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8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8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5.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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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호 명창 태생지
▲제보자= 오봉록(남, 1962년생)
▲줄거리= 한승호 명창을 직접 뵙는데 본인 이름으로 운산리가 자기 탯자리라고 말했다. 고향방문을 약속하고도 끝내는 병환으로 오지 못하고 별세했다.
▲이야기= 보편적으로 한승호 명창의 주소는 광주시 금남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겨레신문 정대하 기자가 석사학위논문에서 ‘예인들의 혼맥과 이동’을 밝히면서 한승호 명창의 태생지는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라고 처음 언급합니다. 정대하 기자가 우리 마을에 와서 보고 이곳이 맞다고 확인도 했습니다.
지금 약초 재배를 하고 있는 김문술씨가 사는 집 헛간과 그 옆 2층집 사의 23평정도 되는 아주 쪼끄만 대지가 한승호 명창의 부친인 한성태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도 확인했습니다. 부친도 소문난 명칭이었다고 합니다.
요 문제를 아주 객관적으로 보면 옛날 예인들은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어느 곳이에서 얼마 정도 머물렀는지 정확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5~6년 전,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제가 마을 분들과 함께 서울 정릉에 살고 있던 한승호 명창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승호 명창도 ‘운산리가 태생지가 맞다’고 직접 확인해 주었습니다.
한승호 명창은 우리 어무니랑 동갑인데 묻지마 갑자생이시니 87~88세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정릉 집은 한승호 명창 적벽가 전수소라고 쓰여진 개인집이었습니다. 담양 봉산면 출신 전통예술기획가로 활동하고 있는 진모씨가 명창방문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인터넷 유튜브에 활동 영상을 많이 올려 났는데 한승호 병창 정릉 집에 찾아가 소리를 듣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담양군민의 날이나 우리 동네 백중제에 초청해 보려고 찾아뵙는데 한승호 명창의 본인 입에서 운산리가 탯자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눈물을 지으면서 운산에 가보고 싶다고 하는겁니다. 가슴이 찡했어요.
옛날 아주 어렸을 때 아부지 손잡고 운산에 온 적이 있는데 마을에 화전놀이가 열렸답니다. 동네사람들이 어찌나 재미지게 놀던지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 운산에 한승호 명창과 동갑인 엄일섭 어르신이 사셨는데 어렸을 때 창평 장 갔다가 산정 고개 길을 넘어 오는데 하얀 한복을 입고 오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한승호 명창의 부친인 한성태 명창이었다고 합니다.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예순 명창이 같은 집안인데 한씨네 집안은 원래 옥과에서 활동하다가 운산으로 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가지고 남면 지실의 박동실 명창과 결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통상 옥과 순창은 동편제 소리라고 하고 박동실 명창은 광주 서편제 소리라고 구별하는데 사실 박동실 명창의 소리는 서편제 소리하고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소리를 담양소리라고 불러야 한다고도 합니다. 박동실 명창이 월복하는 바람에 존재도 사라지고 소리도 사라지고 제자도 사라지고 해서 담양소리의 맥이 끊겼다는 겁니다.
담양소리의 특징은 동편제와 서편제가 만나는 소리라고 합니다. 한승호 명창의 소리를 통상 서편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를 하나 그 소리의 독특함 때문에 한승호 소리라고 평가들을 합니다. 한승호 명창이 적벽가 인간문화재 5호이신데 그소리의 특징을 담아내는 제자가 나오지 않으니까 한승호 적벽가 인간문화재 5호 전수자가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한승호 명창 집안은 불행하게도 모두 절손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금의 명인 한영호 선생이 한승호 명창의 형님인데 손이 하나도 없어 한씨 집안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폐족이 된 것이죠.
정릉 집에서 뵐 때 보니까 외길 인생의 회한도 많고 박동실 명창의 제자라는 자부심도 대단 하더라구요. 자신의 후계자가 나오지 않은 것도 많이 아쉬워하더군요. 한 집안 출신인 한예순 명창도 박동실 명창의 제자인데 박동실 명창의 제자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명창은 한예순 명창 혼자라고 합니다. 다들 쉬쉬한다는 거죠.

대덕면 저심마을 한지공장 이야기
▲제보자= 오봉록(남, 1962년생)
▲줄거리=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구한말 이전부터 한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운산마을은 현재도 닥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마을에 선정비가 있는데 세금감면 비다. 그때 당시에는 종이 물품으로 세금을 내곤했다.
▲이야기= 우리 어렸을 때 우리 집 뒤 바위 쫙 깔려 있는 곳을 지소(紙所)통 거리라 고 불렀는데 종이 으깨는 시멘트 통이 있었고 제가 집 짓기 전에 살았던 작은 집 자리는 종이를 말리는 곳이었답니다. 광주에서 큰 목재상 하던 분이 살던 집인데 집을 정리하다 보니 그을음이 유난히 많아 물어보니 거기서 종이를 말렸다고 그러더라구요. 지금 우리 마을 운산정 앞에 비석이 여러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세금감면 선정비입니다. 옛날에 세금을 종이로도 납부를 했는데 납부할 종이를 줄여주었던 모양입니다. 하갈마을(갈전리)에도 선정비가 있습니다. 운산리에 있는 한지공장에는 임실에 사는 종이기술자들이 주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의 장경홍 아부지도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70년대 마을특색사업을 하면서 한지를 다시 만들어 보자고 해서 지금 한지 체험관 건물 밑 엄기철씨 땅에 새롭게 현대식 종이공장을 만들어 오리지날 창호지도 생산하고 일반종이를 물에 섞어 만든 한지도 생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종시시장이 쇠락하자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양잿물도 많이 사용하여 물 오염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먹는 샘물에 영향을 끼친다며 항의도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송산리에서 내려 온 물만 창호지가 된다고 합니다. 물이 순해서 그렇다고 들었는데 산정리 물로는 창호지를 못 만들었다고 그래요. 우리 운산에는 닥나무 밭이 많았는데 닥나무가 마을 소득 밑천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닥나무 저(楮)를 사용하여 저심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마을 이름은 지형이 새끼 돼지가 어미 돼지의 젖꼭지를 물고 있는 형세이기 때문에 돼지 저(猪)를 사용한 저심마을이라고 부른 것이 일반적입니다. 한지 공장은 오랬동안 운산리의 유일한 공장이었던 셈입니다. 언제 누가 한지공장을 세웠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구한말에 종이를 세금으로 냈다고 하니가 오래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운산리는 양반촌이 아니라 상민총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대전면 갑향리는 향. 부곡, 소에 해당된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운산리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대덕 수양산 호랑이에게 호식당한 이야기
▲제보자= 박두섭(남, 1938년생)
▲줄거리= 수양산에 호랑이가 살면서 마을의 조씨 성을 가진 어른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대덕면 입석마을 뒷산이 수양산이여. 어른들 이야기로는 수양산에 호랑이가살았어. 호식을 당한 분이 계셔. 분명허니 실화인데 오래 된 어른이라 이름은 모르는데 조씨여. 이 양반이 여름에 문턱을 비고 잤는데 이 분이 장사 체격을 가진 분인데 호랑이가 이 양반을 물고 가는데 문턱이 밀려났다고 그래. 그 당시 호랑이가 호식을 해 간다는 말이 많았고 또 호랑이가 대나무를 무서워한다고 그래.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를 치면서 호랑이를 쫓았는데 이미 조씨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어 부렀다는 거여. 그 아들을 내가 알아. 그분도 고인이 되었는데 조성렬이라는 분이여.

뒷산 일자봉과 앞산 이야기
▲제보자= 오봉록(남, 1962년생)
▲줄거리= 마을 뒷산 형국이 한일자 모양으로 큰 인물이 나올 지세인데 중국의 이여송이 갈대 잎으로 바위를 잘라내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운산리 뒷산 일자봉은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전해져  내려온 자리인데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이 갈대 잎으로 한 번에 내리 쳐서 잘렸다는 이야기이고, 앞산은 떠억 가로막혀 있어서 운산에서는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여송 장군이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기록도 없고, 앞 산 역시 큰바위 얼굴로 해석해도 무방한데 사람들이 피난을 와 숨어 지내면서 신세 한탄조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자연은 가만 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의 해석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좋은 예가 아닌가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순박해서 큰 소리치고 산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자괴감이 아주 심했습니다. 거꾸로 보면 굉장히 순박한 사람들이라는 반증인 셈이죠.

입석과 당산제를 보존한 이야기
▲제보자= 박두섭(남, 1939년생)
▲줄거리=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들어온 광산김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서 있는 돌을 마을 곳곳에 배치했다. 당산제도 돌을 향해 돌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야기= 입석은 한자로 설립, 돌석입니다. 입석(立石)이죠. 입석은 임진왜란 때 피난지입니다. 선조대왕 때 광산김씨가 들어왔다고 그래요 그분이 미신을 숭상했던가 봐요. 이 양반이 마을 입구에 마을 수호신으로 9척 돌을 세워 놨어요. 지금도 7~8개의 입석이 마을 입구에 있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돌을 당산으로 모시고 있어요. 돌 옆에 나무를 심어 났는데 딱 한 돌에만 나무가 없어요. 새마을 운동 당시 우리 마을에 세대수가 80호 정도 되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나선 일인데 현수막에 우리 마을에 주민등록(등제)된 마을 주민들 이름을 써가지고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앞으로 당산제를 안 지낼려고 하니 당산님께서 양해를 해 주십시오.’라고 걸어놓고 음식을 차려 당산제를 모실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극구 반대를 해서 당산제를 폐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존속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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