양의 덕은 남쪽 삼봉산이 장원봉, 열녀봉, 효자봉으로 3덕을 갖추었다고 하여 가져오고, 양은 ‘봉명우지산지양(鳳鳴宇枝山之陽)’의 양자를 가져와 덕양으로 부르다가 1793년 정조 17년에 창평현 청사가 지금 창평면사무소 자리로 옮기면서 덕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 창평현 고읍 이야기
▲제보자=김용준(남, 1941년생)
▲줄거리=창평현의 이름은 여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공자의 태자리인 중국 노나라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며, 삼봉산 주릉 끝에 용담대가 있어 용주고을이라고도 불렀는데 현청터가 옮겨가면서 지명까지도 옮겨갔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창평현이라고 명명한 것은 고려 태조 23년 1061년이라고 하니까 956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태자리가 중국 노나라 창평인데 여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그곳 축소판이라고 합니다. 창평현에서는 나현채라고 하는데, 나주 나씨, 연주(성주에서 연주로)현씨, 평강 채씨라고 합니다. 평강 채씨는 창평 토반인데 우리 마을에는 살지 않아요.  통일신라 때는 기양현, 백제 때는 굴지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 창평현은 용주고을이라고도 불렸는데, 삼봉산(장원봉, 열녀봉, 효자봉) 주릉 끝에 용대바우, 용담대가 있어요. 그 밑에 명주실을 넣어보면 무한대로 들어갈 정도로 깊은 용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광주댐 물이 그 밑으로 지나가 광산마을, 해평, 주산리를 지나 송강정이 있는 쌍교로 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용담대 때문에 용주고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에 터줏대감이 한분 있었는데 부임해 오는 현령이 이 분에게 인사를 안 하면 후유증이 많아서 결국 지금 창평으로 현청을 옮겼다는 말도 있어요. 원래 우리 마을 위에가 행교가 있었어요. 죽산 안씨 안명산이라는 분이 묘지를 헌납하여 여기에 향교를 세웠는데 큰 물이 향교 쪽으로 흘러서 이 터가 아니다 싶어 지금 창평현으로 현청을 옮겼다는 말도 있어요.


398번지가 현청자리이고, 현청 옆에 우물자리는 그대로 살아 있어요.


석간수로 현청에서 사용하던 물인데 그 뒤로 농업용수로도 쓰고 빨래터로도 쓰다가 지금은 방치되어 있어요. 776-1번지가 용주 객사 자리예요. 용주 객사도 창평으로 가져갔다는데, 지금 창평초등학교 체육관 이름이 용주체육관이고, 도서관도 용주도서관이라고 부릅니다. 이곳 이름까지 싹 가져갔다는 증거예요.

316번지는 육일정으로 활연습, 활바탕이라고 불러요. 이것도 가져갔다고 그래요. 737번지는 옥담으로 지금으로 치면 감옥입니다. 경지정리 할 때 없어졌어요. 668-2번지는 사창터에요. 읍창 즉 창고죠. 경지정리 전인 40년 전에 유성언이라는 장사가 주춧돌을 맨 손으로 끌어다가 한 빼미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산51, 산50-2번지는 향교가 있는 향교골입니다.

특히 산51번지에는 마당바우가 있는데 우리 마을의 2차 화전놀이터에요. 1차로 육일정에서 한잔을 걸치고 술동 지고 올라가는 우리 마을의 유일한 관광지 놀이터에요.

그 위에 산57번지에 부엉이 바우가 있어요. 마당 바우에서 직진으로 한 50미터 올라가면 있는데 마치 부엉이가 날라 갈라고 하는 형국입니다. 노무현의 부엉이 바우가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하죠. 마을 뒷산이 목면산이에요.

명양고을 죽림동 이야기
▲제보자=김용준(남, 1941년생)
▲줄거리=명양은 덕촌의 옛 이름이며,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 죽림동이라고 한다.


▲줄거리=왜 여기를 고서면이라고 하는가 하면 여기가 고현내면, 저 아래 해평마을과 죽평동이 있는 곳을 서면이라고 하는데 고자와 서자를 따서 그렇게 부릅니다. 아무튼 여기 389번지 현청터가 고서면의 핵심 자리입니다. 또 우리 마을을 명양고을이라고도 불렸어요. 명양지가 필사본으로 만들어져 있기도 합니다. ‘봉명우지산지양’ 거기에 명자와 양자를 따서 명양으로 부른 것 같아요.


명양골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은 죽림동입니다. 지금 가보면 한집이 살고 있는데 기왓장이 많이 나와요. 죽림동에서 200미터 거리에 큰 주막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주막 주인의 이름이 요질내미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거기에 샘도 있고 여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논밭으로 되어 있어요. 어려서 팔순 노인들이 명양고을이 어디냐고 찾아다니는 것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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