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4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4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3.2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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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외동마을 양민학살 사건

제보자= 신현유(, 1933년생)

줄거리= 외동마을 사람들은 국군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몰랐고 합동으로 묘사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세월이 흘러 죽은 영혼들의 명예회복과 보상(배상)문제를 재판을 통해 일부는 찾았고, 일부는 아직도 억울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 당산제는 안 지내요. 우리 어려서 보면은 이쪽에 당산나무가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있었어요. 근데 인제 반란군이 그랬는가. 군인들이 그랬는가, 불이 나갖고 그게 없어져 버렸지. 겁나게 죽아 버렸어. 한번에 13분이 돌아가셨어요.

총살은 어디서 당한지는 모르지. 불나서 타져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그때 어리니까 무사통과했지. 마을일은 눈으로 안본 말은 못 하제. 흘러나온 이야기는 알제.

(조사자 : 13사람이 총살을 당했는데 마을에서 한날 제사를 모십니까?)

각자 지내요.

(조사자 : 보상을 받으셨어요?)

보상 이번에 받았어요.

그때 재판을 함서 조사기록을 해야 하잖아요. 양민학살로 받았을 거예요. 여수 순천 사건 나기 이전에 그 사람들이 지나갔잖아요. 그 애들이 모다 죽인 것 같아요.

이름은 없고. 우리 할머니는 부촌댁. 성안댁 시아버지 할아버지

(조사자 : 지금 마을에 몇 호나 계셔요?)

35호입니다. 해방되고 나서 625가 터졌어요. 그 사이에 여순 사건이 일어났어요. 국군들에 의해 많이 죽었어요. 빨치산에 의해 죽은 게 아니고.

(조사자 ; 이번에 재판을 받아서 많은 분들이 보상을 받았습니까?)

마을서 보상 받은 사람은 받고 못 받은 사람은 못 받고 마을에서 12명이 죽었어요.

반촌댁 할머니는 보상을 못 받았어요. 유춘댁, 반촌할머니하고 딸 2명하고, 세명이 죽었지. 옥굴댁, 옥굴양반, 성안댁은 못 받고,

(조사자 : 왜 이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돌아가셨을까요?)

몰라 불태와 버리고 총 쏴버린 게 돌아가셨는가. 하루에 죽은 것이 아니고 오늘로부터괜찮을 것이라고 애기들하고 노인들이 가만히있다가 죽어 버렸어. 사람들이 묘사를 지낸디, 묘사를 지내고 집에 돌아간디. 국군들이 빨치산들 밥 해준지 알고 나와서 불 질러 버리고 사람을 죽어 버렸어.

우리집을 질러버렸다니까. 동네를 싹 질러버렸지 내 집도 꼬실라버리고 신정기집도 꼬실라 버리고. 소도 죽어버리고 소도 질러버리고 날짜도 안 잊어버렸어.

 

순천반란사건과 625때 양민의 억울한 죽음

제보자= 최영완(, 1932년생)

줄거리= 신흥마을에서는 순천반란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4명의 마을사람이 희생됐다. 이유야 어찌됐든 희생자 4명은 국군에 의해 숨졌던 가슴아픈 기억이다.

이야기= (조사자 : 이 신흥마을을 들어와 보니까 담주산성도 있고 영천산도 있고 저쪽에 매봉산도 있고 마치 천해의 요새 같아요. 이 지세가 여가 살아보시니까 그렇죠?)

그렇죠. 마을 자세를 보면은 지금은 소나무가 많아서 형국이 잘 안보이잖아요. 산체에 나무가 우거지다 보니 산의 혈맥이 안 보인다는 그 말입니다. 근디 여그 와서 보면은 담주 마을이라고. 그래가지고 산을 좋게 평을 하고. 유산각이 요 앞에 있는디 거기서 놀다가는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어요.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 어느 14연대 어느 군인이 왔어요. 군인인데 잘 생겼어. 이 사람이 저그 우게 잔등이라고 있어. 거기에 가집에 하나 들어 왔어. 들어 와갖고 있는디 날이 새아도 안가는 거여. 근게 그 집 주인이 바깥으로 나왔제. 그리고 가집이라 가난하게 산분인 게. 그당시에는 반란군이 이사를 들어오면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래서 신고를 했어. 여자하고 남자하고 사는데 여자를 시켜서 어디 연락을 보냈든 가벼. 반란군이. 근디 창평지서에서 요리 출장 온 중에 경찰들이 여자를 만나 버렸어. 지대로 잡아 부렀지. 그래서 잡아갖고 조회를 하고, 반란군 신분을 물으면서. 그런데 여기 사람이 아니거든 주소를 모르니까, 이상하다. 순경이 와 갖고 총을 몇방 쏨서 나오라고 한디 나옵니까?

여수 순천 반란 군인이고, 군인들도 외무완을 가지고 있어. 여그는 칼빈이고. 띵띵띵~~팡팡한디 여그를 안 나와. 그런게 경찰이 안 되겠거덩. 안되니까 민간을 동원한 것이여. 민간을 동원해서 가는 거야. 거그를. 가가지고 문을 열으라고, 문을 열고 볼 때 쏠라고. 적이지만 반란군이 옳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냐. 핑야 거그도 동족이니까. 사상만 틀렸을 뿐이고.

군인에서 이탈할 뿐이지 대한민국 군인이여. 그 사람은. 어믄 사람들은 죽으면 안 된다. 민간인들은 비키시오. 그러고 경찰한테 총을 쏜 것이여. 경찰은 높은데서 쏘고 군인은 밑에서쏴. 집이 야차운 게 똑같이 걸거버렸으면 동네사람 절반이 죽었제. 지금도 그런 생각이 나요. 죽기는 죽었어도 반란군은 아니다. 오히려 생사람 집어넣어가지고 그때 이름도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인자 625전쟁 때에는 담양을 군인이 진주 할라고, 담양에 들어올라고 본 게로 담양서 인민군들이 총을 뻥뻥 쏜 거여. 근디 작전상 효과를 내기 위해서 총을 쏜 것이지.

그 사람들은 다 도망 가버리고 없어져버렸어. 사람 두명인가, 세명인가, 맨 후발대. 거기서 인자 총을 뻥뻥한디. 거기서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걸 표적한거요. 총 몇 방 쏘고는 안 된 게 그냥 들어와 버린 것이다. 한계 그레 안 되거든. 그냥 물러갔어. 그날은 물러갔는데, 그 이틑날 다시 포위 범위를 넓게 해서 왔어. 우리 마을은 해당이 안 되고 봉산면 쪽으로 해서 담양도로 쪽으로는 못 들어가고 여거까지는 들어왔어.

여기 농촌 사람이 여순바란사건 일어나듯 모르는 사람이 인민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들은 진짜 인민군 찾을라고. 그렇게 위장을 했지만은 양민학살 목적은 아니지만은 그렇게 한디, 양민의 지식에는 그것이 안 되거든. 벌벌떨고 , 동무.”한사람은 디지게 맞고. 심지어 동무하고 악수함서 협력한 체 한사람, 둘인가는 죽어 버렸어. 그래갖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담양은 나중에서야 진주하고.

(조사자 : 여기서는 여순반란사건하고 625때하고 네 분이 돌아가셨네요?)

그렇죠.

(조사자 : 그 후손들은 살고 계신가요?)

있었지.

(조사자 : 참 억울한 죽음이잖아요.)

억울한지 어쩐지 모르죠. 전쟁이니까 이렇게 죽는갑다. 생각해보서요. 반란군이 온디, 창평지서에서는 그대로는 못 오게 하고 총가지고 했는디. 인주전봇대를 쓰지 않았습니까. 사람으로 해서 전봇대를 세웠지 않습니까. 저짝에 온 사람이 저그 온다 하면 그 사람은 가고 그 다음 사람이 또 하고 그런 시절 아니요. 지금도 전쟁이 나믄 그럴란가 몰라도

 

독립유공자 신태윤 선생 일화

제보자= 신현유(, 1933년생)

줄거리= 외동마을출신 신태영씨는 곡성으로 옮기기 전 20대 초반까지 외동마을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창평의 부잣집 자식들 공부를 가르쳤다는 일화이다.

이야기= (조사자 : 곡성에서 살았던 신태윤씨 어떤 분인가요?)

여기서 태어났어요. 그 양반이 우리는 몰라도 한 20살 넘어서 갔을 꺼요. 그 양반이 몇 살에 가신지는 정확히는 모른디. 창평고씨들 돈 있는 사람들 아이들을 갈쳐써요. 그런디 애기들이 선생님집이라고 와서 본 게, 때가 돼서 밥을 해준 것이 도토리 밥을 해줘. 그런게 그 애들이 선생님, 이걸 잡수고 어떻게 살으셨소.” 하니까 내가 너희한테 해준 밥을 나도 같이 먹는디, 먹어라. 내가 먹는디 니그들이 못먹어야.” 그랬다고 그래요. 그러다가 창평을 올랑 날랑 넘어 댕기다가 곡성으로 갔어. 곡성에서 살다가 국회의원도 나왔어. 분명한 사람이야.(곡성에서 장안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31운동 때는 후송조치도 당하고.

(조사자 : 신태윤 선생님이 서당에서 가르쳤어요?)

하부동에서 살았제. 서당은 우리 큰 아버지가 했어. 정씨. 그 양반이 외동서 서당을 했어. 그전부터 일제 강점기 후에까지 했어.

 

고향을 사랑한 독립유공자 정동수

제보자= 공기수(, 1944년생)

줄거리= 전두환 대통령 정부 때 외동마을 출신 독립유공자 정동수씨가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면담할 때 마을의 숙원사업인 저수지와 행정이 불편하니 남면에서 창평면으로 이속시켜달라고 해서 80년대에 행정구역변경과 저수지가 건설됐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조사자 : 예전에 외동마을이 대덕에 속했죠?)그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행정개편으로 남면으로 편입이 되아서 어찌 다시 창평이 되었나면, 외동마을 독립유공자 정동수씨 경주정씨. 그분이 전두환 대통령이실 때 독립유공자로 해가지고 올라오라고 해서. ‘너희 고향에 필요한 걸 이야기해라그래가지고 우리 마을에는 창평현이었을 때 남면으로 편입이 되었었는디, 이 고향으로 오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고향 찾아 온 것이고.

(조사자 : 그러면 1980년대네요)

1984년 몇 월 달 될 거요. 그리고 다른 거 원하는 것이 뭐이냐면 고지대가 되가지고 물이 없어. ‘저수지를 하나 주십시오두 가지 것을 전두환 대통령 때. 이분이 청와대 가서 공사를 따왔어. 집 우게 방죽이 바로 정동수씨. 동녘 동()자 빼어날 수(). 높은 고지대라도 물 걱정을 안 해요. 그분 덕을 크게 보고 있죠.

(조사자 : 이분은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신분입니까?)

이때 당시에 고등학교를 다녔나 몰라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셨다고 합니다. 연세는 살아계시면 백여 살 되요,

(조사자 : 지금 후손들이 마을에 살고 계신가요?)

자식들은 미국 가서 큰아들이 살고. 자기 작은 조카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사자 : 함자가?)

정동조씨. 경주정가 월성공파

한말의병 박병선

제보자= 공기수(, 1944년생)

줄거리= 박병선은 고광순 바로 휘하에 있던 의병으로, 연곡사의병비문에 기록이 되어 있는 분이다.

이야기= (조사자 : 고광순 의병장 휘하에 의병장이 있다던데요?)

박병선 그분이 고광순 바로 휘하에 있는, 말하자면 고광순 비서 정도 되았는가 수장인가 되아요.

(조사자 : 무슨 박씨입니까?)

밀양박씨에요.

(조사자 : 지난번에 조사한거를 보니까 왜군에게 생포 되었다고 합니다.)

맞아요. 어디 내가 가보지는 않았어도 구례 연곡사 의병비문에도 박병선 의사, 그분 기록이 돼 있고.

(조사자 : 이 마을 사람이었는데, 박씨 문중에서 사형을 면하기 위해 엄청난 쌀을 줬다는데요?)

그래요?

(조사자 : 이 양반이 매일 두 번 조사를 받다가 45살에 고문으로 죽었다고?)

마을로써는 대단하죠. 마음 같아서는 내가 제력도 있고 하면은 그분들이 우리한테 해준 그런 노고랄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사당 같은 것을 해놨으면 쓰것는디, 그것을 할 사람이 없어요.

(조사자 : 의병장 박병선, 독립유공자 정동수씨가 나온 이유가 이 뒷산 주봉이 국수봉이죠?)

맞아요

(조사자 : 국수봉 정기를 받아서 이런 분들이 나온거를 보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신태윤, 곡성에 독립유공자 그 분도 여기서 나간 사람입니다.

 

고수부와 무정면 성도리 절 이야기

제보자= 김상오(, 1942년생)

줄거리= 무정면 성도리에 있는 현재 신학대학교 터가 옛날 고수부의 절터인지는 몰라도 고씨 성을 가진 여승이 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승 사후 외손자가 다니며 관리하였으나 외손자마저 죽고나자 절터에 신학대학이 들어서버린 이야기이다.

이야기= 무당은 많이 안 살았어도 성도1리 뒤에가 절은 하나 있었어요. 그 시방 대학교 지은데. 거기가 절터여. 지금 신학대학교 있는 데가. 절이 없어져 버리고 대학교를 지었더라고.

(조사자 : 고수부라는 여자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고씨는 그 절에가 있었어. 절에서 설치를 했어요. 개인이.

(조사자 : 신학대학 있는 그 자리에 절이 고씨가 만든 절이었어요?)

. 고씨 개인 절이었어요.

(조사자 : 고씨가 여자였어요?남자였어요?)

여자.

고것이 우리가 알기로는 거기에 여자 스님이 살았어요.

우리 그 절에 놀러 댕김서 봤죠. 그전에는 모르지.

(조사자 : 제가 일기로는 그 자리가 고수부라는 여자 분의 고향이예요.)

그 양반밖에는 안 살았어. 고씨가 그 절에서.

(조사자 : 고수부 딸일 수도 있어요.)

, 딸이 있었다는 말은근디 창평서 사는 외손자가 와서 관리를 했어. 그 뒤로 그 분이 관리를 하다가 죽어버렸어. 그 외손자가 고재성이여. 그 사람도 젊은디 죽었어. 지금 살았으면 일흔한여. 진작 죽었어.

(조사자 : 그 절 고씨 여자스님?)

그전에 그 스님은 거기서 살 때 우리가 많이 가서 봈지. 그 후에는 인자 몰라.

(조사자 : 그 절은 없어져 버리고 신학대학으로 변해 버렸어요?)

글지요. 절이 폐지 되아버리고 신학대학을 지은 거여. 고씨라는 사람은 거기 밖에 안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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