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8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8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1.01.1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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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시장
창평 시장
창평면사무소

 

창평시장 형성과 시장국밥의 효시
▲제보자= 이병해(남, 1940년생)
▲줄거리= 농토는 물론 시장생활에서까지 일제에게 수탈을 당함에서 오는 곤궁한 삶을 지역민들과 함께 민족자본을 들여 민족의 자긍심 고취와 자치에 가까운 시장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창평국밥이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삼지내 출신 의봉 고광표 어른이 일본의 닛뽄대학 나왔어. 창평은 그 시대에 이거 한 가지가 있어요. 일본 놈 대학을 나와도 일본 놈 녹을 안 먹어. 굴지의 성씨들은 일본 놈 녹을 안 먹었어. 그래갖고 민족자본가로 운동가로 움직였지. 그래서 창평은 일본세력과는 거리가 있었어. 그런 게 의봉 고광표 어른이 창평시장 구경을 갔단 말이여. 시장에 왔는데 해가 넘어 갈 쯤 보니까. 사용료를 받으러 다닌다는 말씀이여. 심지어 앉아서 요즘 같으면 너물 한 소쿠리 팔고 있는 것도 사용료를 다 받어가. 그것도 요즘같이 민주적으로 다 받아 가면 모른디. 그 시대 의봉의 눈에는 대단히 불쾌하게 보였다는 말이여. 의봉이 예전에 데리고 있던 삼지내 마당쇠 놈이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까, 불러들여서.
“너 지금 누구의 사주를 받고 그러냐.”
그랬더니 일본 놈 세력이라. 그래서 일본놈의 세력이 여기서도 착취를 하구나, 해갖고 바로 현 창평 농협자리에 건물을 지어요. 그것이 창평상회여. 창평상회는 대창석유주식회사, 그 후로 대창버스로 이어져. 그 전신이 바로 농협자리서 태동을 했다는 말씀이여.
창평상회가 거기에 건물을 지니까. 앞에 시장 쪽에는 아직 시장이 없어. 거기는 다 논인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오고 가니까 포장을 쳐놓고 국밥장사를 한 것이 창평국밥이다는 말씀이여. 그것이 창평국밥 효시여. 세집이 국밥의 효시인데, 그 국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콩나물하고 핏덩어리(선지)라는 말이여. 창평은 구 왕조시대 말이나 일제강점기시대에 조산거리 옆에 조그마한 도살장이 있었다는 말이여. 우리 초등학교 다닐 적에 소가 고리 들어가면 울어. 농협 건물이 예전에는 공출해간 일제강점기 공판장. 그 건물이 다 양철 건물이죠. 일본 놈 말로 하면 도단. 지금 그 도단 건물로 도살장이 이루어져 있어. 그런 게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루어진 건물이 아니겠느냐. 도살장이 있었다는 말씀이여. 그 도살장에서 장날마다 돼지도 잡고 소도 잡으니까. 이 국밥의 핏덩어리가 도살장과 관련 있는 아주머니 세분이 도살장에서 내장을 가져와서 국밥을 만들었어. 허기진 바지가랑이 걸치고 일하다가 거길 ㅤㅉㅗㅈ아가. 탁배기 한 그릇에 국밥 한 숟갈 먹고 다시 논에 가서 일을 한다는 말이여. 그 세분이 누구누구였느냐? 창평국밥의 원조는 화주 어머니 오씨 부인, 도살장에서 재료를 갖다 주신 분도 오씨 부인이여. 그다음 두 분 이름이 박씨 부인이 있고, 조씨 부인이 있고. 다 돌아갔고. 화주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신지 한 5년되고 원조국밥집만 명맥을 잇고 있고 화주의 영향력으로 다른 국밥집들은 나중에 우후죽순 불어난 거고. 화주는 오씨 부인 아들이여.
(조사자 : 창평국밥의 효시는 1930년으로 봐도 되겠네요.)
거기다 연계해서 그때 시장이 지금의 게이트볼장 앞이 바로 시장이여.
게이트볼장에서 고등학교 쪽으로 게이트볼장 들어서서 왼쪽으로 가 구 시장이여. 그런데 창평상회가 건물을 짓고 들어섰다는 말씀이여. 다시 말씀드리면 일본 놈 세력을 제제할 수 있는 민족세력이 자리를 잡으니까. 일본놈들이 점령을 해서 자꾸 그쪽으로 침범을 혀. 그럼 박선헌, 박석기 그 뭐인가 신작로 건설로 종가 집을 뺐겨버렸지만. 또 일본 놈들한테 농토를 뺏기게 되아 거기 시장통의 논이 박선헌, 박석기 논이라. 거기 종택의 토지여. 시장이 점령을 해서 들어오니까 거기가 시장화가 되았지. 거기에 농토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은 잃어. 한 세력가가 운이 미치질 못하면 그렇게 오드란 말이여. 일제강점기라는 것이 그 집으로는 망운으로 봐야지.
박석기 대목을 정리를 하면 그 형제분은 사형제여. 인제공 박휴동이 그 밑에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이 박진규, 둘째 아들이 박찬규. 그러니까 찬규씨 때 창평면장을 해. 면장의 임기 동안에 창평시장 농지를 잃어. 그러니 크게 말하면 창평시장을 옮겨놓은 면장이여. 그러니까 한 왕성했던 성씨가 아이러니컬하게 일제강점기를 당해서 시대의 운에 따라서 내것을 난도질을 당하면서도 그 보상을 못 받았다는 말이여. 창평의 발전이라는 절대 절명기에 그야말로 산증인의 역할을 했어도 역사는 거기에 묻어져 있었다. 이것을 향토사가 밝혀낸 거예요. 그런게 이렇게 각을 만든 거제. 되도 않는 일 아니에요. 내가 그래서 창평을 나가면은 이 자손들한테 대단한 대접을 받고 다녀요.
(조사자 : 박석기 할아버지가 박휴동 어르신이면 아버지는 누구신가요?)
박진규씨, 박진규씨 아들이 박성윤, 박석기, 박성모 이렇게 삼형제야.

땅기운이 사라져 고읍 터를 옮긴 창평
▲제보자= 이병해(남, 1940년생)
▲줄거리= 호족들의 막강한 세력이 원님을 힘들게 한 설과 홍수로 인해 풍수지리가 무너져서 땅기운이 사라졌다는 설과 제왕출몰 설 등이 혼재 된 가운데 창평 동면으로 현청을 옮겼다는 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조사자 : 기록에 혹시 현청을 옮긴다는 소문이 났을 때 백성들의 유언비어 같은것도 기록에 나옵니까?)
천년을 갖고 온 터는 명기가 사라진다. 터의 운세가 약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불상사가 많이 나타난다. 원님이 정사를 하는데 참 힘듭니다. 그 시대에 그랬을 거다. 삼한 이래로 고읍터든, 창평이든, 아니면 그 후에 고려시대의 창평으로 부터서 창평도 천년인데, 천년을 넘어서 오면 그 땅이 주는 기운이 떨어진다. 모든 상서로운 기운이 떨어진다. 그로 인해서 불상사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기회에 제2고음으로 옮길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억측이 있고요. 1450년대 고을 원님을 능욕하는 불상사와 같은 사건들, 또 보이지 않은 많은 사건도 있지만 세력가들이 원님을 힘들게 했다. 원님주위에 호족들 천안전씨, 창녕조씨, 진주양씨들도 계시고, 현 부군에 이런 성씨들이 힘들게 했다는 설도 있고 1600년대 후대에 1700년으로 오면서 우스운 풍조들이 고르지를 못했다. 지진도 났고, 그때 시대에 땅이 울린다고 하면은 나쁜 징조로 받아들였거든. 홍수. 1700년중엽에 큰 홍수로 인해 지금 고서에서 증암천과 광주댐에서 내려온 물줄기 냇이 증암천 줄기가 아니야. 홍수가 나기 전에는 해평뜰 그 앞으로 해서 증암천이 지나갔어. 1600년대 그 무렵이여. 그때의 큰 홍수가 그 물길을 막아버리고. 지금의 물줄기로 터지면서 고읍에서 내려다보이는 사각이 떨어져 버렸어. 모래사(沙)자 뿔각(角)자인데 풍수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거든요. 사각지가 떨어져 나가버렸다는 말씀이여. 그래가지고 해떨어진 자리가 보였다. 낙조가 보였다. 사람 산데서 양지나 양택이나 음택이나 묘지자리나 물이 흘러가는 지대에 낙조가 서쪽으로 흐르는 내가 보이면 흉살이다. 그말이여. 그때 홍수로 인해서 성산 사각이 떨어져 나가버렸다.
승지는 벼슬아치여. 이름은 거명 할 수 없고. 그래서 전라감사가 왕명을 받들고 기부체납을 해버려. 나승지 집을 몰수를 해.  인심이 흉흉하면은 가벼려. 금방 죽여 버려. 세력가들을 금방 죽여 버려. 근게 어쨌든지 고을의 사대부나 선비들이 검소하고 주변 사람한테 잘혀야 혀. 넉넉하니 배고플때는 곡간에 양식도 풀어줘야 하고 구휼도 해야 하고. 저리해야 하는데 이 양반은 그렇게 못했던 모양이라고. 근게 그런 집을 찾아서 기부체납(재산몰수)을 해버려.
그러고 나서 고읍에 있는 현청을 요리 옮겨버려. 그래서 지금 나승지 사랑채가 현청이여. 저쪽으로 몸채는 부수적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겄죠. 이런 에피소드가 있죠. 고서 고읍에서 창평으로 이읍을 왜 했느냐 이런 억측(설)이 있다. 한 설은 세력가가 부임한 원님을 힘들게 했다. 한 설은 큰 홍수로 인해서 사각지가 떨어져 나가버리고 지력을 잃어버렸다. 또 한설은 제왕출몰설이 동면에서 흘러나와 기부체납하고 옮겼다.

지네혈을 막은 조산 이야기
▲제보자= 이병해(남, 1940년생)
▲줄거리= 창평고등학교를 건너서 시장터 쪽 큰 분묘는 읍 터를 조성하는데 있어 자연의 초월적인 좋은 기를 얻고자 비보풍수를 이용해 인위적인 조산을 만들어서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창평고등학교를 건너서 시장터 쪽으로 절반정도를 오면은 오른쪽으로 고등학교 정문 옆 철조망 사이에 큰 분묘가 하나 있지요. 삼국시대의 묘라해가꼬, 보물 몇 호라고. 그 무덤은 만들 조(造)자 조산이라는 이름 하는데 이름이 조산이여. 조산걸 조산걸은 거리 이름 아닙니까. 거슬러 올라가서 1892년에 고서면 고읍에서 창평으로 이사를 왔지요. 읍이 그때 조광존(趙光存) 그 어른이 이 읍만 하고 그해 11월에 닥 갈 거여. 이임을 해도임. 멀리 가. 그 뒤에 인자 또 원님이 부임을 하죠. 부임을 해서 2~3년 있으면서 그 무덤을 만들어요. 구역 사람들을 만들어서 부역으로 만들고 지게로 흙을 갔다가 버리고 가마니로 갔다가 날리고 그래갖고 그 무덤을 만들어. 왜 만드냐? 앞에 원님은 이리 이임을 했는데 그 뒤에 원님은 원터가 천년을 갈라면은 풍수상으로 모자란 데가 없나. 한 모퉁이 흉사가 없나 그걸 살피고 흉사를 찾아내서 없애
(조사자 : 그걸 비보 풍수라고 하나요?)
고등학교 마당이나 주산에서 오강리 골프장 쪽을 바라보면은 월봉산에서 유촌으로 해서 그 주렁이 저 목매산으로 해서 후산 뒤에로 한 가닥으로 쭉 나가야 하는데, 월봉산은 머리고, 밑으로는 꼬랑지인 게 나가야 하는데 일탈을 해. 일탈. 하가가 흘러서 내려와. 다시 말하믄 상어가 새끼를 끼고 오다가 새끼는 냅두고 자기만 올라 가분겨. 그걸 보고 일탈이라고 하죠. 흘러서 내려오는 형상이 바로 지네 머리로 보인다는 것이여. 풍수상에서 지네는 볼상 사나운 흉이라. 그래서 이 지네의 2세를 죽이기 위해 원님이 삼일을 두고 풍장을 해. 무당, 당골들, 다 모일 거 아니에요. 하나의 관청행사니까. 거기서 닭을 열 마리 정도 가지고 가면서 닭 피를 흘리면서 지네를 유인해갖고 고등학교 앞에까지 온다는 말씀이여. 닭 피로 유인을 하지. 지네가 닭의 피를 좋아 한다더만. 지네를 전부 일으킨 것이고. 닭으로 유인을 해가지고 이렇게 와서 학교 조산 앞에서 오가리에다 담군단말이야. 오가리항아리에다 담을 때에 닭만 담냐. 이렇게 올적에는 목각신을 만들었거든. 지네 형상의 목각신. 목각신이 크니까 여러 사람들도 끄집고, 닭도 끄집고 그때는 그랬으니까. 그래갖고 딱 밀봉을 하고 구댕이를 파. 그 속에 인자 집어넣어 인제. 그대로 집어넣고 무덤을 만드는데 무덤의 형상이 거북이 형상이다는 말씀이여. 거북이가 쌍계천으로 흐르는 물 따라서 흘러가라고 거북이 형상의 무덤을 만들어서 이래놓은 것이 오늘날 이름 붙여놓은 조산이다. 근디 일제 강점기에 이 세력들이 들어와 갖고 왜 조산 이름을 없애 버렸냐. 풍수하고 관련이 있기 때문에. 창평의 지정학상 풍수 관련 지명은 다 말살이여. 창평의 서기가 있었는데 서기가 있는 곳은 다 말살이여. 짤라 버렸다는 말씀이여. 이름조차도 뭐인가 그리 만들어 버렸지. 이거 해방 직후에도 역사학자들 하고, 고고학자들이 확인을 했지만 거의 일본 놈 시대에 이루어 놓은 거거든 유물들이.
(조사자 : 그럼 현재 거기를 어떻게 부릅니까?)
우리는 아직도 조산등이라고 해요. 근디 이런 시대에도 이런 이름을 쓰냐? 이건 전문 위원들이 심려성을 찾다보니 고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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