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9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29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1.2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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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충효문

 

창평 절산마을과 충효문
▲제보자= 박영옥(남, 1940년생)
▲줄거리= 기묘사화 이후 월영당 박이홍은 정치적으로 복권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효조숙저하면서 고향 절산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정신을 기리는 절산박씨 후손들이 충효문을 지키며 마을을 가꾸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유곡리 절산마을은 절산5봉에 천마유곡이라하여 절산오봉골짜기에 하늘의 말을 매어놓았다하여 유곡리라 하였으며 원래는 상유곡과 하유곡으로 불리웠으나 일제하에 행정구역 개편시 유곡리와 해곡리로 나누어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조선조 중종시 기묘사화의 난을 피하여 낙향한 함양박씨 박이관과 박이홍 형제가 터를 잡았는바 이들은 려말 상서공(尙書公)을 지낸 동정공(同精公) 박선(朴鮮)의 손자로써 박이관은 문과급제하여 담양부사 세자스승인 ‘보덕공“을 지냈으며 사헌부장령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박이홍은 청백리로 홍문관교리, 전경등을 역임하였으나 사화의난을 피하여 낙향하여 부모를 모시었다. 그후에 복원되어 정암 조광조로부터 용심순근효제숙저로 천거등용하였으나 사양하시고 아호를 월영당이라하고 애향과 효도로 절산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마을주민의 대부분은 월영당후손이며 이들 형제는 己卯名賢錄(기묘명현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절산사(節山祀)에 배향되고 있다. 절산마을은 함양박씨 집성촌이었으나 후일 문화유씨등과 몇몇 씨족등과 같이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절산오봉을 주산으로하고 좌로는 천마산이요 우로는 삼방산이 감싸주고 있으며 앞으로는 안산과 무등산이 정남향으로 배치되고 마을 앞에는 연화천이 좌에서 우로 흐르니 명당이라 할 수 있고 우리지역에 나산, 후산, 절산을 삼산이라하여 명당리로 알려져왔으니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는가?
산하가 유순하고 풍광이 아름다우니 인걸도 심성이 바르고 자중하며 수백년동안 큰 재난없이 면면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사자 : 마을에 옹달샘이 복원되었던데요)
옹달샘은 유곡리절산 오봉하에 유일한 자연우물로서 주민들이 수백년간 음용하여온 석간수 옹달샘으로 웃터샘이라 불리어왔다. 추담정하의 자연친화적생수로 맑은기운이 우리생활에 생기를 주고 있다. 2017년 담양군(최형식군수)의 후원으로 우물지붕과 주변을 정비하였네요.
(조사자 : 충효문이 있던데 아시는 것이 있으세요?)
충효문(忠孝問)은 월영공 박이홍의 손자 군자감 장경과 장사랑 인경의 행적으로 임진난시의 업적을 가려 숙종23년(1684)에 왕명으로 정려각(건축기념물)이 세워졌으며 열녀 두 분과 같이 광업, 계업 형제의 효행과 함께 충효문으로 명명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창평 연화촌 유래와 이광수 친필
▲제보자= 이택기(남, 1939년생)
▲줄거리= 연화촌마을 형성유래는 마을에서 전해져오는 ‘터기’의 기록으로 보아 500년 이상 된 마을이며 마을 앞에 있는 연화정 상량문은 오적암살단으로 유명한 장전마을 출신 옥산 이광수의 친필이다.
▲이야기= (조사자 : 이 마을은 300년 이상 되었나요?)
500년 이상 되었어요. 왜그랬는고이 원래 임씨들이 여기 살았다 혀. 창평연화촌 유래연혁 사초기에 본록은 윤봉산 일맥 십리 횡룡 법이 천마봉하 남향에, 좌우 청룡백호가 분명한 형국의 양택지로 되어 있는데
‘터기’(처음 마을을 잡은 기록)1600년경 선조 34년경 저거 평택임씨가 입주해서 약 500여년 거주하다가 타지로 이주했다고 당시 촌명은 모전동이라 하였고.[모전봉 찌밭골이라고 했어] 공지되어 있던중, 터기 1725년(을미 영조 2년경)함평이씨와 홍주송씨가 입주 중 모현감이 행차 시 본동형세를 견망 하시고, 연화형이니 촌명을 연화촌으로 계명을 하라고…
원님이 저그서 오시다가 말씀을 했다혀. 화재가 빈번하여 전산(앞산)이름이 화성산이라 화재의 원인이 되니 추성산으로 계명토록 하여…(그랬다혀) 시행 후 화재가 없었고, 그 후 남원양씨 전주이씨 각 성씨가 입주하여 부촌으로 성행해 50여호 성촌이 되었다. 저거시 수목촌 전에 다량 식수 하였는데, 중간에 벌목되어 양목 55수만 생존햐. 약 400년…(시정거리 나무를 말하는 구만요. 오! 그 이야기여) 되었다고 그러네요.
현재 보호수로 지정 되어있는 수목 간은 서기 1928년도에 연화정을 건립했어. 당시 상량문서를 장전마을 이광수씨가 포문대부 성균관박사 자필로 되어있고. 당초에는 두 칸이었는데, 서기 1956년 차사고로 인하여 재건해 3칸으로. 중건 전 상량을 상하로 일중간으로 사용해서 상량문은 해곡리 호가 유석. 유겸중씨 필서이고. 전 상량문은 양유품 오동월 진수차정연빈회우 유차관호라고 써이썽. 현재 26호가 거주하고, 함평이씨 홍주송씨 양손 입향조의 10세손으로 선산을 수호하면서 당시에는 40~60호가 거주했지만 각자 이주하였고. 현재 산성이 화목하여 모범촌으로 진전하는 평화촌이다. 서기 20000년 초춘 연암 이승헌 기서.
(조사자 : 연화정 정자 상량문을 장전마을 이광수씨가 자필로 썼다구요?)
우리 할아버지랑 종안간이여.
(조사자 : 이분이 을사5적 암살단 단원이 맞아요?)
이분이 5적들을 암살 시킬려다가 죽지 않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여. 상량문은 장전서 가지고 왔어요. 유산정을 뜯어서.
(조사자 : 기정진의 수제자입니다.)
네 그래요. 장성 가서 배양되어 있어요.
(조사자 ; 연화정에 옥산 이광수 선생의 친필이 있다니까 놀랍습니다!)

창평의 신작로 건설
▲제보자= 이병해(남,1940년생)
▲줄거리= 현 창평의 중앙통으로 불리는 거리가 오천석을 가진 부자 박휴동씨의 땅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땅을 뺏겨 신작로 길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창평의 신작로가 언제 났냐? 그 집하고 관련이 된 게 그래. 지금 창평 우체국 밑으로 차 다니는 그길. 그것이 예전에는 요만이나(손바닥으로)했을 것 아니여. 신작로에 포도시 차라도 다니게 만들어 놓은 길. 1923년에서 1928년까지 신작로 공사를 해. 한 5~6년을. 1960년대부터 내가 사람들에게 직접 구술로 받아놓은 거니까. 왜 그리로 관통을 했느냐. 풍수 역학상기운기자하고 상통을 하더랑게. 주산의 혈기를 아주 중요시 했어. 주산을 비낄려면은 그길 뿐이 없다 그 말이여. 주산을 피할려면은 그러면은 삼지내를 떠나서 지금의 우회도로. 창평길을 나가면은 모르는디. 거기는 창평고읍의 소재지라서 불가침 영역이거든. 그러니 요길 뿐이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 뒤에 관방천이 있는데 거기는 협소하고 난공사이고.
예전에 밟고 다닌 길이 있었겠지. 그런데 현 제방은 일제 강점기에 그 길로 옮겨 놨겠지. 거기에 공로자들이 있으니까. 5~6년에 걸쳐서 그 길을 낼 때 지금 우체국 앞에서 면사무소 들어가는 골목 있죠. 이발소 모퉁이 은행나무 있고 그 도로 이쪽저쪽 농협 쪽으로 내려가면 삼지내로 들어가는 입구. 시장으로 터진 길까지 거기까지 박씨 종가 터여.
창평 부자가 몇이었느냐? 창평 부자가 춘강 고정주 그 어른이 만석꾼 부자.
(조사자 : 정말 만석꾼이었나요?)
만석꾼이 더 되지. 780정보 만평이 넘징. 3*7=21. 그 일본놈들 재산등록에 나와 있는 기록이
(조사자 : 어떤 사람들은 담양에 국승준, 고광표 씨 두 분이 만석꾼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던데요?)
그 밑에 이하로 만석에 미치지 못하는 부자는 열 분이 더 되아. 여기 담양 의원의 정명도 그 어른 할아버지가 녹동 만호로 하셨거든. 삼대에 걸쳐서 부자로 내려왔어. 읍내 서점 앞에서부터 봉산면 대추리 앞에까지 일원이 다 기여. 정재현 씨.
담양에 우송어른이 부자지만 그 밑으로 부자가 많아요. 창평도 그래. 두 번째 부자는 인제공 박휴동 씨 댁이 부자여. 오천석을 했다고 해. 오천석도 적은 게 아니여. 천석군도 부자라고 하는디. 창평의 세 번째 부자는 천석군 김응룡 씨 부자. 김응룡 씨 부자는 부자가 아니여. 잘해야 천석군이여.
박씨 부자는 뿌리가 있는 부자고.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일궈놓은 부자 인가 봐. 이야기의 논단이 신작로 공사인데 그 대목에서 박씨의 인제공 14대종택이 편입되아 버리제. 신작로가 나기 전에는 큰아들 장가를 보내 게 되면 내보낼려고 지은 집이 예전에 코너에 있던 목공소 자리. 그 기와집 안채 사랑채 건물주가 박석헌이제. 신작로 공사로 인해 살던 집이 허물어지고. 아들 장가보내면 주려고 지어놓은 집으로 싹 옮겨. 큰집을 그리 옮길 때 찍소리 못하고 23년~25년 사이에 옮겼단 말이여. 그 집은 일본 놈들한테 다 뺐겼다는 말이에요. 신작로 공사가 30년도에 무렵에 다 완성되아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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