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2022-1월10일자)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2022-1월10일자)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2.01.0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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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사 노천법당의 지장보살과 삼층석탑

금성면 연동사 복원기
▲제보자= 선행스님(남, 1966년생)
▲줄거리= 연동사는 모양을 보면 제비 둥지처럼 되어 있어 제비 연자를 써서 연동사라고 했다 하며 삼국사기에 기록이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원행스님이 3년 동안 생식면서 기도하면서 선몽하고 주위를 파보니 부재들이 나와서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동굴엥서 법당이 있는데 전우치가 동굴 법당에서 공부를 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전에 친형님이 연동사 복원을 하셨어요. 원행스님이라고 3년 전에 열반하셔서 책자로 전우치 전설에 대해 적어 놓으셨다고 해요. 노보살님들이 얘기를 하셔요.
고려시대 때 제작된 지장보살이 노천 법당에 있고 고려 초기 처년이 넘은 3층 석탁이 있어요. 백제의 마지막 탑의 형태가 비슷해요. 지장보살님은 원형 그대로고. 정유재란때 여기가 불탔다고 전해지는데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3년 동안 원행스님이 생식하면서 기도해 선몽하고 주위를 파보니 부재들이 나와서 발굴하기 시작했어요
여기가 터가 쎄요. 전쟁이 많이 난 곳이라 영혼들도 많고 악산이에요. 산성으로 올라 갈 수 도 없어요. 모양르 보면 제비 둥지처럼 되어 있어요. 제비 연자를 써서 연동사라고 햇다고 그래요. 삼국사기에 연동사가 기록이 돼 있다는 것을 이 절이 크고 유명한 절이였다는 애기죠.
문화재에서 나와서 복원을 했다면 잘 복원했을 텐데 원행스님이 위에마 발굴을 했기 때문에 완전히 복원을 못했던 거 같아요. 백제 마지막까지도 올라 갈 수 있는 곳이죠. 도굴을 많이 당했떤 절이기도 해서 옛날에는 유명한 절이였다는 추정을 합니다. 

금성면 문암마을 지명유래
▲제보자= 조현종(남, 1946년생)
▲줄거리= 문암리는 280년 전에 마을이 형성이 되기 전에 물이 넘어왔다 해서, 물너머라고 했다. 1914년경에 물너머라고 부르면 촌스럽다 해서 마을 뒤에가 바위산이니 문암리로 바꾸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280년 전에 마을이 형성 되었는데, 원래 마을에 자리를 잡기 전에, 물이 이렇게 마을로 넘어 왔다 헙디다. 이렇게 물이 물이 넘어왔어. 그랴꼬 물너머라고 했어. 그래 가지고 마을이 형성으로 살다가 거의  1914년경에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거의 가까이 된 갑네요. 1914년경엔가, 마을을 문암리라고 물너머라고 해서 마을이 쓰겄냐 그래 가지고 문암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허드만요.
거기는 호수는 전에는 뭐냐 한 20호 살았는디 지금은 많이 객지로 나가불고 뭣 허고, 지금 사진 분들이 13호나 살아요. 그러고 객지에 들오신 분들이 한 5호 있고 지금 객지에서 정년퇴직하고 와서 본게, 산수가 좋고, 병풍 같이 둘러싸고, 물은 문암리 저수지 물이 하얗게 하나 차 있고 공기도 좋고 뭣 헌게, 요리 들오신 분들이 그렇게 있어요. 그래 가지고 휴양차 들오신 분들, 아픈 사람들, 환자가 들와 가지고 사신 분들…
거기는 바로 광덕산 밑에라고… 고로고 옛날에 불렀죠. 광덕산에 물이 흘러 내려 와가지고 요로고 우게로 넘어 갔다 해가꼬 물너머라고 그전에는 고로 헌디, 거기다 자리를 잡고 마을 형성 되가꼬 살다가 보면서 아까 얘기했지마는 한 100여 년 전 1914년도엔가 언젠가 마을 주민들이 물 너머 마을이 촌스럽고 쓰겄냐. 그러 안하고도 만들어질 수가 있는디 물너머라고 부른게 부른 사람마다 안 좋다 그래가지고 문암리라고 그러 이름이 붙였다고 그러고…바위가 많고 그런다 해서 문암리라고 뒤에 가 바위산 이라고…

금성면 문턱바위
▲제보자= 조현종(남, 1946년생)
▲줄거리= 문턱바위는 문암리서 전라북도로 넘어 가는 곳에 위치하며 양쪽에 있었다. 소를 팔고 시장에 다녀올 때 도둑들한테 돈을 뺏기는 일이 많아지자, 동네 젊은이들이 바위를 망치로 깨버려 형태만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문암리서 바심재로 넘어 간디(문턱바위가)있어. 전라북도로 넘어 간디가 있는디, 그전에는 소를 팔거나 뭣을 팔면 돈을 짊어지고 다녔어. 지금 같이 교통수단이 좋들 안 헌게 차를 가지고 다니지를 안했기 때문에, 거가 도둑들이 걍 아주 많했죠. 많해 가지고 거기를 낮에 해가 넘어가지 전에 넘어가제. 넘어간 뒤에 가며는 꼭 돈을 털려불고 털려불고 글고 그래 가지고 저 아까 유래를 어떻게 나왔는가도 몰라도 하도 그렇게 도둑을 맞고 뭣 허고 헌게, 바우 이쪽 바우를 양쪽 바우를 갖다가 청년들이 젊은 사람들이 그 전에는 지금 아니고 십 얼마나 됐나 우리가 맷돌 큰놈 요런 놈도 저기다 놓은 놈을 보면 옛날 어른들이 짊어다 갔다 놨다고 그러 안해.
그래 가지고 젊으신 분들이 전부 고놈 거시기 오한마(망치)로 해서 고놈 거시기를 깨고 뭣허고 큰 쇠덩어리 오한마 깨고 뭐 허고 헌일 있어요. 망치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 얘기를 듣었어요. 제가 본 것이 안 잊어부러.
(조사자 : 지금도 있어요?)
형태는 있죠. 많이 깨불고…

금성면 금성리의 당산나무들
▲제보자= 조정숙(여, 1954년생)
▲줄거리= 문인석을 품은 하성리 당산나무를 비롯하여 금성리의 부곡, 평신기, 문암의 모든 마을들에는 아름드리 당산나무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고, 문암을 제외한 모든 마을들이 당산제를 정성껏 모시는 전통을 간직해 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석불은 하성리 앞에 말하자믄 당산나문데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많이 안아있지를 안했어. 그냥 쪼그만 하게 서 있고 옆에 주막집이 있었고, 주막 집 주인이 꽤 멋쟁이, 그런 분인데 워낙 오래되니까.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 어째서 그 석불은 세워져 있을까요?물으니까 석불이 아니라 석인상이제. 어째 그러냐니까 우리 아버지도 누가 촌에서 농사짓는데 얼마나 관심 있겠어? 얼마나 됐겠냐고 물으니까 우리 아버지 하는 소리가 나도 들었다마는 한 150년이나 될란가 그렇겠다 그런 소리
그러고 또 거기 앞에 논 가운데 저기가 있고 글믄 누가 세웠어요? 하성리에서는 주로 성씨들이 내가 고고학에 관심 있어놓으니까 어떤 성씨들이 살았어요 물어 보니까 그러고 우리집 당고모가 하성리로 시집을 가신거야. 근데 하성리는 그 신씨들이 잘 됐어. 신씨들이 터를 잡았다고 하고 내가 금성산성의 바위를 가리면 큰 인물이 난다고 그런 얘기를 했잖아. 근데 그 바위가 하성리 바로 밑에서는 안보여. 그래서 아마 인물들이 조금 더 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한번 해 보고 그래서 인제 성씨들이 살았냐고 물었더니 신씨들은 그렇게 까지 살지 않았는데 박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그러드라고. 그래서 그 박씨들 저기에서 고 석인상을 갖다가 이렇게 세웠다고 들은 바를 얘기한적 있다고, 그 외에는 별로.
(조사자 : 석인상과 붙어있는 나무는 무슨 나무에요?)
당산나무, 느티나무일 걸. 그냥 우리가 보편적으로 보며는 인제 당산나무 같은 경우는 느티목이 거의 많고 팽나무는 그렇게 또 많지 않고…
조사자 : 그 당산나무위치가 어떻게 되나요?
평신기 마을에서 가면 하성리니까 성 아래 금성산 바로 아래고 평신기는 초입에 있고, 그러니까 그 전에 네 개 마을 중에서 평신기가 제일 커. 한 80호 정도 살아서 지금도 남아있는 게 평신기에 당산나무, 어마어마하제. 그래서 거가 할아버지 당산이고 그리고 논 가운데 할머니 당산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없어져 버렸어.
당산제도 지금 대단하게 지내고 아랫 동산, 말하자믄 초입에 평신기에 당산제를 지내고 하성리에 지내고 가마실도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나무가 있고 지금은  아마 그게 없어져 있을 수도 그리고 문암리에서는 당산제를 지내는 것은 아니었고 그러고 인자 평신기나 문암리, 가마실은 조가들이 자자유촌 하는 곳, 옥천조가들. 거기서 200년도 넘게 살았다는 거. 그런 입향조의 마을이고 하성리는 완전 박씨들이 와서 살았던, 그런께 박씨들이 굉장히 득세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별로 남지 않고 평신기나 거기도 다른 합성바지가 와서 살고 문암리같은 경우는 거기도 거의 다 조가들 자자유촌 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인제 없어지고 지금은 지내고 있는지. 글고 가마실도 가마 부자에다가 골착 터자로 했는데 일명 이렇게 할 때는 부곡이라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부곡 안했어. 이렇게 문자로 기록을 하면 모를까. 그냥 가마실, 그래서 그 가마실이라는 그거를 추적을 이름으로 해서 인제 온천이 나온다고 하고, 조사를 한 적도 있고, 광주에서 대성약국 거기 와서 부곡 그 근더지를 다 사가지고 한번 땅값이 오르기도 하고또 굉장히 편안하게 구름처럼 돼 있어서 31사단이 거기 들온다고 해 가지고 아조 데모를 하고 엄청나게 해서 실향민이 될 뻔하다가 말았어.
(조사자 : 석인상하고 당산나무하고 한 몸이 돼있잖아요. 언제부터 한 몸이 된 거에요?)
우리 아버지 말에 150년 전에 석인상이 거기에 세워졌드라 하고는 그리고 원래는 나무 속에다가 심지는 안 했겄제. 옆에다 세웠겄제. 쪼그마하게. 근데 나무가 150년 동안 커 오면서 안아버린 것이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 보므는 거의 말하자믄 석인상 발목밑 가까이 보였다는 것이제. 근데 지금은 몸가지 와 부렀어.
(조사자 : 그 상태로라면 계속 파 묻히겠네요?)
나무가 크면 그럴수도…그런데 이제 옆으로 퍼져 가니까 아마 파묻힐려면 몇 백 년 돼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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