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6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6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8.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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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학구당
창평현령비

 

삼정등과 구승지 터 명당
▲제보자=김용준(남, 1941년생)
▲줄거리=목면 산봉우리 밑에 삼정승이 나는 자리라 했는데, 그 기를 받아 실제로 국회의원 3형제가 났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삼정승이 난 자리를 대팽이골이라고 하는데 목면 산봉우리 밑에 마당바우가 있는 골짜기에요. 삼정승이 났지요. 국회의원 3형제가 났으니. 김홍용, 김문용, 김성용. 김홍용이는 제헌이후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문용이는 보궐로 당선되고, 김성용이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회의원이 된걸로 알아. 풍수지리학상으로 이곳이 남자의 신에 해당된다고 그래요.
반대쪽에 연일 정씨 선산자리에 구승지 자리가 있다고 그래요. 승지가 누구누구인지는 모르고 지금도 묘가 있어요. 죽림동이라는 마을에서 한 오백미터 가야되는데 거기서 북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어요.
담양경찰서 출장소 자리가 명당이라고들 합니다. 창녕조가, 김해 김씨. 연안 이씨, 장흥 고씨 선산들이 거기 있어요.

구 창평현 형무소 “옥담”
▲제보자=신정만(남, 1930년생)
▲줄거리=구창평 흔적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 이 옥담 밖에 없었는데 경지정리하면서 그 자취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우리 마을에서 제일 아쉬운 것은 1988년에 경지정리하면서 없애 버린 옥담(지금은 형무소)의 자취여. 우리가 어려서 초등학교 갔다 오면서 추우면 그 안에 앉았다 오고 그랬어. 따땃했지.
분향리 2구에 사는 박갑인씨가 거기서 논을 벌어 묵었는데, 지금도 거기를 파 보면 돌이 나와. 그때 바닥을 까 보면 거기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높이가 한 2m 되었어.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었어. 갑인씨가 물을 빼려고 하면 돌 때문에 파지를 못해
(이하섭 : 내가 영광으로 발령났다가 여기 돌아오니까 그때 경지정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환지위원들을 소집했어. 그 당시 현승호씨가 위원장이고 덕촌마을에 김용준, 잣정마을에 조상호씨가 환지위원이었는데 우리 신양마을회관에서 회의를 했어. 내가 조상호씨에게 이것이 문화재인데 이곳 200평을 없애면 쓰겄냐고 그랬제. 당시로서는 구창평 흔적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 이 옥담 밖에 없었어.)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한 현령 공적비
▲ 제보자 신정만(남, 1930년생)
▲ 줄거리 5·16 후에 돌담을 쌓는 일을 하다가 돌무더기 속에서 현령공적비가 나왔는에, 이후 선정비를 모아 제각을 짓고 한 곳에 모아 세웠는데, 전에는 마을 다리로 쓰이기도 했다는 이야기이다.

5·16 후에 마을 울타리를 없애고 돌담을 쌓는 일을 시작을 했어. 그 당시 고읍리 160호, 분향리 100호, 성월리, 금현리, 교산리에 돌담을 쌓으면서 옥담의 돌을 다 주워갔어. 이 근방에 돌무더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그 돌무더기 속에서 현령공적비가 나왔는데 주민들이 전통식당 울타리 담 옆에 세워 났어. 그 돌을 1995년 문경규 군수 시절에 역대 구창평의 현령을 지낸 분들의 선정비를 모아 제각을 짓고 한 곳에 모아 세웠어. 지금 선정비 제각은 당시 군에서 사서 모아 논 것이에요. 그런데 그 전에는 이 선정비를 돌다리로 사용했어.

수남 학구당 옆에 묘가 없는 이유▲ 제보자 김용남(여, 88세)
▲ 줄거리 수남 학구당은 땅기운이 강하여 부정을 타기 때문에 주변에 묘지를 못 쓴다는 이야기이다.

 수남 학구당 옆으로는 묘를 못 썼어요. 묘를 쓰면 산지기 집에 밤마다 호랑이가 와가지고
‘파가라!’며 못살게 굴어서 지금도 묘를 못 써요. 옛날에 누가 묘를 썼는데 파갔어요.
지금은 아예 묘를 안 써요. 산이(산신령이) 쎄니까 죽은 송장도 그리 못 가는 거에요. 그 근처로는 묘가 전혀 없어요. 원래 산지기로 전창순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엄마랑 함께 살았어요. 대바우에 집을 짓고 살다가 자식들 따라 서울로 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아마 죽었겠죠. 잣정에 조인진씨가 면장을 할 때 학구당 산지기에는 덕촌 앞 물모실 3마지기를 식량으로 줬어요.
그런데 그 누구도 여기 와서 잘 된 사람이 없어요.

환학정과 주변 정자들
▲ 제보자 조상호(남, 1945년생)
▲ 줄거리 환학정 자리에 복원된 소산정과 주변의 수남 학구당, 관수정, 명봉정 정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환학당 어른이 제봉 고경명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큰 돈을 댔다는 기록이 집안에 남아 있습니다. 창평 조씨와 장흥 고씨는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나도 아홉이 걸려있어요.
형수씨, 재수씨, 할머니, 고모, 장모, 대고모등 아주 가깝습니다. 환학정 주변에는 누정이 세 개가 더 있었습니다. 수남 학구당이라고 불리우는 주변에는 누정이 세 개가 더 있었습니다. 수남 학구당이라고 불리우는 삼봉서사, 이것은 환학정이 지어서 창평골에 봉납한 것으로 압니다. 두 번째는 분향리 2구에 있는 관수정이라는 정자인데 이것도 환학당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 번째는 환학정 옆에 명봉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울 명, 봉황 봉자를 쓰지요. 재봉 고경명 어른의 후손이 지은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없고 뫼만 있어요. 환학정 자리에는 우리 조부인 동호당 조은환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초기에 소산정을 짓고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동호당 조은환 조부는 녹천 고광순의 병장과 남면 무동에서 일본군 대장 요시다를 총으로 사살한 김태원 의병장에게 의병자금을 대줄 정도로 항일 의식이 높았다고 합니다.

소산정을 복원한 동호당 조은환
▲ 제보자 조상호(남, 1931년생)
▲ 줄거리 산정 정자가 원래는 환학정이라 불러진 정자였는데 환학정을 지었던 조여심의 후손 조은환이 복원하여 정자 이름을 소산정으로 개창했다는 이야기이다.

소산정은 1927년에 동호당 조은환 선생이 복원을 했어요. 소산정은 원래 환학정이었는데 환학정은 환학당 조여심 선생과 제봉 고경명 선생이 교유한 곳입니다. 그런데 없어졌지요. 한동안 정자를 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당시 재력가였던 동호당 조은환 선생께서 복원을 한 것입니다. 동호당 선생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집안과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환학당 할아버지와 의병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소산정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그 분 아들이 다섯 분인데 첫째가 관가정을 증수하신 운초당 조희빈 선생이고 둘째는 창평향교 장의를 지낸 돈막골하대 조유환 할아버지인데 그 후손들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교수가 되었는데, 전대 조담 교수가 이분 아들입니다. 셋째는 서남하대라는 할아버지인데 그 분은 공부는 안했으나 머리가 총명하여 뭣이든 외워버릴 정도라고 했어요. 넷째가 배수하대, 다섯째가 정읍하대라고 합니다.
동호당 조은환 할아버지는 죽림재를 경주에 있는 시제 사당인 종덕제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도 하고 초대 종덕재장(대종회장)을 지내기도 했어요. 이런 동호당 조은환 선생이 샘이 나서 동네에 조참봉이 1929년 무렵에 만옹정을 지었어요.

증암천의 아들바우 딸바우
▲ 제보자 조상호(남, 1931년생)
▲ 줄거리 증암천에 아들바우 딸바우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자식 못난 사람들도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증암천에 아들 바우하고 딸바우가 있어. 아들 낳고 싶으면 아들 바우에게, 딸 낳고 싶으면 딸바우에게 치성을 드려요. 그 밑에 폭포가 있어요. 어렸을 때 동강조대가 광주댐에 잠기기 전에 그리 물 맞으러 다녔는데 그 떡시루 바우로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좀 다른 이야기인데 창녕 조씨가 힘이 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증암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 분향리에서 부터 봉산까지 가는 물길이 증암천인데, 증암천이 바로 영산강 상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분향리가 영산강의 상류인 증암천 물길을 끼고 있는 큰 마을이기 때문에 힘이 쎄다고 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금년에 고서면에 스물여덟 번째로 생긴 마을 이름도 증암마을입니다.

성산마을 기상대
▲제보자=임성우(남, 1938년생)
▲줄거리=매봉에서 먹구름이 끼면 매가 울음을 울어 소리가 마을까지 들리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성산의 성은 소리 성입니다. 그러면 무슨 소리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마을 앞에 증암천이 흐르는데, 그 증암천 흐르는 물소리를 말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증암천 너머 마을 앞산이 사직산입니다. 사직산 남쪽의 산을 매봉이라고 하는데 하늘을 나는 수리매의 울음소리라는 설입니다. 매봉이 캄캄하면 여기 마을에 비가 오는데, 그때 매가 운다는 겁니다.
성산마을 기상대는 매봉의 먹구름과 매의 울음소리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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