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7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7
  • 자료제공= 담양문화원
  • 승인 2021.05.0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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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 옥천사
대덕 옥천사

 

옥천사 이야기
▲제보자= 신형남(남, 1938년생)
▲줄거리= 화엄사가 옥천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말로만 전해져 오 있다. 옥천사 샘에서 손님 수대로 밥이 나왔는데 스님이 배가 고프자 거짓말로 손님이 열 명이 왔다고 거짓말 하고 실컷 밥을 먹은 후로 빈대가 끓어 망했다는 옥천사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야기= 옥천사라는 절이 있긴 있었다는데 내가 알기로 옥천동에 사람이 있었으면 무슨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 증거가 없더라고. 옥천사라는 이름만 있지. 기왓장 같은 것 절터 형식은 있지만 글자로 된 것이 없어. 구례 화엄사로 가야 찾는다고 그려. 저 우에 옥천동이라는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글자가 있고 지금 두메마을 식당 사장이 공사를 하다가 드러난 돌이 있는데 그 돌에 옥천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어. 옛날 어른들 말씀이 어떻게 된지는 모르지만 옥천사가 큰집이고 화엄사가 작은 집이라는 것이여. 그래서 화엄사에 옥천사의 기록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
(최덕호 : 아부지(최판열)랑 신형남 어른들이랑 구례화엄사로 관광을 하러 갔는데 그때 어른들 이야기가 바로 이 화엄사가 우리 동네 옥천사에서 나왔다고 했어요.)
문학리 학자가 많이 났다는 말은 잘 모르겄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겄는디 문학리라는 이름과 마을이 잘 안 맞어 . 일본 놈들이 와갖고 마을 유래를 만들면서 마을 사람들한테 듣고 지었다는데 뜻이 안 맞아. 그건 아니제. 이 당산나무가 오백년 된 것인데 문학리라고 명명한 것은 옥천사와 관련이 된 것이여. 옥천사에서 학승들이나 학동들이 여기서 공부했다는 것 아닌가?
문학리가 다섯 개 동인디 마을 하나하나가 이름이 다 있어 학동에스는 여기를 웃동네라고 하고, 저 건너를 반문제라고 해. 여기가 양반이 산다고 해서 여기는 안양반(진짜 양반), 저짝은 쬐께양반이라고 했어. 저쪽에 가면 원님이 쉬었다가는 동네라고 해서 원기동이라고 있어. 원님이 청평에서 옥과로 건너갔지. 우리 동네보다 먼저 생겼다고 그래 옥천동은 처음오신 스님이 절을 질 때 샘에서 물을 뜨다가 밥을 지었는데 한사람 밥을 지은디 “손님 한사람이 왔습니다.”라고 하면 그 양반 밥이 나오고 “손님 세분이 오셨습니다”라고 하면 세분 양반 밥이 나왔다고 그래. 그래서 옥천 샘이 좋다고 그래. 그라믄 절이 왜 망했냐? 스님이 배가 고픈께 손님도 안 왔는데 “열사람 손님이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열 사람 밥이 나와서 배가 터지도록 묵었는데 이때부터 빈대가 끓기 시작했다고 그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옮겼다구만.

용대마을 석교
용대마을 석교

용대마을 유래
▲제보자= 여정선(남, 1939년생)
▲줄거리= 만덕산 줄기가 용대마을 채도시에서 승천했다고 해서 용대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마을 노인들이 나무해서 창평장에 내다 팔면서 힘들게 자식들은 키웠지만 용대마을 선산바람으로 나가서 잘된 손들도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나는 이 마을에 지금 노인 회장인디 68년도에 왔어. 옛날에 이 마을에는 문씨들이 먼저 들어왔대요. 여가 피난골인데 가작골에 일곱 집에 살았다요. 그후 동네가 번창하면서 저 산 이름을 채도시라고 불렀다요. 이름이 있는 산인데 저 산이 6·25때 곶치가 있었어요. 거 경찰들이 저그 산께 여그서 밥 해서 주고 그랬다우. 저기 유산각 있는 자리에 또 곶치가 있었어요. 그러믄 왜 용대라고 불렀는가? 만덕산을 타고 내려와서 여기 채도시에서 용이 올라갔다고 해서 용대라고 불렀다우. 어른들한테 들은 말이지. 채도시 옆으로 산정리로 넘어가는 길인데 옥과에서 장날 소를 사서 저 재를 넘어 산정리로 갔다우. 산정리 사람이나 용대 사람이나 질마재(송진)를 넘어서 옥과장을 다녔지. 가자골을 넘어 수양산을 지나 입석 가는 길이 있는데 여기 사는 노인들이 없어 산게 나무를 해다가 창평장에 내다 팔았다우. 나무 팔아서 애들 갈키고 그랬지. 상운 지나서 비탈길 넘어 창평장 가는 길이 있어요. 이 마을에는 대덕면 면장, 농협 조합장 한명 씩 나왔구만. 다 고인 되었지. 용대 마을에 선산은 있으나 나가서 사는 사람들 중에 판사도 나왔다고 그래. 최공렬 씨 아들 최귀현이 대전에서 현직 판사라고 하더구만.

황장군 바우 이야기
▲제보자= 박진기(남, 1927년생)
▲줄거리= 일제 강점기 때 황장군 묘가 있었는데 일본 놈들이 유물 같은 중요한 무엇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묘를 팠는데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지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청운동 마을 뒷산에는 장군 바우라는 바우가 있어. 왜정 때 이야기야. 황장군과 관련이 있는다고 그래. 일본 놈들이 우리가 쓰는 놋그릇, 수저 등을 모두 다 압수해 갔는데 모자르니까 장군 바위에 틀림없이 장군이 가지고 있는 칼 같은 것이 있을 것 아니냐 해서 장군바우를 깨기 시작했다고 그래. 바우가 어떻게 생겼냐 하믄 깨다 보니까 바위가 두 조각으로 뽀개져 버렸는데 그 바우 안에 멍석이 있었데. 그 바우에 황장군을 넣은 것 아니냐. 그래가지고 그 바우가 지금도 떨어져 있어. 대덕 저짝에 성곡리라는 마을이 있어. 거기에 왜정 때 지금으로 말하면 파출소가 있었어. 거기 파출소 소장이 장군 바위를 깰 때 입회를 했는데 가을에 파기를 시작했데. 어느 가을날 아침 8시에 땅을 파기 시작해서 11시쯤 되었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겨. 번개불이 치고 구름이 캄캄해지고 그런디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이 구경하고 있다가 도망을 나왔지. 그 바우를 올라갈라믄 나무를 잡고 올라가야 되는데 내 나이가 11살인가 12살인가 묵었을 때여. 막상 땅을 다 파고 보니까 아무것도 없어. 허쟁이여., 일본 파출소 소장도 장군 물건이 있는 줄 알았는디 없다고 하면서 벼락칠 때 황장군이 물건을 농바우로 다 가져가부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여. 장군 바우 위에 3~40m 떨어져서 황장군 묘가 있어. 한창 뒤에 장군바우 발굴단이 왔어. 황장군이 가지고 있는 보물이 틀림없이 어디에 있을 것이다. 하고 파 나갔는디 보니가 먼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황장군 묘로부터 10m 떨어진 곳에 황장군 유물이 있었다고 그래. 그 발굴단에 우물을 파 가버렸다고 혀. 우리는 파간 것은 못 봤어. 그러나 파가버린 자리는 봤지. 지금도 가보면은 장군바우가 두 조각 나가지고 있어.

6·25때 사람이 안 죽은 마을
▲제보자= 박재규(남, 1933년생)
▲줄거리= 상갈마을은 반란군 퇴각 후에 박병홍씨가 “도망간 사람은 다 죽었으니 우리 마을 사람은 절대 도망가지 마라” 고 잘 대처하여 희생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6·25때 우리 상갈 부락에서는 안 죽었었지. 18살 묵어서 전부 소개를 나갔어. 하갈에서는 많이 죽었고 우리 부락에서는 안 죽은 것이 뭐냐문 밤손님인 반란군들이 마을에 있었거든. 군인들이 온다 근께 아랫마을 하갈에서는 반란군들과 함께 피신을 했단 말이여. 군인들이 이 연락을 받고 들어왔겄제. 그래서 40명 가차이 죽었다드만. 그런데 우리 마을은 박병홍 중부님 그 양반이 말하자믄 “전에도 도망간 사람은 다 죽었으니 우리 부락 사람은 절대 도망가지 마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그 양반이 꽉 눌러놔서 한 사람도 안 죽고 무사히 넘겼지. 나는 요 앞집에 살았지. 이 집터는 백부님이 살던 집인데 성주한지 3년 밖에 안됐어. 6·25때 경찰이 들어와서 집 불살라 불고 대덕 만덕초로 소개를 나가서 3년 살다가 다시 들어왔지 참말로 고생들 많이 했어.

사라진 갈전장 이야기
▲제보자= 신현택(남, 1937년생)
▲줄거리= 40년 전가지만 해도 갈전에  5일장이 섰다. 창평자이나 옥과장으로 가지 않고도 각종 생필품 구입이 가능했던 사라진 갈전장은 처음에는 씨름판이 열려야 장이 섰는데 그 후에 정기적으로 5일장이 섰다.
▲이야기= (조사자 : 어르신 갈전장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갈전장은 40년 전까지 섰어. 내가(제보자 임형학) 월곡(갈전 건너편, 화순 북면 소재)에 산 것이 40여년 전인디, 월곡서 2년 살다가 운산으로 왔지. 술 묵고 싶으면 갈전시장으로 나갔어. 엄달섭(86세. 작고) 그 냥반을 내가 잘 알제. 그대는 내가 막둥이였어. 그때 갈전 할매(작고)가 생선장수를 했어. 내가 피꼬막을 많이 사묵었는디 내가 항상 떨이를 했지. 화폐개혁 하기 전이라 아마 몇 천원 줬지.
갈전시장은 별거 없었어. 그래도 곡식, 고무신장사, 티밥쟁이, 한약방(강종식이가 했제), 하갈 최병환이가 농약장수를 했지. 있을 것은 하나씩 다 있었어. 장이 솔찬히 컸어. 창평 최만수, 김선옥, 진술이가 갈전장에서 미곡장수를 했어. 진술이는 나(제보자 신현택)보다 한 살 더 묵었는디 지금도 미곡장사를 해.
우시장은 안 열렸어. 우시장은 옥과, 창평에 있었제. 지금 경인식당 자리는 술집 자리였제. 그때는 남치 t는 젊은 여자가 술집을 했제. 여러 간대 술집이 있었지.
씨름판은 갈전장을 세울라고 열었제. 씨름판이 열리면 갈전장이 열려. 갈전 씨름판에서 우리 운산사람이 상씨름을 했어. 곡성 오산의 탑동 사람들 거기는 교편 잡고 배웠다는 사람들이 씨름도 겁나게 잘했어. 근디 우리 마을 김길만이라는 그 사람이 상씨름을 해가지고 한판 야물게 묵었네. 그 사람이 허리심이 좋아. 한 여름에 짚가마 1가마가 100근이 넘어. 그것을 이빨로 물고 한없이 가. 탑동 여씨 장사를 안 때려 눕혀 부렀는가. 그때 운산 좋았네. 김길만이 그 사람 얼마 전에 세상을 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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