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0
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0
  • 자료제공=담양문화원
  • 승인 2021.05.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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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죽산마을 샘
무정면 오봉산 다섯 산봉우리

 

소쿠리 형국의 무정면 성덕마을
▲제보자= 홍상준(남, 1942년생)
▲줄거리= 소쿠리형을 한 성덕마을은 앞이 터지고 뒤는 빙 둘러쳐져 있는 산이 있어 경치가 좋은 마을이다.
▲이야기= 우리 부락(마을)은 얼른 말해서 저기서 보면 진짜. 제각이 군부대 있는 데가 매각제여. 넘어가면 금성면이 나올 거여. 매각절 거기서 보면 소쿠리 형국이여, 소쿠리 형국. 진짜 이뻐. 아담하니. 앞에는 터지고 뒤에는 싹 막아주고 지대로 빠졌제. 외부가 딱 터진 게 아니라 뒤로 획 돌아서 산이 딱 감고 있어. 성도리 1구는 산 밑에 지드란하게 생겼지마는 (성도리2구는) 다른 동네가 없잖아. 외부에서 보면 진짜 마을 터여.
(조사자 : 근데 왜 성덕마을이라 부른 거에요?)
스님들이 덕을 쌓으라고 이룰성(成) 큰 덕(德), 성덕이라고 지어줬대.

담주산성 이야기
▲제보자= 공재룡(남, 1936년생)
▲줄거리= 오봉리에 담주산성이 있었으며, 담주산성 돌로 관방천 돌 쌓을 때나 추성경기장 만들 때 쌓았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학술 답사팀이 유적을 자주 찾아온다.
▲이야기= 여그 여 추성경기장, 지금 관방천, 관방천이 비만 오면 무너진 판이여. 지금 같으면 콘크리트라도 딱 해블믄 거스기 하지마는 그 당시에 콘크리트 할 여가도 없었고, 그러니까 그때 그 당시 광주성에서 우리 인력으로 그 돌멩이를 다 빼가부러. 그 놈을 일인당 몇백원씩 해갖고 인력으로 다 빼가 부렀다 한께 여그 여 동네 어르신들이 그러더라고.
어째서 추성경기장이냐 거가. 담주성에서 돌맹이를 갖다가 총체적으로 둑을 막아서 경기장을 만들어 놨는디, 오봉리 경기장으로 해야 맞을 것인디. 담주 경기장으로 해야 맞을 것인디, 추성경기장으로 한다냐고 어른들이 자꼬 나한테 허드라고.
지금도 저그 저 가므는 주춧돌이 있고 그려. 집짓는 주춧돌이 있고 그런께 군에서도 현지답사 나온다고.
담주성에 올라가믄 샘터 같은 것도 볼라그란디 오믄 젊은 사람들이(버스로)한 대나 와갖고 막 나보고 가자하지마는 지금은 길이 없어 길이. 길이 없어갔고 전체적으로 풀 나무가 지서져 부러갖고 우리는 가는 길을 대략 알제, 하자믄 여그 여 찾아서 가거라 그 샘을 못 찾드라고. 해필이면 언제든지 겨울 때 오던가. 더울 땐 가도 못하고 언젠가 무정면에 박교환씨 그분이 방죽서 산에 올라가자 하드라고. 창평 쪽으로 책상바위라고 바위가 책상만 하드라고.
질 꼭대기를 가면마당발링라고 옹기 전체적으로 돌이 바닥에 쫙 깔려 갖고 그 전에 거기가 그랬어. 군부대에서 헬리콥터가 훈련하고 인자 지금은 그래갖고 있는디 성집을 지어갖고 많이 있다고 하는디 계단식으로 기왓장이라든가 머라든가 다 있거든.
좌우지간 오봉리는 일단 즉, 산봉우리가 다섯 개라 해 갖고  오봉리라 형성 되였고…

무정면 죽산마을 다섯 샘제
▲제보자= 구순애(여, 1915년생)
▲줄거리= 죽산마을에는 샘이 좋았는데 5개 샘에서 매년 정월 그믐에 샘제를 정성껏 지냈었는데 지금은 시대가 변해 지내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 샘이 두 개 있는 디 우리 집 옆에는 지금도 물이 질겅질겅해갖고 바께스로(물동이로)떠.
제 지낼라고 쌀을 씻어서 놔 뒀는디 그 쌀을 훔쳐 먹은 게 입이 삐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아니여! 참말로 그것은 거짓깔이 아니여!
시암제 지낼때는 뭐이든지 맛을 안보고 대접만 했다네. 그랬어. 옛날에 그랬다요. 입에다가 안 넣어. 맛을 안 봐. 그려. 부정탄 게!
(조사자 : 언제부터 안 지냈어요?)
시암제 지낸 게 당산 할아버지는 안 지냈제. 시암이 다섯인가? 다섯을 다 지냈어. 장구치고 놀고 시암제 지내고… 맞은 사람이 지내제 안 맞은 사람은 못 지내. 다 책임을 맡아가지고 그날이 운이 맞는 사람이 지내제. 아무나 지내는 것이 아니라. 고 양반 잘 지냈어(옆에 분을 가리키며) 시암 앞에서 남편이 지내고 나는 채리고… 시암마다 다 음식 차려놓고…
(조사자 : 그거 하니까 좋은 일이 많이 있고 그랬어요?)
예. (웃음)입을 개리고 떡방에서 떡을 해 침 안 떨어지게… 2월 하루날. 정월 그믐날 지내제 말하자믄…

무정면 수문동 마을 바우이야기
▲제보자= 이영순(여, 1935년생)
▲줄거리= 여러 가지 사연이 있는 바우가 많았다는 수문동 마을 이야기이다.
▲이야기= 전에는 거기가서 바우가 있었어.
바우가 한 개가 아니여. 공장 지으면서 없시고, 소막 지으면서 없시고.
구시바우도 있고 호랑이 발자국이 있는 바위도 있고, 마당바우도 있고 그래. 여기가 벌터라고 그래요. 들어온 사람은 부자되고, 원래 있는 사람은 별로 . 벌이 복을 가져다 준다고 그래 환경부 장관(이만희 장관)도 나온 동네요.
토끼바위는 알지. 마당바위에 호랑이 발자국 있었어. 마당바위 넘어에 배 말뚝이 있어 여기가 바다였다고 그래요. 비가 안 오면 거기 가서 제사 지냈어.
비봉산 너머에 돼지 목을 잘라 피 뿌리고 제사 지냈어요.
비오라고 제사 지내면 비가 왔어. 쪼께 있다가 비가 와. 몇 번 보러 갔구만. 따라가제. 1,2구가 같이 지냈어요. 산세가 좋아서 좋다고 사람들이 땅을 살라도 살 것이 없어서 못 사. 우리는 모르는디 바우 찾으러 외지서 오고 그래. 줄지어서 반듯이 바우가 있어. 대밭 가는데요…고인돌인데 지금은 다 깨불고 없어. 구신이 나온다고 해서 구신바우라고 했어. 호랑이가 돌을 던지더라고 하더만. 공장 지을 때. 처음 지을 때 호랭이 나온다고 그랬어. 지금은 다 없애부렀어. 구시바위에서 물도 나오고 그랬제. 골자기라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았어.
지금은 없어. 노인네들이 거기서 술 잡숫고 누워있고 그랬어. 거기서 구신에 많이 홀려서 산으로 올라 불고 그랬어. 저짝 너매서 요짝으로 여시가 데리고 갔다는 얘기도 있었어.
나왔어. 지금은 전기불이 들어와서 그렇제. 그때는 밤이면 못갔어. 무서운데요. 밤에 손 흔든 큰 애기가 있고 그런다고 그랬어. 손들어서 차를 태워주면 없어져부러. 그게 구신이지 뭐요.

잉어바우와 영지시암
▲제보자= 최가인(여, 1925년생) 장부덕(여, 1939년생)
▲줄거리= 마을에 물이 없어 길어다 먹고 목욕하며 지냈으며, 서울까지 전설로 전해지는 유명한 영지샘물이 아쉽게도 농지정리로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우리 동네가 물이 없어. 먹을 시암물도… 50호가 넘은 동네에서 거기서 물을 길러다 먹고 살았어.(근디 농지정리 하면서 메어부더만) 그래가꼬 여름에 땀띠나면 거기가 목욕하고, 시방맨치 뭔 거시기가 없은게 시원한 물 먹을라면 거기가 길러다 먹고 살았어. (영지시암이라고 서울까지 유명한 시암이여.)
큰 동네서 올라오면 잉어바우라고 있어. 용이 나온 잉어바우(서울까지 유명 혀 우리 동네는)잉어바우가 당산나무 밑에까지 깔렸어. 그래가꼬 그 바우가 지금도 있잖아. 잉어바우가 서울에까지 전설에도 나왔어.
일제 강점기 때 젊은 사람들 저녁밥 먹으면 다 물 길러갖고 목욕하고 물 길러갖고 와서 각자 집에서 먹고 살았어. 그때는 날이 가문게 농사도 못 지어 물이 안 온게 근게 그놈 물 이어다가 밤에면 먹고 목욕하고 그러고 살았어. 영지시암. 근디 미어가꼬 시방 시암이 어떻게 생겼는가 모르겄드랑게.

고인돌 이야기
▲제보자= 송환필(남, 1938년생0
▲줄거리= 성도리의 서정, 중리, 도동 마을에는 고인돌이 현재까지도 여러 기가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도동 마을 입구에 있던 고인돌 때문에 차가 들어가지 못하고 불편하자 이장님께서 동네 어르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망치로 깨부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서정에 광덕리 가는 길목에 가서 박대규씨 집에가 있어. 거기 가서 남생이바우라고 있어. 바우가 이제 가라앉아가지고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 부렀어. 지금도 가서 보면 있기는 있어. 대규집 앞에도 비위가 있고, 그리고 쭉 돌아와서 중리로 와서 뱀바굴이라고 말을 하고 있어. 거기 가서 두 개 가 있어. 큰놈 두 개가 있어 지금 현재. 그리고 고리 가서 최원호씨 집에가서 또 마당에 가서 두 개가 있어.
사용을 안 했제. 그대로 놔두고 있었제. 놀러 올라가고 바위도 올라가고 했었제. 도동 길목 들어가는 입구에 가서 바위 두 개가 양쪽에 딱 있었어.
그 바위 그것 때문에 동네 들어가려면 우마차가 못 들어갔어. 나와 있었기 때문에 차나 구르마가 말하자면 좁으니까, 양쪽에 있으니까 못 들어간다 그 말이여.
그래서 위에서 살다가 내려와 이장할 때 그 바위를 떨자 그랬어. 바위를 떨고 차가 다니고 편리하게 살아야 될 거 아니냐. 한 쪽에서 어르신들이 나이 자신 양반들이 고놈 떨면 동네 재앙 온다고 못 떨게혀. 그려서 내가 우겼어. 재앙이 오드라도 비락 맞드라도 내가 맞을 것이고, 당하면 내가 당할 것인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구태연한 생각, 고리탑탑한 그런 구태연한 시절, 지나치다 생각하지 말고…
그래가지고 노인들이 절대 반대할망정, 내가 인자 큰 망치 갖다놓고 때렸어. 내가 먼저 때렸어. 그 앞에 술잔 갖다 놓고 인사드리고… 그러자 광암 양반이라고 중옥이 양반이 내가 턴 다음에 두드려 깼제. 그래서 아무탈이 없었어. 지금까지 아무 탈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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