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2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2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3.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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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종 가옥

 

송강정철과 문화유씨
▲제보자= 류진성(남, 1932년생)
▲줄거리=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시작되어 얼그실마을 와송당에 정철이 신방을 차리고 출사를 했다는 이야기와 사촌 김윤제가 외손녀 손주와 송강 정철의 성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송강정철이 결혼 후에도 남면에 성산마을이라고 하천 건너에 지실 거기 가면 광산김씨가 자자유촌 하거든요. 그 김씨가 인물도 많이 안 낳습니까. 김덕령이도 거기 출신이고. 여쪽에 가면 식영정이 있고 냇을 건너가면 환벽당이라고 있습니다. 거기가면 김윤제 그뷴이 그 때 당시로 봐서는 이 근방에서 그분만한 학자가 없었어요. 선비로써 학문이 아주 높은 분이였어요.
그분이 송강 정철이 그때 자기 아버지가 중앙에서 정치적으로 모함을 받으니까 자식을 데리고 피난을 댕겨. 그때는 남자가 무슨 일이 있어서 피난을 가더라도 부인은 안 데리고 가지만은 장자는 데리고 갔습니다. 손을 이을라니까. 송강을 데리고 구례에가 있다가 지실 쪽에 무슨 연고가 있었는가 모르겠지만 연고가 있었겠죠. 그러니까 지실 쪽에 와서 송강을 맡겨 놓고, 자기 아버지는 피신을 해서 다른 데에 가 있고, 근디 송강이 그때 15살 16살 먹었을 때 환벽당 밑에 가면 그때는 물이 상당히 깊었어요. 용소라고 있는디, 거기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디 아까 그 김씨(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밑에를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냇가에서 서광이 비치거든. 하인을 시켜가지고 그 소년을 데리고 오라고 했어.
데리고 와서 조단조단 물으니까. 송강 아버지 고향은 충청도가 있거든요. 양반이고 쭉 이야기를 들으니까 인물도 준수하고 자기가 봤을 때(그래거든.) 옛날에 학문을 한 사람들은 관상까지도 같이 했거든요. 사주도 보고 상당히 큰 인물이 될 것 같은디. 자기형편이 곤란하니까. 자기가 중매를 하게 되면은 여기서 성혼을 시킬 수가 있을 것 같은디. 자기 집안은 아무리 둘러봐도 송강한테 댈만한 처녀가 없어. 처녀가 없으니까 자기 딸이 유씨 문중으로 시집을 와 가지고 종가에서 따님이 살았어요. 말하자면 송강의 장모가 여그에 살았는디. 석헌 선생의 손부지. 손부인데 여기 사니까 아깝지만은 딸한테라도 해야겄다. 해가지고 송강을 데려다가 학문도 중간에 중단을 하고 했으니까 자기가 학문도 가르치고 한디. 재주도 비상하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 같으니까 여기(와송당)로 찾아왔어요.
와가지고 사랑에 가니까 옛날에 안 여자가 사랑방에 손님이 왔다고 해서 자기의 친부로라면 몰라도 보통 일가라고 할 때는 사랑에까지 나가서 인사하고 하덜 안 해요. 또 남자도 사랑에만 있다가 올수도 있고 안방에까지 들어가는 것은 아주 가깝거나 부모자식 간이라던가, 일가에서도 아주 가까운 사람 아니면 못 들어가요. 딸이 사랑에 까지 갔어. 친정아버지가 오셨다고 사위하고 같이.
(조사자 : 유촌외가구업중수 상량문이죠?)
네 상량문을 쓰고 근디 송강은 자존심도 강하고 성품이 곧은 분이기 때문에 처가에도 자주 안 왔고 벼슬해가지고 자주 안 왔는데 여기서도 송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벼슬을 할 생각도 안하고 원래 유가들이 굉장히 청백한 사람이고 거시기한 성품이거든 내림이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송강 아들은 외손자아니까, 정홍명이는 여기에 자주 다녔고 내왕도 많이 하고 통했지만은 송강하고는 자주 안다녔어.
단 여기 쌍교 밑에 가면 송강정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정자를 거기다가 지어가지고 거기에 다닐 때 그 때 길이 지금과 같이 신작로가 없기 때문에 여기 냇가제방으로 쭉 해서 여기 얼그실 우리 마을 앞으로 해서 내를 건너야 해요. 건너가지고 지실로 가요. 그렇게 되기 때문에 옛날에는 당나귀를 타고 댕겨. 마부가 끌고 댕기고. 그러니까 여기 가다보면 성덕부락 밑에 조금 내려가면 제방이 두 개로 갈라진 데가 있어. 거기다가 정송강 하마비를 세웠습니다. 이만이나 하게. (앉은키에 네모크기를 그린다)만일 여가 처가가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말을 타고 근엄하게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을 내려서 동산촌 마을 있는디. 거기 가서 다시 말을 탄다. 이것이여. 하마비 비석이 지금까지도 있을 거예요. (처음부터)거기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딴 사람이 갔다가 묶어두고 있는디. 정씨들이 다시 찾아가지고 정씨 서원 터. 거기 가면 하마비가 있어요. 그런 관계에 있었지 절대 송강을 성가시게 한 적도 없고 송강 덕 본 적도 없었죠.

석헌 유옥과 삼인대
▲제보자= 류진성(남, 1932년생)
▲줄거리= 석헌 유옥이 무안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단경왕후 신씨복위상소를 올리기 위해 담양부사 박상, 순청군수 김정 등이 강천사 초입에 있는 삼인대에서 인장을 나무에 걸고 죽기를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석천의 유년기, 청년기, 말년기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삼인대의 제삿날이 이달(9월 19일)입니다. 며칠만 있어도 거기 가야 된디 세 집안이 여그 삼인대에서 신비복위상서를 거기에서 썼습니다.
(조사자 : 단경왕후(중종비)신씨의 복위상서죠?)
네. 근디 그 세분(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중에서 우리 할아버지(유옥)가 계급이 제일 얕으지만은 무안 현감이었으니까. 순창은 군수고 담양은 부사고 연세도 21살에 대과에 급제를 했으니까 아주 젊었고, 근데 우리 할아버지가 문장으로 봤을 적에는 그분들을 능가할 정도로 필체도 좋고. 중앙무대에서도 그분들도 중앙무대에 있었지만은 이분은 중앙에서 쭉 있었는디, 문장이 거시기 한디 유옥 보고 쓰라고 했어. 상소문을.
그때에 그 상소를 쓸 때는 삼인대라고 하는 것은 각 관청에서 쓰는 관인 있지 않습니까. 관인이 그 사람의 명예나 계급을 대신한 거거든요. 관인이 없어진다고 하면은 모가지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큰 벌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에 관인이 없어진다고 하면은 근게 그 관인을 가지고 가서 말허자면 우리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리자 해서 세분이 거기다 걸어놓고. 세군데 담양부사인 순창군수인 무안 현감인을 나무에다가 걸어놓고 거기서 상소문을 우리 유옥 할아버지가 썼어요. 썼는데 끄떠리에 이름만 쓰겄습니까? 직위하고 이름을 쓰는디 박상이나 순창군수가 극구 만류를 혀. 자네는 독신 집안이고 더군다나 그쪽으로 피난을 와가지고 할아버지 때부터 와가지고 손으로 명맥이 이어진 게 자네 하난디. 자네마저 죽어버리면 안되니까 이름을 빼라. 아니다 죽으나 어찌나 같이한 것인데 왜 이름을 빼야 어찌거든지 두 분이 만류를 했기 때문에 본인이 작성하고 했지만은 이름을 빠지셨어요.
그래서 그 두 분은 징역을 살았거든요. 순창군수는 제주도로 고리 가갖고 거기서 병을 얻어가지고 그 양반은 돌아가셔버렸어.

창평 얼그실 마을의 옛 성씨들
▲제보자= 류진성(남, 1932년생)
▲줄거리= 얼그실 마을의 옛 토반 성씨 들은 고려때 평강채씨, 성주현씨가 먼저 출발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조사자 : 얼그실 마을이 풍수적으로 굉장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얼그실은 내동보다도 더 늦게 생겼어요. 늦게 생겼는디 단, 얼그실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 우리 종가 집입니다. 그 현씨들 성주현씨들.(그때 당시) 창평에 평강 채씨는 고려 때 전부 다 양반들이여. 조선조 때 와서 크게 두각을 못 나타내서 그러지 원래는 지금 창평 장흥고씨니. 지실정씨니 한 것보다도 현씨들이 굉장히 거시기를 했지요. 학문으로나 재력으로나 평강 채씨들도 마찬가지고. 조선시대 때 와서는 다 아스라져 갖고 크게 빛을 못 봤어요.
근게 송강의 외가가 현씨 집안 아닙니까. 현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는디 석헌(유옥) 그 어머니께서 원래 친정도 잘 살았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처가에서 그 집을 석헌 아버지의 처가에서 우리 유가 집 딸한테 집을 물려준 거예요. 그니까 석헌의 아버지가 훈도공 아닙니까 현씨 집안에서 순창 훈도공(석헌아버지)을 사위로 삼은 동시에 이 집을 사위에게 물려줍니다.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던 가봐요. 그 집(현씨 집안)이. 딸한테 물려 준거죠. 집터를. 거기가 있었고. 여그는 과거에 현씨들 집이 세채가 있었다고 해요 요짝에가 그래서 옛날에 집 지을 때 고해등같은 기와집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집을 지을 때 여기를 파믄은 옛날 기와장이 나오고 했는디, 여그 가서 저그 우게 쪽 말고 우리 유가가 사는데 요짝으로 가서 거기가 원해 현씨들 터여. 원터가 고려 때부터 원래 마을이 있던 터여. 거기가 함밭을 해서 함밭뜰인디. 함밭 같이 널룹다는 뜻이여. 여기 창평에서 거기가 제일 널룹죠. 고서 창평에서 담양은 담양 쪽 앞에서 대전면까지 쭉 이어지는 넓은 뜰이 있고 여기 넓은 뜰이 있기 때문에 하천이 여쪽에서 흘러서 무등산에서 내려오고 해서 합수가 된 게. 그럼 물이 다 들어오니까 농사를 못 짓거나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어. 나 태어난 이후에 내가 금년에 86세(1931년생)인데 내가 태어나서 논에다가 서숙을 심고, 메밀하고 한 디를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딴디는 (가물면)농사도 못 짓고 했는디 여그는 항시 논에 물이 풍부하니까 좀 보 역사한(보 수리) 그 정도 밖에는 없어.
그리고 그 대신 여그서 문제가 우리 유가 중에서 쉽게 계명(출세)을 못한 것이 석헌 할아버지 아들까지는 벼슬을 했는디 그 손자들도 소소한 사무관 정도의 벼슬은 했는데 벼슬이 끊어지다 보니까 재력이 없어요. 넉넉허들 안 혀. 재산이. 근게…
창평 고씨들은 창평에 들어온 지가 그렇게 오래된 역사가 아니에요. 첨부터 그 사람들은 재력이 있었어. 혼인들을 다 잘해가지고 처갓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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