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9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39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5.18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무정면 봉안리 은행나무 / 죽산매구농악

무정면 봉안리 은행나무

 

무정면 봉안리 은행나무 전설
▲제보자= 김갑수(남, 1939년생)
▲줄거리= 천연기념물인 봉안리 은행나무는 나라에 국난이 있을 때 소리를 내어 울었고, 마을에 도둑이 들어 나가지 못하고 빙빙 돌게 했다는 전설이다.
▲이야기= 그전에 어르신들이 뭣허면 여기서 한 100여 년 전에는 저 너머가 마을이 있었어. 매각제(마각제)라는 데가 (금성면) 외추리로 들어갈거시여. 거기 최씨라고, 최도둑니라고 말이 있는디, 최씨가 이 마을에 넘어와서 도둑질을 해가지고 가면 새벽이 되면 도둑이 못가고 당산제가 쎄가지고 뱅뱅 돌고만 있어. 가들 못하고 메바위라고 그전에 당산제를 지냈능갑써. 보리방아를 찧어서 먹었거든. 물방아는 연자방아고 메방아여. 말로 끼워서 구멍에 넣어서 보리를 갈아서 해먹었는디. 도둑질해서 뱅뱅 메방아 나무를 돌고 있드라 혀. 마을 노인 둘이 발견하여 도둑놈이라고 청을 하여 수사기관에 넣었겠제. 주제소가 있었거든 일제 강점기에.
나무가 6·25 전에 어르신들 말에 의하면 그 전에 5일 전에 늘 울드랍디다. 웅웅 소리를 내서 늘 울어.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으로 알았제 그러더니 딱 6·25가 닥치고 보니까
“나라가 손실이 있을라니까 큰 나무도 울었구나”
그런 뭣(생각)을 가졌죠.
(조사자 : 진짜로 나무가 울었어요?)
진짜로 울었으니까 울었다고 하제 안 운 것을 울었다고 할랄딥까? 나는 우리 은행나무만 그런지 알았더니 화순에서도 티브이 거기서도 나오드만 웅웅 울었다고…나같이 앉아서 말허드만….
‘큰 나무들은 그런구나’ 그랬제.
조정기씨라고 면장을 했어요. 6·25 전에 있었는디 그 분이 교회를 믿었어 예수교를. 교회는 정반대여. 당산제를 면장 꽤나 한 게 권력이 쎄겠소? 못해부렀어.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모시다가 그대로 사라져 부렀어.
서당에를 5살 묵어서 다녔어. 저 동편이라고 손판길씨가 선생님인디 무정초 가기 전에 건물 하나 지어놨소 좋게. 그 경계여. 거기 좋은 샘이 있는디 막 솟아 올라와요. 수랑샘(수령샘)이라고 지금도 확확 뒤지업져 올라온디 수령샘에서 아주머니가 물을 지르고 있는데 노승이 지나가다 허는 말이
“아주머니 저 큰 나무 당산제 모십니까?”
“안 모셔요”
“허허 그러면 젊은이들이 성하지 못할 것인디. 성하지 못할 것인디.”
그분이 그런 것을 알았어. 여기서 최희권이라고 6·25후에 군대를 갔었는디 양구에서 근무를 하다가 순창 금과면 방축리로 약혼을 했어. 약혼을 해놓고는 군대에서 죽어 부렀어. 그때만 해도 이런 말해도 괜찮지만 성환병으로 죽어부써. 성관계가 생낙나서 못허고…. 그래갖고 그렇게 본게 큰 나무를 본게 젊은 것들이 성하지 못한 것이 그래서 당산제를 안 지내서 그런가 싶고 했어.
그 뒤로는 우리 마을이 여간 빈곤했소. 나보다 몇 살 더 자신 양반들이 굿을 칠라며는 먼저 샘물이나 나무에 막걸리 한 병 사다 먼저 술은 한잔 괴고 인사를 드리고… 사방샘이라고 있었는디(거기서 굿을 쳤어)

무정면의 대나무공예 마을

▲제보자= 김갑수(남, 1939년생)
▲줄거리= 무정면에서는 집 옆의 대나무숲에서 대나무를 이용해서 각 마을마다 제각기 다른 종류의 가내수공업이 이루어져 대나무공예마을을 형성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요것이(은행나무 부근 본인의 집 옆의 대나무숲 가르키며) 지금 누가 보면은 얼마 가치가 안 되지요. 하지만 나는 일 년이면 여그서 몇 백만원씩 빼묵어.
지금도 다하고 있어. 히트 쳐부요 내 바구니. 담양가면 아조 내 바구리 하면 다 알아불지라우. 상회 가서 내 말하면….
(조사자 : 그때 당시 가격하고, 지금의 가격은 얼마에요?)
그때 당시 한 10년전, 20년 전에는 칠천 원 하던 것이 지금은 만원 정도 그렇게 해노쇼. 흐흐…. 세금 나올까 무순게. 한 이만 원씩 가요.
그런게 마을마다 다 틀려요. 성도리는 복성바구니 만들었고. 우리 마을(봉안리)은 끈다리. 보통은 말헌디 갱기바구리라고 명칭이 다 있어. 덕곡리 가면 고리짝 결혼하면 옷 넣어갖고 다니는 고리짝, 떡 하면 뭣한거. 영천리 가면 치, 까부는 치, 오룡리 가면 밥 바구니, 샛밥 내가는 밥바구니, 내당은 바구니 헌재가 얼마 안 되지마는 동강리는 미소쿠리라고 그것 했고….

담양의 죽산매구
▲제보자= 김종혁(남, 1966년생)
▲줄거리= 죽산매구는 무정면 오봉리에서 시작되었다 하여 죽산매구로 불리며 마을을 다니며 기량을 뽐내 이기면 곡식과 돈을 벌어와 마을 기금으로 사용한 거에서 유래한다. 농악 한마당으로 마을의 안녕과 운수를 빌며 축원하는 놀이다. 김종혁씨가 전수 받아 맥을 이어가며 담양만의 독특한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이야기= 원래는 오봉리에서 굿이 시작 되었는데 정사동 어르신이 내가 만나 살아 계실 적에 복원하여 죽산마을에 계셨기 때문에 그냥 죽산매구로 했구요. 그리고 계보나 유래를 보면 최초로 오봉리에서 굿을 칠 때에는 송보호 어르신인데. 그분은 아직 나이 연세라든가 모르거든요. 정사동 어르신께 들었는데 송보호 어르신이 용면 장찬리에서 사시다가 오봉리로 이사 오시게 되었어요. 농악 계통은 원래 굿을 더 잘 치시는 분이 상쇠를 하게 되었어요. 그랴꼬 이분이 기량이 월등히 뛰어나다보니 그 마을에서 상쇠를 하게 된 거죠. 그분이 쭉 상쇠를 하시게 되면서 같이 그 뒤에 최복초 어르신이 후계를 이어 받아가지고 송보호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최복초 어르신이 쭉 허시다 공병만 어르신한테 물려 준거죠. 제가 처음 조사를 갔을 때 공병만 어르신께서 살아 계셨어요. 그때 연세도 많이 되셨고 몸이 아프셔서 꽹과리 치는 모습이라든가 그런거는 못 찍고 이야기만 듣고 정사동 어르신이 그분 조카거든요. 상쇠를 이어 받았다가 그때부터 죽산마을로 가서 정사동 어르신한테 십년정도 쫓아다니면서 이 굿을 복원하게 된 거죠.
(조사자 : 본인이 왜 이런 걸 하게 되었는지요.)
저가 20살 때 처음 시작했는데요. 노동운동 하다가 우연찮게 풍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원래 좌도 필봉농악을 했어요. 팔봉농악을 하다가 우연치 않게 그때는 했다 안 했다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광산농악의 정독채 선생님을 만나가지고 그때부터…. 광산농악이 시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 되었거든요. 거기서 선생님한테 전수장학생으로 들어가서 이수자로 되어있는데요. 그때 담양에도 분명히 농악이 있을 것인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담양으로 들어와서 한번 어르신들 쭉 조사를 다녀봤어요.
금성면에 윤초석 어르신, 용면 윤석기 어르신, 그분이 용면 분통리 그분 장구 이뿌게 잘 치셨어요. 글고 수북면 어르신 쫓아 다니면서 조사를 해봤는데 그때 당시는 계속 조사 다니면서 무료로 강습하면서 대회도 나가고 서울 월드컵경기장 나가서 공연도 하고…. 시골이라 그런 부분이 어렵죠. 지금은 광산농악은 탈퇴를 하고 죽산농악 전념하기 위해서 여기서….
담양향토문화재가 지정되었죠. 올해도 문화유산 지정하자고 서류는 들고 가지고 다녀 왓어요. 담양은 어떻게 보면 농악 지금 완판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다고 보시면 돼요.
(조사자 : 그러면 이런 거 만들 때 대나무로 만들었잖아요?직접 만드는 건지요?)
대나무장구 그것도 조사를 다니다가 우연치 않게 들었어요. 월산면에….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 아, 노종남씨, 노종남 조합장님이 어렸을 때부터 장구를 오랫동안 치셨어요. 지금도 기량이 엄청 뛰어나요. 그랴꼬 그분도 십년을 쫓아 다니고 있는데요. 조금씩 조금씩 해주시려고 해요. 그분이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비싸잖아요. 옛날 같은 경우는 관으로 쓴다거나 부잣집에서 글다 보니까 장구로 쓰면 비싸니까 여기는 어르신들이 장구를 쬐그만 게 대나무로 만들어서 보여줬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아이구, 대나무장구 어떻게 소리를 냈을까 연구를 많이 했었죠. 그래가지고 우연찮게 그 방법을 찾아가지고 그것을 만들게 되었는데, 담양에서는 그분만 쓴 것이 아니라 몇 분이 꽤 스셨대요. 글고 광주 분들이 대나무장구를 많이 보셧다 하드라구요. 죽산농악 같은 경우는 제가 대나무 장구로 할려고 만들었다가….
담양에 옛날에는 이런 전통적인 것들이 무진장 셌었어요. 광산농악에 설장구 무형문화재 같은 경우도 담양분이세요. 김회열 선생님이라고 죽산분인데 그분들이 오셔가꼬 광산농악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시문화재 받으시고…. 호남우도농악은 영광농악으로 오해를 하고 계셔요. 긍게 담양에 뛰어난 분들이 광주에 보면 진짜 많아요. 대학교 이대휴 대덕면 출신, 진준한이 요즘 담양서 많이 허고 있잖아 장구 치고 봉산면 신학리 집이고, 종일이라고 신명에서 허고 있는 애기 갸도 무정면 봉안리, 영식이형, 태수형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담양출신들이 많아요.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9번지
  • 대표전화 : 061-381-1580
  • 기사제보 : 061-382-4321
  • 인쇄물,기념품,광고문의 : 061-381-3883
  • 팩스 : 061-383-211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재근
  • 법인명 : 담양군민신문
  • 제호 : 담양군민신문
  • 등록번호 : 전남 다 00232호
  • 등록일 : 2006-9-14
  • 발행일 : 2006-9-14
  • 발행인/편집인 : 최광원
  • 담양군민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담양군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dy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