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0-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1.02.0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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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기 생가

 

창평 장전이씨의 입향과 인물 이야기
▲제보자= 이병해(남, 1940년생)
▲줄거리= 추성공 이서가 대덕에서 유배생활 후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정착하면서, 왕손 전주 이씨 씨족들이 번창하면서 살다가 1710년 대덕에서 창평 장전리로 이형정이 이거하면서 장전이씨의 뿌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1506년에 연산군을 무너뜨리고 둘째 동생인 중종을 옹립해서 왕으로 앉혀놓은 것이 중종이거든. 중종이 중국 천자한테 인정을 받은게 중국에서 사절이 와. 서울 영천고개 홍재동 거기 가서 맞이하는 영빈관으로 거기 베알을 가. 궁에서 나와서 가마를 타고 중국 사신을 베알을 하러 거기에 간단 말이어. 또 반정 세력들인 고변한 정창손이가 있어갖고 낮에 생각하고 밤에 안되갔는가 꼬아바쳤어. 그래갖고 큰 사건이 벌어져버렸지. 동생은 연류가 안되아서 여기(창평)으로 귀향을 보내신 거여. 다음에 이서공이 14년만이 귀양에서 풀려. 한강을 건너오지 마라. 야서인으로 숨소리 내지 말고 살아라. 도성을 오지마라. 금족령이 내려서 여기서 산거여. 두 번째는 대덕에서 장전으로 오신 것은 1648년생. 이형정 어르신이여 이서공으로 하면은 6대손이나 될까. 이서공 6대손. 이름이 저울대 형(衡) 샘 정(丼) 형정 그 양반이 1710년에 장전으로 오면서 그 자손들이 산것이고 그 양반 형정공 손자의 형제가 첫째는 이휘노, 둘째 이정노, 이렇게 해서 지금 살고 있는 후손들이 그 형제분 자손들인데 첫째 이휘노 자손의 종손이 이승기 박사, 정노 자손의 종손이 이한기. 우리의 종손이지 두각을 나타낸 분은 이 두분이고. 이승기 박사는 한국 초유의 공학박사 이한기는 한국초유의 국제법학박사고
(조사자 : 집안 어르신 중 이원룡 장군은 어떤 분이었나요?)
이원룡 장군은 나라의 난리에 칼 들고 말 타고 군들을 이끌고 휘두는 장군이 아니라 왕족에게 붙여준 하나의 작호여. 관작이라든지 작호라든지. 작호여. 추성공으로서 양녕 형제분들, 순산군, 유산군, 추성군으로 해서 육대까지는 작호를 받아. 장전에 오신 할아버지의 아버지까지는 관작을 받어. 녹도 받고 도성으로부터. 그러니까 추석이 되면은 담양부사가 새 차라도 해가지고와. 여기도 담양 관할이거든. 담양부사가 대덕에 인사를 올 때 행렬이 거창 했다고 안해요.화양촌에 들어가는 입구의 소나무도 그래서 심어진 것이요. 기념수로 원님행차에 기념으로 가면서 심어진 거여. 지금은 구암으로 해서 지네 모퉁이로 돌아서 신작로 길로 가지만, 그때는 그것이 아니거든. 지금길이거든. 뒷산으로 많이 다니거든. 가다가 쉬는 자리는 집정자가 붙어서 동정도 있고 서정도 있고 이름들이 있거든.

창평 추담정과 추유제
▲제보자= 박영옥(남, 1940년생)
▲줄거리= 절산마을은 옛날에는 구모정과 절산사라는 절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구모정과 절산사가 폐허가 되자, 구모정 터에 추담정을 짓고 절산사 터에 함양박씨 월용문중 추유제 제각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야기= 추담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지금 현재 담양군에 2005년 비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정자입니다. 전통정자인데 1988년도에 이 마을출신 추담 박영옥이 옛날 구모정 자리에 다시 짓고 추담정이라 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동양사 강의를 하고 있으며 군 탐방객들이 방문을 하고 있거든요. 이렇게 송강정 식영정 거치면서 탐방코스에 들어가 있어요. 군 관광지도를 한번 보세요. 유곡리 절산마을하면은 추담정 표시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고, 제가 제 나이 80이 다 되었는데 마을을 탐방하는 방문객께 동양사 동양철학 풍수지리 ‘지리요결(地理要訣)’ 책을 써서 한 권씩 주고 있습니다.
마을에 절산사가 있다가 지금은 헐어 버리고 없다. 그런데 절산사 자리에 현재 우리 월용당 박용의 유적이 현재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건축이 되어 있어요. 절산사 자리에 우리 함양박씨 월용문중의 이름이 추유제라는 제각이 건립되어 있어요. 지금 딱 십 년 되었으니까, 2007년도에 건립되어가지고 있습니다.

창평 절산 5봉과 배의 형국 마을
▲제보자= 박영옥(남, 1940년생)
▲줄거리= 절산마을은 풍수 지리학적으로 바다위에 배가 떠 있는 형국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우리 마을은 원래가 절산 5봉하에 상유곡과 하유곡이 있었어요. 현재의 유곡리는 상유곡 현재의 해곡리는 하유곡 이랬었는데, 구한말에 행정구역개편과 동시에 하유곡을 해곡리. 거기에는 내곡과 얼그실이 포함이 되고, 우리는 절산 동서평일 일괄해서 상유곡을 유곡리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곡리에는 연화촌과 저 뒤에 기둥마을까지 포함해서 유곡리가 1,2,3구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 이 마을의 형성은 조선조 중종 함양박씨 월용당 이용이라고 써있는데, 여기에 있는 것을 참고 하시고요. 함양박씨 이홍이 홍문정자 경연·전경이라는 두 벼슬을 역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창평 용수리 월봉산에 월영정을 짓고 피신하고 있을 때, 그의 형인 이관이 담양부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이관은 절산마을 뒤의 산에 삼봉이라고 했는데 잘못된 것 이예요. 오봉이예요.
다섯 개가 보이지 않습니까. 절산오봉하에 천마유곡이라. 그래서 동편에는 천마산이 있는거예요.  두 봉우리가 좋게 거기가 천마산이예요. 그래서 거기에 천마정이라고 조그마한 정자가 있지요. 동쪽의 구봉산맥이 내려오다가 마을 뒤에 왕자산맥을 이루어 주봉이 되었다. 앞에는 서석산이 마주보이며, 동쪽에는 천마산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삼방산이 아담한 터로 이루어졌다. 절산마을은 배의 형국이라 샘을 함부로 파지 못해서 항상 식수가 부족했다. 배에 구멍이 뚫리면 침몰될 우려가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다.
마을 동쪽 골짜기에 쇠바위가 있는데, 마을 앞은 한바다이므로 쇠바위에 배를 매었다고 한다. 마을이 변화됨에 따라서 해방 이후로 절산 하에 창평북초등학교가 설립이 되아가꼬 지금 있지 않습니까.
(조사자 : 창평북초등학교가 몇 회까지 하다가 폐교가 되었나요?)
저는 4회 졸업생이고 제가 객지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 30~40회 정도는 됐을 겁니다. 한 40회 정도 까지는 나갔을 거예요. 현재 폐교가 되고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요.

창평 박휴동의 선비상
▲제보자= 이병해(남, 1940년생)
▲줄거리= 석상을 세운 박휴동은 앞으로 도래하는 세상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나라를 보존하기 힘들다는 정신을 석상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농협 뒤에 미륵도 그래. 미륵도 지금 가서 보면은 미륵으로 붙여져 있는데 그 상이 전형적인 두루마기 바지에 선비 상인데 모자도 갓도 아니고, 옛날 개화기 때 선비들이 쓰는 모자라는 말이여. 거기다가 만든 어른이 계셔.
창평박가 어른에 사헌부 감찰을 한 호가 인제공 박휴동이라는 어른이 계셔. 1845년생에 1917년에 돌아가셨어. 그 어른이 아까 말한 박석기 그 형님 되는 박석은 할아버지여. 창평박씨 14대 종손 박휴동이여. 그 어른이 사헌부 감찰을 하셨어. 철종에서 고종으로 넘어오는 교체기에 이 어른이 병자소 조약(인천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한 양반이여. 하지만 그 어른은 사상적 정체성으로 보면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여. 수국(보수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되 받을 것은 받아드리자)보수(옛것을 지키자)와 진보(세상을 따라 살자.)라 하고, 수국을 ‘동도서기사상’이라고 그려. 우리는 변한 것이 없되. 외국의 화약이나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자. 창평의 춘강 어른도 그 사상이여. 창평이 일찍이 신학문에 편성을 해가지고 한국 현대사에 빨리 뭐인가 함께한 양반들이라고. 선조들이 이끌어 준 것이여. ‘동도서기사상’이 창평에 빨리 유입 되았다고 봐야죠.
이 어른이 낙향을 해서 내려오실 때가 1876년이라고 하면 이 어른의 나이가 31살에 낙향한 양반이여. 벼슬을 5~6년 하다가 낙향한 양반이여. 출세도 빨리하신 분인데 이 어른이 낙향할 때쯤 춘강도 낙향해서 살고 있었어. 그 시대에는 춘강이 선배여. 근게 창흥의숙이라는 간판도 인제공(박휴동)이 붙여 줬는데, 그런 기록들이 일제 강점기를 오면서 석유지로 친일로 매도해가지고 기록이 없어졌어. 그리고 창평박씨들이 많이 구관아 말기부터 아전으로 흘렀는데, 토속적인 유지들이 그때 당시 배제를 했거든. 세금을 안내면 작살을 내버리고, 딸이 있어도 저것들은 안준다고. 아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상실을 해버렸제. 아전이라는 것은 원님일 때 공무원(비서실장)이여.
이 어른이 오셔서 거기에(농협 뒤에)선비상을 놨는데, 거기에 왜 선비상을 놨느냐, 왜 저렇게 만들어놨느냐. 하나의 창평 안방에 선비상으로 만들어놨다는 말씀이여. 갓 속에 탕립으로 안하고 그런 모자를 써서 해놨어.
앞으로 돌아오는 시대가 서양의 문물시대와 절충시대가 올 것이다. 탈 이미지로 변신을 했지 않느냐.
(조사자 : 박휴동 어르신이 직접 만드신 건가요?)
그 어른이 선비상을 세웠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 선비상을 보고 오늘날 후자들은 절충문화로 보고 우리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말자. 선비정신을 가지고 있자, 라는 그런 모든 억측들이 거기에 쏟아지죠. 미륵상이 아니라는 걸 말씀 드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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