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5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5
  • 자료제공= 담양문화원
  • 승인 2020.12.1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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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쌀엿

 

양녕대군과 창평 쌀엿, 유과 이야기

제보자= 안복자(, 1955년생)

줄거리= 창평의 한과는 양녕대군에 의해 전해졌다는 쌀엿에 조청이 좋아서, 조청이 들어가는 유과를 포함한 한과가 다른 지역보다 유명하다.

이야기= (조사자 : 다른데도 한과가 많이 있는데 왜 여기 창평에 한과가 유명해요?)

창평에 양녕대군이 오셔 가지고 쌀엿을 잡수셨다고 했죠. 그리고 쌀엿 만드는 비법을 그때(수행 궁녀들이) 가르켜 주셨다고 그랬었죠. 그 때 그 쌀엿이 유명하다 보니까, 조청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 유과가 발달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창평에 정말 담양 창평 하면은 쌀엿도 유명하지만, 이 유과 한과도 유명한 것 같아요. 다른데 비하면은, 훨씬 여기가 명인들도 맍지요.

(조사자 : 한과, 유과를 만든 동기가 무었이었습니까?)

유과라는 것은 그전에 옛날에는 그랬죠. 제사상이나 요런 잔치 때 많이 쓰고 평상시는 별로 먹지 안했잖아요. 지금은 일 년 내내 간식으로 먹을수가 있지요. 그리고 제가 유과를 만들게 된 동기는 저희 어머님이 음식솜씨가 좋으셔서 마을에 대소사나 명절이 다가오면 한과나 유과를 정말 잘 만드셨어요. 제가 그걸 어렸을 때부터 봐 왔거든요. 또 내가 맏딸이다 보니까 어머니 옆에서 도와드리고 하다가 제가 자연스럽게 만들게 됐거든요. 유과는 만들기가 정말 힘들죠.

 

창평 보평마을 유래

제보자= 한진용(, 1943년생)

줄거리= 보평마을은 빈촌이였는데 싸리제품으로 유지가 되어 싸리제품 마을로 지정을 받아 마을회관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우리 본촌은 사방 오리의 아랫사리로 대명길지로 통하여 좌에는 용, 우로는 용의 기세가 웅대하여 늘 인물이 솟아날 생기가 넘치는 마을입니다.

일찍이 마을 뒤편에 몇 채의 촌가가 있었는데, 그때의 마을이름은 밭등이라고 했답니다. 밭등, 밭등으로 해가지고 불리어오다가 많은 성씨들이 모여 마을을 이뤘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여기가 원래 들이 넓었어요.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근데 인자 생가가 몇 채 생기다보니까 부르는 이름이 없어가지고 그냥 밭등이라고 불렀는가 봐요. 그리오다가 밭등이란 말이 부르기도 근께 인자 말등으로 했든가 봐요. 그래갖고 지금으로부터 910년 전에, 개척이 되어갖고 말등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조선말에 와갖고 다시 개명을 어떻게 했냐믄, 보평마을로 개칭하여 불려오다가 지금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된 이후에는 우리 마을에서 싸리제품을 했어요.

그전에는 여가 아조 빈촌 마을이였어요. 먹고 살기가 힘든, 빈촌 마을이였는데, 싸리로 인해서 마을은 좀 생계가 유지해나가는데 도움이 됐던가봐요. 그 이후로 그 이름을 기리기 위하여 본 비를 여기다 세운 것입니다.

(조사자 : 보평의 뜻이 무엇인가요?)

넓을보(), 평할 평()자라 해 갖고 보평으로 한 것입니다. 넓은 들 가운데가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창평 오리방죽의 유래

제보자= 김우용(, 1941년생)

줄거리= 삼천리와 창평리1구에 3개의 방죽이 있는데 원오리방죽은 창평1구에 주산 밑에 오리가 날아 앉으려는 형국이다. 남극루 옆에 2방죽이 있었고, 농협 뒤편에 3방죽이었으며, 모두 시원해 멱감는 놀이터였다. 오리방죽의 시초는 1방죽이며 여기에서 내려간 물이 3방죽까지 이어져 모두 3개의 오리방죽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지금 현재 창평 1구에 있는 방죽이 오리방죽입니다. 근디 그것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야기 했을 때는, 여거 지금 (예비군)훈련장 산이 있잖아요.

주산이라 헌데 주산. 근디, 그 산의 형국이 옛날에는 봉황이 날개를 감싸 안고 앉아 있는 터. 근디 실질적으로 요 밑을 향해서 얘기할 때는 오리가 날아 앉으려는 형국이다. 그래서 지금 요 앞에 보 있죠. 거기가 있었는디 바우도 거가 있었는디, 그가 방죽이 있었어요. 방죽이 있었고, 그 바우 밑에는 일테면 우리 창평 용수리에서도 용이 올라간다고 그러는데, 그 바우 밑에 전이 살고 있었다. 전이라는 것은 뱀인디, 뱀이 네 발이 나오고 귀가 나와 가지고, 그것이 자라서 용으로 승천한다. 그래서 그 방죽에는 누가 앉도 못하게 허고, 절대 부정한 일은 못하게 했어요. 글고 그 안에도 방죽이 있었는데, 어린애들이 방죽에서 멱도 감고. 그렇게 해서 그것이 오리 형국에 있는 바우가 오리방죽의 시초다.

그러면 여기하고 지금 남극루 거, 기와집 바로 밑에 가서 방죽이 좋게 있었어요. 그 방죽하고, 지금 농협 바로 밑에 가운데 가서 큰 당산나무가 있고, 그 땀때기샘 해가지고 물이 굉장히 시원한 물이 나왔어요. 1방죽, 2방죽, 3방죽이.

(조사자 : 양로정 있는 곳을 메워 부렀고요?)

인자, 거기는 늦게까지

(조사자 : 농협 뒤에 있는 거)

그게 늦게까지 있었어요. 근디 내가 알기로는 83, 84년도에 거기다 어린이집을 하기 위해서, 우리 선배가 그놈을 그거이 국유지었는데, 그걸 분할을 받아부렀어요. 분할을 해주면 안 되는 방죽인데, 그래서 방죽을 메워 부렀고, 그 밑에 지금 논 가운데 집 한 채가 지어졌어요. 거가 또 방죽터에요. 그래서 인자, 이 줄기 방죽을 오리방죽이다.

실질적으로 전체 지역주민 애들이 목욕하고 거기를 놀이터 위주로 해서 이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원 방죽이다. 근디 이제 따지고 보면 이것이 원 방죽이에요.

1번이(원 방죽이)여거서 쭉 내려가는 또랑물이, 고리로 해서 지금 저쪽 오리방죽으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자 거기를(2)오리방죽으로 해가지고, 지역 명을 오리촌 그랬는디, 실제 오리촌 시작은 여기서 부터에요. 인자 주산에서 보면 오리가 내려앉은 형국이다. 그래서 생긴 이 방죽에서 물이 흘러 나와 가지고 결국은. 지명은 창평리 그 지명이 되아부렀지만은, 유래는 여기서부터 흘러 나왔어요.

(조사자 : 방죽 세 개를 정리해 보면, 주산 밑에가 하나 있었고,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남극루 양로정 불려진 곳에 있었고, 그 다음 세 번 째가 농협 밑에 있었고)

. 그러죠.

그니까 실질적으로는 오리방죽이 창평리1구다. 옛날 처음부터 한다 하면은 오리방죽은 여기서부터 생긴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야 되는디, 바로 삼지천마을 오리방죽이 창평리1구로 편입이 되야 분게, 좌우지간 삼천리에서도 오리방죽이(자기마을이라고 하고) 지역주민들은 잘 모릅니다.

(조사자 : 선생님 그러면 오리방죽하고 오리샘하고 달라요?)

오리샘은 오리방죽인데,오리샘은 그 물이 찬물이 나오니까, 그냥 오리샘으로 했지. 오리형국을 타고 난 샘이다. 그래서 오래샘 그랬제. 그것이 참 좋은 물이다 해갖고, 오래샘이라고 했지. 그것이 원래는 오리방죽이지.

 

창평 숫둣재 약수터 이야기

제보자= 강차남(, 1943년생)

줄거리= 월봉산 능선자락 숫둣재에 약수터가 있는데 유황성분이 있어 물맛이 좋고 피부병 환자에게 좋다고 소문이 나서 약수로 사용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그 약수터가 숫둣재라고 하는 고개에 있어요. 월봉산 능선자락에 숫둣재, 숫둣재에는 칼 가는 오석(숫돌)있지요? 그런 뜻이제. 그 길이 입석으로 연결이 되아요. 대덕면 입석. 그러믄 창평이 5일장이 있고 학교가 있기 때문에. 그때는 교통이나 찻길이 없었어요. 옛날에는 그러믄 전부 걸어서 창평초등학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고 5일장이면 창평 와서 장을 봐갖고 그 고개를 넘어서 입석으로 가는 중요한 맥이 있어. 숫둣재라는 데가 그 숫둣재 정상에 가서 샘이 하나 있어. 근디 바위로 이쁘게 싸져갖고 오목하니 생겨갖고 거기서 물이 쫄쫄쫄쫄 나와. 그 물이 아무튼 지표수라도 우에서 내려온 물이라도 비가 온다든가 했을 때, 물 양이 크게 변화가 없어. 물이 따뜻해. 그러믄 깊은데서 올라온다는 건데 그 물이 피부병 환자한테 좋다고 소문이 나서 저기 쌍교쪽 사람들이 주로 여기를 많이 다녀. 여기 와서 머리도 시치고 피부병 환자들이 물도 질러다 묵고 그렇게 하고, 그때 그 사람들이 걸어 다니면서 물을 약수로. 글자 그대로 약수로 그 물을 사용했어요.

(조사자 : 성분이 뭐가 좋아서요?)

그러제. 그래서 그 물을 가만히 보면은 주변이 빨개. 빨간 것은 유황성분이 아니겠어요? 유황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피부병도 잘 났었고, 명천으로 이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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