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2022-1월20일자)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2022-1월20일자)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2.01.1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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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운동과 동학운동 격전지 금성산성
▲제보자= 선행스님(남, 1966년생)
▲줄거리= 연동사는 의병활동과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로도 잘 알려진 금성산성 바로 아래 위치해 있어 전투에서 산화한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향 연기가 산을 덮었다고 해서 연기 연(煙)자를 써서 연동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야기=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전투지로 알려져 있죠. 친구 고발로 인해서 패해서 넘어가다 강천사쪽에서 잡혀서 압송돼서 사형을 당했죠. 현상금이 많이 달려서 친구가 고발을 해가지…
금성산성은 의병활동도 많이 했던 곳이죠. 정유재란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가족들이 찾으러 왔는데 찾을 수가 있나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산을 다 덮을 정도였다고 그래요. 연동사는 연기 연(煙)자를 써서 향 연기가 산을 덮었다고 해서 연동사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어요.

금성 하성마을 유래
▲제보자= 신영길(남, 1941년생)
▲줄거리= 하성마을은 이천 허씨와 밀양 박씨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자리 잡고 주진리로 부르다가 금성산성 아래 마을이라 해서 하성이라 불렀다. 당산나무를 심어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목화 생산을 해서 수입원을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하성마을이 옛날에 임진왜란 때 158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잖아요 그때에 이천 허씨들하고, 밀양박씨들하고 거기 피난터로 그 마을을 잡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정확한 연대는 모르겠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어느 정도 피난 와가지고 좀 살다가 거기 당산나무도 심고 아마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런디 인자 거기 마을명을 어떻게 했냐며는 배주(舟) 나루진(津) 주진리라고 했어요. 나룻배 아시겠어요?
그래서 거기를 주진리라고 불러 오다가 이조 말에 하성리로 개명을 하게 되었어. 그래서 하성리로 부르고 있고, 또 거기 당산나무 그것도 정확한 연대는 모르겄는데 아마 거기에 피난 와 가지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뒤에 아마 심었을 것 아니여. 그래 가지고 항시 열렬히 어르신들한테부터서, 제사를 지금 모시고 있어요.
음력으로 정월 보름날 그렇게 해가지고, 제사를 모시고 오고 있습니다. 그런 풍년과 안녕을 기원해서, 그렇게 제사를 모시고 있어요. 하성은 바로 마을 뒤에 가서 성이 있어요. 긍게 성이 있기 때문에, 성 아래 마을이라고 해서 하성리로 되어 있죠. 그러게 마을명을 바꿨죠. 금성산성이요. 바로 마을 뒤에 성이 지금 봉우리 있는데, 거기가 지금 성이 쌓아져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 성이 있기 때문에 하성리로 개명 된 거에요.
논도 많고 밭도 많고 그랬어요. 그래 가지고 옛날에는 주로 벼농사 그것했고, 또 밭에는 콩 같은거, 이런 것을 주로 많이 했고, 그랬어요.
목화는 어느 정도 우리 중년 나이 되았을때게 목화도 좀 꽤 많이 심었죠. 아무튼 그래 가지고 인근 마을에서도 목화를 하게 되면 전부 다 우리 마을로 가지고 왔어요. 그거이 인자 하나로 어떤 단지가 이루어져야 판로가 생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인근 마을 몇 분들도, 목화를 재배 해 가지고 우리 마을로 가지고 왔어요. 판로가 좀 저기허들 못 허니까. 그래 우리 마을 그렇게 그때게 심허게 많이 했어요. 그래 가지고 목화로 그때게 참 재미 봤죠.

금성 하성마을 수호비
▲제보자= 신영길(남, 1941년생)
▲줄거리= 하성리 마을이 배 형국이라 나룻배 허한 곳을 메꾸기 위해, 느티나무숲을 가꾸고 수호비 두 기를 세웠다. 일제가 배 만든다고 베어내 숲은 사라지고, 수호비는 하성리와 평신기 중간 지점에 하나와 들쪽에 하나가 남아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당초에 마을에 수호비를 아까도 말씀 드렸는데, 그게 반복 되고 있는디 거기가 나룻배 형국이라 해서 그걸 주진리라고 했다고, 그러했잖어요. 그런게 나룻배처럼 하기 위해서, 앞이 혈을 나룻배로 해놓고 보니까 조금 허한 자리가 있으니까 앞을 세우기 위해 옛날에는 숲을 가꿔 가지고 양쪽으로 이렇게 숲을 가꿔 가지고 거기다가 수호비를 세웠어요. 그러게 해서 나룻배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 그러게 세웠다 그래요. 그래서 하성리에서 평신기 중간 지점에 당산나무 밑에 가서 하나 있어요.
그러고 하나는 들에 가서 있고 그런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는디, 옛날에는 그 산에서 쭉 허니 그 들에 있는 수호비 있는 디까지 숲이 있었어요. 긍게 어르신들 얘기로는 거기 저 숲이 거까지 있었는데 최근에는 거기 나무 다 베어 버리고 거기를 개답을 해부렀어요. 그래나서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어요.
(조사자 : 그 때 그 숲에는 무슨 나무를 심었어요)
거의 심는 게 느티나무에요.
(조사자 : 수호비에 마을 주민들이 빌거나 당산제 지낼 때 제 지내었나요?)
들에 있는 수호비는 뭐 그런 것은 없었고, 우리 마을과 평신기 중간 지점에 있는 당산나무 밑에 있는 수호비 있는데도, 꼭 수호비를 목적으로 해서 제사를 모신 것이 아니고.
당산나무 위주로 거기 것은 저희 어렸을 때가지는 제사를 모셨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어느 정도 크면서 부터서는 제사를 안 모시고 그냥 마을 앞에만 모시고 그랬죠. 그런디 수호비가 양쪽에 배 형국을 거기서 보안 즉, 막해서 허함 메꾸기 위해서 세웠다 했잖아요. 그런데 느티나무를 심어 가지고 숲이 아주 좋았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배 만든데 쓴다고 해서 그냥 무자비하게 벌목을 해 분 모냥이여. 그래 가지고 지금은 그것이 흔적이 없이 그냥 수호비만 덜렁 서 있고 그 뒤에 거기는 개답해 가지고 논으로 되어 있고 그래나서 그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죠.
짐대는 어르신들한테 이야기만 들었제 보든 못했어요. 그런데 어르신들은 그걸 나무로 해놔서 좀 오래 되며는 썩고 하며는 다시 세우고 그랬대요. 긋는디 우리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 그걸 실제 보든 ㅤㅁㅗㅆ했어요. 그래서 짐대 그렇게 해서 세우는 자리가 중간 지검이 있고 그랬어요.

배너머 무너미 고개
▲제보자= 신영길(남, 1941년생)
▲줄거리= 배너머 고개는 배가 넘어 다녔고, 시루봉에 배를 매어 놓은 고리가 있었다 한다. 또한 강천사 가는 길에 연대사까지 물이 넘쳤다 해서 무너머 고개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예. 배너미재는 지금 마을에서 바라보며는 좌측으로 바로 마을 뒤에 가서 시루봉이 있어요. 그런데 시루봉 중턱에 가서 저도 지금 직접 내 눈으로 확인헌 것은 아닌데, 옛날 어르신들 말씀 들어 보며는 바우 중간에 가서 배 고리가 지금 박혀 있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 바우가 워낙 높아 버리니까, 그렇게 있고, 지금 배너머 지금 배너머 무너머 고개라고, 지금 뒷산에서도 가장 굴곡이 요렇게 그렇게 하면서도 거가 낮췄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물이 고리 넘어 들었다고 해서, 무너머 고개 또 이제 그쪽으로 돌아 가며는, 여기 저 아 배너머 고개가 배가 고리 넘어 댕겼다고 해서. 그리고 거기서 또 쭉 허니 돌아가면, 연대사 미처 못가서 물이 거기까지 넘쳤다고 해서 무너머 고개, 여기는 저 매너머 고개, 물이 거가저 넘쳤다고 해서 무너머 고개. 긍게 지명이 무너머 고개로 되어 있거든요. 연대사 못가 가지고
그러니까 옛날에 어르신들 얘기로는 그 곳이 정확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천지개벽이 되어 가지고 그 때게는 아무튼 물이 거기가지 차 가지고 배너며 거시기로 해서 배가 고리 넘어 다녔고, 물이 내가 방금 말씀드린 연대사 중간지점에 무너머 고개까지 물이 넘쳤다고 해서, 무너머 고개까지 물이 넘쳤다고 해서 무너머고개라고 했으니까 바다로 되어 있다 그렇게 얘기가 되고 있어요. 지금
(조사자 : 연동사 자리가 연대사가 아니고 그러면 연대사는 어디에요?)
연대사는 내가 말씀 드린 우리 마을 뒤로 해서 배너머 고개 고리해서 넘어 가지고 좀 거기서 좌쪽으로 돌다 보면 저 밑에 강천사 우게 강천사 쭉 우게 거기 가서 연대가사 있었어요.

저수지로 들어가 버린 가마실
▲제보자= 김종수(남, 1939년생)
▲줄거리= 마을 뒤 저수지 위쪽에 가마솥 모양으로 생긴 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야생동물 때문에 농사도 못 짓고 유실수나 나물 등을 외지인들이 다 채취해 가고 있는 실정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 우리 부락에 저수지 위에를 가 보면은 부곡온천에 그 형태나 똑 같애. 둘레가 요렇게 가마솥 모양으로 요렇게 해가지고 지금은 농사도 없고 옛날에는 농사를 전답을 상당히 많이 짓고 계셨는데. 지금은 멧돼지, 노루, 꿩, 비둘기, 까치 때문에 일체 농사를 못 지니까 싹 먹혀 부렸어. 그래갔고 저수지를 크게 막으면서 유입된 토지를 전부 군에서 보상을 해주었어.
(조사자 : 그럼 가마실이 지금은 그렇게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인자 거지는 들어가 흔적이 별로 없제. 이게 저기가 뭐시 많이 나냐면은 고사리, 버섯, 거기 저수지 위에 그러니까 주로 광주 사람들이 여기 와서 봄이면은 고사리 끊으로, 가을에는 밤 줏으러 지금은 밤도 옛날에는 주민이 관리허고 했지만은 지금은 시골에 노인들만 사니까. 내 밤나무라 할지라도 관리도 못허고 그런께 가지가면 가지간대로 말면 말고 그러제. 근데 외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주워가부러, 죽순도 외지 사람이 와서 다 갖고 가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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