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47-천년 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1.08.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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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 대성리 마을숲과 정자

 

금성면 정각마을 지명유래
▲제보자= 정성조(남,1933년생)
▲줄거리= 정각마을은 바를 정(正) 뿔 각(角)자를 써서 뿔이 바르게 난다는 뜻으로, 마을 지형이 송아지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정각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옛날에 바를 정(正)자에 뿔 각(角)자를 써서 뿔이 바르게 난다는 뜻이죠.
마을 지형이 송아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정각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답니다. 여기 정각마을 터를 독와형국이라 하여 송아지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용면에서 바라보면 소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합디다.
900년경에 홍주 송씨가 터를 잡았다고 그러더라구요. 홍주 송씨는 지금은 두 분 밖에 없어요.

도깨비 다리, 부엉이 바위, 신선바위 이야기
▲제보자= 경만성(남, 1937년생)
▲줄거리= 도깨비 다리가 있었던 도깨비 뚬벙, 그리고 부엉이가 우는 부엉바위, 그리고 임란 때 왜적을 속이는데 쓰인 노적봉까지 담양댐과 담양호 안의 신성산 위에 있는 바위와 봉우리에 담긴 전설이다.
▲이야기= 담양댐 방천 위에 부엉대미, 거가 바로 그전에 도깨비 다리라고 있었어요.
근디 거그 말은 그전에 명주실로 명주실이라고 하면 꾸리를 하나 감으면 무지하게 길잖아요. 근디 명주실 한 꾸리를 다 요렇게 해 같고 풀어봐도 끝이 계속 내려간다 그런 전설이 있어요. 도깨비 뚬벙으로…뚬벙이랑계 뚬벙이 3개 있어.
그런 말이 있고, 고 위로 쪼금 가면 도깨비 다리라고 있어. 도깨비 다리. 인자 도깨비 다리가 징검다리여. 말하자면 바위가 근디 인자 말하자면 그 다리를 도깨비들이 그전에 놓았다 그런 전설이 있어. 엄청나게 커요. 사람의 인력으로는 힘들 정도여.
그러고 부엉 바위는 지금 현재도 부엉이가 거가 울고 있어요. 지금도 울어 그래도 항시 그 바위에에서는 거시기 허면 부엉이가 울어 그래서 부엉 바위라고…산성산인데, 부엉이 집이…거기가 아마 살기가 좋은 모양이지요.
그리고 요짝에서 보면 저 바우 보이잖아요. 저 바위 저게 말하자면 선바윈데, 선바위 그건 어쩌냐면 임진왜란 땐가 하여간 왜구고 왜군들과 하고 싸웠잖아요. 근데 인자 그 어떤 장군이 저 선바위 아니 신선바위, 저것을 신선바위를 이렇게 거 뭐냐 짚으로 엮어 가지고 요렇게 전부 싸았데요. 싸아가지고 허면 인자 곡식을 요렇게 쟁여 놓은 것으로 표시 할라고, 그렇게 해 놨다고 그런 전설도 있어요. 노적봉, 노적바위로 말하자면 그런 바위가 지금 보여요 저기요.

금성면 원천리 송장고개 이야기
▲제보자= 김순규(남, 1938년생)
▲줄거리= 마을에서 원천리 들어가는 쪽에 송장고개는 그 전에는 어린애들 묘지로 사용했었는데 지금도 개인 묘지가 많이 들어서 옛말처럼 송장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저 원천리 들어가는 데가 송장고개란 데가 있어요. 고 밑에 가서 풍덕시암이 있고, 그런디 거기 가서 왜 송장고개라 했냐 하믄 전에는 애기들을 낳으며는 얼매 잘 못 허므는 천연두로 이런 것으로 많이 죽거든요. 열 낳면 열 다 키운 것이 아니라 다섯도 못 키웠잖아요.
그러니까 갖다 묻을 때가 거가 지정이 됐던 모양이에요. 송장고개란데가. 지금은 시체로 그냥 묻어불지마는, 어른들은 널이라고 하지마는 그때는 널도 안 허고 그냥 묻어 불므는 그때만 해도 짐승이 많거든. 그 시체냄새 맡으고 여시나 머 이런 것들이다 파 묵어분다고… 그걸 나중에는 그렇게 묻다 본께 다 파 묵어 분께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알란가 모른디 물동이라고 있제 물지르는 물동. 그걸 두 개를 가갖고 애기 시체를 그 속에다 넣어갖고 동우리를 딱 맞춰 불므는 빈틈이 없잖아요. 그래 갖고 묻어 불믄 짐승들이 못 파묵잖아요. 시체를. 그래갖고 거기다가 한 분이 묻고, 두 분이 묻고 근께 거기가 물론 국유지 그러니까 누가 관여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 묻기 시작한 것이 송장 고개가 되고 고 밑에 풍덕 시암이 있는디 거기 와서 손발 시치고 거기 물이 지금도 잘 나요. 샘물이. 그래서 밑에서 풍덕시암에서 대체나 손발시치고 그러고 들왔다 해서 그래서 거기가 송장고개가 된 모양이에요.
그 송장고개라 해 갖고 높은 산도 아니에요. 평지 산인디, 우리 마을서도 그 전에는 모래미라 해서 한 바쿠를 뺑 돌아갔거든요. 근디 그 일제 사람들이 동네 가운데[ 혈맥이 좋다 해 가꼬는 끊어 부러갔고 난주엥는 고리도 다니고 그랬는디 산은 그렇게 안 높아요. 안 높으고 평지맹키로 평평해.
거기도 천상 혈맥으로 봐서는 저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이니까 우리 마을 호랭이 혈로 봐서 팽야 그 일부분이겠죠. 일부분이지 딴 게 없어요. 여기서 보믄 원천리로 가는 길목이에요.
지금은 왜 없어졌냐므는 우리 알기만 해도 거기를 가 보므는 사기, 물동이 이런 조각들이 많이 돌아 다녔거든요. 헌데 지금은 그 뒤로 묵고 살기 위해서 거가 편편한게 밭을 일궜어요. 밭을 전부 일어갖고 파불고 한께 전부 처분을 해 부렀고 그러다가 지금은 송장고개 이름 그를 따랬는가 어쨌는가 묘지가 아조 그냥 다닥다닥허니 공동묘지 같이 많이 생겨 부렀어요.
(조사자 : 마을 공동묘지인가요?)
아니, 마을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들, 개인 묘지가 많이 생겨갖고 그 말이 맞은가 몰라. 송장고개란 것이…묘지가 느닷없이 많이 생겨 부렀제.

금성면 무림동 신사당
▲제보자= 김순규(남, 1938년생)
▲줄거리= 무림동 탁굴이라는 곳에 일제가 신사당을 지어놓고 소학교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동원해 참배를 시켰는데 일제 패망후 누군가 불을 질러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우리 마을 우게 탁굴이라 했는디, 옆에가 신사당이 있는디 그 혈이 징그럽게도 좋아요. 거기다 일본사람들이 사당을 지어갖고 그전에는 소학교가 바로 요 앞에 있잖아요. 우리 동네 앞으로…일주일에 한 번씩 인사드리러 쭉 와요. 그런데 아조 볼만 혀, 학생들이 오면…
우리는 그때만 해도 째깐 했은께 우리는 신사당에 안 댕겨 봤은께 몰라.
우리 우게 사람들이 댕겼제. 신사당이 터를 아주 좋게 다듬어갖고 일본 사람 집 있잖아요. 그런식으로 지어 갖고 거기서 절 허고, 교장선생님이 일본에 대해서 닉뽕모 잡고 연설 허고, 끝나며는 학교를 가서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그랬죠. 근디 신사당터가 아주 좋은 터에요. 신내리라 해서 참 지금도 좋게 있어요. 지금은 묘지를 많이 거기다 써 부렀제. 그 사람들이 없어져 부러서.
사당은 없죠.인자, 불나부렀제. 여튼간에 일제 끝나면서 불나부렀어요. 누가 거기다가 불을 질렀는가 모르는디 그 놓아드겄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 일본신을 모신 댄디. 그래서 어떤 양반들이 불을 질렀는가 확실히 모른디 불나서 없어져 부렀어요.
(조사자 : 신사당에 강압적으로 절 하라고 시켰나요?)
물론, 학생들이야 가서 선생들이 데꼬간 께 아마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갔을 꺼여.
마을 사람들은 안 갔어요. 소학교 학생들만 갔지. 오전 10시 경이나 되므는 가요.

솟대와 고깔
▲제보자= 경만성(남, 1937년생)
▲줄거리= 당산제를 모시고 3월 삼짓날 깨죽나무로 솟대를 세웠는데 그 의미가 마을의 배 형국이여서 배가 멀리 가기 위해 돛대를 세웠으며 또한 당산제 지낼 때는 노인들이 고깔을 손수 만들어 썼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당산제를 우리가 모시고 삼월 삼짓날을 기해서 마을에서 그전에는 거 깨죽나무제(가죽나무)
깨죽나무로 거를 해야 오래 가니까. 단단하고 그러니까 거 껍질을 다 벗겨서 거기다 솟대를 만들어서 그렇게 했어.
왜냐 하면 대성리가 배 형국이에요. 배 형국, 말하자면 돛대가 있어야 배가 이렇게 잘 뜨고 아까 우리 노인회장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만 여그 이 마을이 구성 형태가 배 형국이기 때문에 배가 잘 떠야 할 거 아니예요. 그래서 무너미 고개를 물이 넘어가야 말하자면 부촌이 된다. 그 전설이 쭉 내려 왔습니다. 왜냐면 배니까. 멀리 가서 고기도 잡고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거가 먹혀 있으니까. 고리 말하자면 물이 넘어가서 그런 형국이 됐기 때문에 부촌이 된다. 그런 전설이 있어요.
그전에 쭉 내려왔어. 그래서 삼월 삼짓날은 언제나 길일을 택해 가지고 솟대를 세워서 그 배에 돛대를 세운다는 그런 형식으로 해서 돛대를 세웠습니다.근데 그 후로…
지금은 왜 안 세우냐 하면 지금 현재 전붓대가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글로 대신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현재는 하지 않고 지금 현재는 깨죽나무가 없습니다. 전부 없는 상태고 해서 못 허고…
그건에 당산제 지낼 때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당산제 지낼 때 고깔이라고 아십니까?고깔을 마을에서 거 노인들이 전부 만들어요. 고깔을 만들어서 고놈을 쓰고 그거…제사 당산제 모시고 그때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거 금년에 풍년이 되고 아무 일 없이 집안에 모은 좋은 경사만 있고 나쁜 것은 다 물러 가란 식으로 집집마다 다니면서 요렇게 굿을 치고 돌아디니고 거기서 인자 모다 나온거 같고 동네 기금을 만들고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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