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7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17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0.09.0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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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전방군제 이야기
▲제보자=임성우(남, 1938년생)
▲줄거리=고서면 소재지에 있는 전방군제에서 근무하면서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는 군제 메리야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내가 전방군제에서 20년을 근무했는데 93년에 계장으로 퇴직을 했어요. 웃선에 찍혀서 진급을 못했어요. 전방군제가 대우는 좋았습니다. 월급을 120%~130% 더 줬어요. 보너스도 좋았어요. 남녀를 구분한 무료 기숙사가 있어서 복지시설도 좋았어요. 여자들은 반드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남자들은 원하는 총각들에 한해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었어요. 전체 노동자 가운데 남녀비율은 여자 10, 남자 1이었어요. 처음에는 여기를 한일섬유라고 했어요. 한국과 일본의 앞자를 따서 그리 불렀죠. 중간에 전방군제로 바꿨어요.
 전방군제 때문에 이 인근마을은 혜택을 좀 봤죠. 일자리를 창출하고, 매년 경로잔치 때  65세 이상의 노인에게 메리야쓰를 공짜로 나눠주었죠. 군제 메리야스 품질이 아주 좋았어요. 메리야쓰 품질이 독일이 넘버원이고 두 번째로 좋은 것이 여기 전방군제 메리야쓰였어요. 땀 흡수가 좋은 것이 장점이고 빨래비누로 빨면 노래지는 것이 단점이에요. 세탁기에 넣으면 대신 깨끗했어요.
 국내 전방군제 메리야스 공장은 여기 뿐이예요. 물론 중국과 베트남에도 전방군제 공장이 있지요. 전방군제는 1972년에 창립한 한일합작회사입니다. 광주전남방직과 일본군제가 합작해서 전방군제가 되었습니다. 부산 영도 출신 정치인 김무성의 아부지 김용주가 창립자이자 사장이었고 일본사람 오꾸모 히도시(소운일지)가 부사장이었습니다. 내가 근무할 당시 5~600명이 일을 했고 몇 십만 불의 연간 매출실적을 올렸습니다. 굉장히 탄탄한 회사였어요. 여기에서 생산된 메리야쓰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합니다. 브랜드 이름은 군제 메리야쓰, 우리말로는 군시라고 합니다.

환학정과 조석교 이야기
▲제보자=조명호(남)
▲줄거리=창평 현령이 원님으로 부임해 오면 운곡 조호에게 조석으로 인사를 온 것을 기념하여 조석교 표지석을 세웠는데, 운곡 조호의 친조카인 환학당이 환학정 정자 앞으로 표지석을 옮겼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지금 환학정 자리에 조석교 표지석을 옮겨 놨는데, 구창평(고읍)을 백제시대 때는 굴지현이라고 불렀다던데, 하여튼 창평 현령이 다섯 사람이 왔는데, 이 현령들이 원님으로 부임해 오면 운곡 조호 할아부지에게 조석으로 인사를 와서 조석교라고 불렀답니다. 조석교를 환학정 앞으로 옮겨 놓은 것은 환학당 정자의 주인인 환학당 할아부지가 운곡 조호 할아버지의 친조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창평향교지에 따르면 ‘운곡 조호는 교리 벼슬을 지냈는데, 교리는 홍문관, 승문원, 규장각, 교서관에서 일을 하는 직책을 말한다. 교리를 지낸 후 여러 번 군읍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분향리에 내려온 창녕조가 내력
▲제보자=조명호(남)
▲줄거리=고려 말 창녕조씨 조유도가 내려와 정착한 분향리에서 조수문과 조호 등이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고려 말 공민왕 시절 포은 정몽주와 함께 정치를 했던 조대운이라는 양반이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황해도 두문동 송학산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서 고사리 묵고 살다가 분사(불에 타 죽음)했는데, 죽으면서 그의 아들 조유도에게 ‘포은을 잊지말라’고 유언을 하자 조유도 어른이 두문동에서 거처를 옮기면서 이곳에 정착을 했다고 들었어요.
나로서는 17대 선조가 됩니다. 조유도 어른의 아들이 죽림 조수문 어른인데, 운현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4형제를 뒀어요. 운곡 조호 어른을 여기에서 낳았어요. 운곡 조호의 외아들이 관수정입니다. 환학당 조여심은 관수정과 조앙(사촌형제)간입니다. 관수정은 삼형제를 뒀는데 큰아들 매사공은 운현마을에 터를 잡고, 둘째아들 동강공은 잣정에 터를 잡고, 셋째 충신공은 동복에 터를 잡았다고 그래요. 죽림 조수문 어른은 성균관 생원이었는데 벼슬길을 나가지 않고 죽림재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운곡 조호 어른은 진사과와 문과를 급제하여 함양원님, 이리원님, 홍문관 교리, 공주목사를 거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와 여생을 보냈다고 그래요.

구름고개에서 용이 승천한 운현마을
▲제보자=조명호(남)
▲줄거리=운현마을은 운중반룡 형국인데, 구름고개에서 용이 승천한 마을이라고 해서 운현마을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우리 운현마을을 운중반룡 형국이라고 해요. 서리 반자를 쓰는데, 산고개 중턱에 구름이 서린 가운데 용이 승천한 형국이다. 마을회관 옆으로 용모골이라고 하고, 용모골 작은 샘에서 용이 승천했는데, 구름고개에서 용이 승천한 마을이라고 해서 구름 운(雲) 고개 현(峴)자를 써서 운현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마을 동쪽은 삼봉산, 서쪽은 사직산, 남쪽은 무등산, 북쪽은 광성산이 포진하고 있어요. 사직산에 물내등이 있어 가뭄이 들면 거기에서 기우제를 지냈
다고 그래요. 물내실은 저수지 위에 산 안에 있는데 갈우곡이라는 동네가 있어요. 목마른 송아지 계곡이라는 뜻이에요. 물이 없어서 농사짓기 어려운 동네인데 지금은 저수지 물을 갔다 대니까 부자 골짜기 부곡이라고 불러야 해요. 지금 조, 정, 홍, 박, 전씨 등 7호가 사는데 맨 부자들만 살아요. 우리 운현마을은 60년 전만 해도 한 60호가 살았는데 창녕 조가 천지였어요. 그렇다고 다른성이 안 살았던 것은 아니에요. 파평 윤씨, 순천 박씨, 문화 유씨, 원주 이씨, 연주 현씨, 청주 한씨들이 살았어요. 지금은 이, 유, 현씨는 한 집도 없어요.
현재 40호가 사는데 창녕 조가가 제일 많아요. 우리 마을이 고서에서 후산 다음으로 두 번째로 생긴 마을입니다.

금단동 지명유래와 처사골 이야기
▲제보자=이근기(남, 1950년생)
▲줄거리=금단풍나무가 많아서, 금을 많이 캐서, 그리고 금계포란형이어서 금단동이라 부른다는 3가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서처사가 살았다고 해서 처사골로도 부르는데, 후산리 오희도가 서처사를 천거하여 인조가 금단동으로 서처사를 보러왔다가 소나기를 흠뻑맞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완급을 모르는 사람이라 발길을 돌렸다고 전한다.
▲이야기=왜 금단동이라고 불렀는가?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 마을에 금 단풍나무가 많아서 금단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신전문대 실습장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놨어요. 20년 전에 나주 동신대로 많이 옮겨 심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 마을에서 금을 많이 캐서 금단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우리 마을에서 남면 개선동 넘어가는 경계에 함빼미산이 있는데 거기서 금을 많이 캤어요.
지금도 가보면 금구덩이가 몇 개 있고 박쥐도 살아요. 금이 있는 데는 무연(흑연)이 나온다고 그래서 어려서 파보고 그랬어요. 이런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금단동에서 금을 캐서 노채에서 놓쳐 버리고 운현에서 울었다. 잣정에서 자고 신양에 가서 신을 삼아 덕촌에서 덕을 봤다.”
세 번째 이야기는 우리 마을 뒷산이 풍수상 금계포란형 형국이라고 해서 금단동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예요. 뒷산을 매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매봉이라고도 불러요. 지금 매봉에는 동신대 동강학원 이장호 이사장 내외분 묘가 거기에 있어요. 동신대 실습장인 농장이 거기 있어요. 6만평 정도 되는데 밤나무와 편백을 많이 심어 놨어요. 이 산을 처사골이라고도 불러요. 서처사가 여기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 산이 서씨들 산이고, 선산도 있고 거기서 시제를 모셔요. 교산리 2구 하북산 마을에 서순태 이장이 서처사 손이예요. 그 양반이 묘사 일을 보러 댕겨요. 서처사가 살았던 곳은 지금 대밭이 되었는데 기왓장이 지금도 나와요. 이장호씨가 서처사 살던 집 옆에 별장을 짓고 살았어요. 거기에 실습장 관리동을 지어 놓고 교수들이 쉬어가고 그래요.
서처사라는 분은 인조가 널리 인재를 구하러다닐 때 명옥헌의 오희도의 소개와 천거로 금단동에 서처사를 만나러 왔다가 때마침 쏟아진 소나기를 맞고 다니는 서처사를 멀리서 보고 “저토록 완급을 모르는 사람과 어찌 정사를 논한단 말인가?”하고 그냥 돌아섰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분이예요. 원래 이 산은 대성농장 최기영 소유였는데 로케트 건전지 신장우씨에게 넘어갔다가 이장호씨가 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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