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2022년 3월20일자)
천년 담양설화 및 전통 이야기(2022년 3월20일자)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2.03.1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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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 송진우 생가

고하 송진우 생가와 서당재
▲제보자= 송평수(남, 1941년생)
▲줄거리= 금성면 대곡리 손오실 마을 고하 송진우 선생의 생가가 학당이었고, 주변 마을 학동들이 공부하기 위해 마을 뒤 고개를 넘어 다녔는데 그 고개를 서당재(서당치)라 불리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고하 송진우 선생은 여기서 태어나셔가지고 인촌 김성수씨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셔 가지고 법학을 공부했다고 그럽니다.
(조사자 : 선생님과는 친천관계세요?)
증조 할아버지 형제분이셔죠. 9촌 정도 될 겁니다.
송진우 생가가 서당이었어요. 그래서 옛날 고인분들이 공부를 배우러 마을 뒤 고개를 넘어다녔는데 그 고개를 서당재라고 불렀다고 들었어요.
옛날 집은 초가집이었는데 허술해서 정부에서 복원를 했죠. 그 당시 그대로 개조가 아니라 복원을 했죠.
해방 당시 신탁통치 반대 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그것에 앙심을 품은 사람이 암살을 했죠. 그리고 유품들도 다 소각해버려서 유품이 많지 않고, 한문으로 된 것이 주여서 방문한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잡는 굴 이야기
▲제보자= 최병천(남, 1947년생)
▲줄거리= ‘소잡는 굴’은 바위와 맑은 물이 있고, 다른 마을에서 보이지 않아 소를 잡기 좋았다. 소잡는 굴 들어가기 전에 도끼로 소를 쳐서 잡는다 하여 ‘도철’이란 곳이 있었으며, 반란군이 마을에서 훔친 소를 가져가기 힘들어, 잡아서 작업해 짊어지고 산성산 줄기를 타고 넘어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소 잡는 굴 가기 전에 도철이라고 있어요. 도철에서 조금 가면 소잡는 굴이 나오고, 그 유래는 생각 허며는 어찌해서 도철이가 들가냐면 도끼로 쳐서 소를 잡는다고 해서 거가 소잡는 굴이여.
그래 가지고 우리 그대 어르신들도 잡고 그런 줄도 알고 있는디, 내가 알기로는 옛날에 가마골 반란군 사령본부가 있었어요. 그 반란군들이 오며는 소를 여기서 훔쳐 가지고 가며는 갖고 끄집고 산으로 올라가 산성산을 올라 갈 수 없으니까, 거그서 두드러 잡아 가지고, 갈기갈기 찢어 가지고 메고 갔다 해서 소 잡은 굴이여. 저 산성산 저 뒤로 해가꼬 가마골이란디를 가마골 아시죠. 거기를 잡아 가가꼬 여기서 짊어지고 고리 넘어 갔어요. 좋은 길로 가는게 아니라 그래서 소잡는 굴이라 했어요.
어르신들 한 100세 넘으신 분들 말을 들으면 여기서도 우리 마을에서도 소를 끄집고 가서 거기서 잡아 가지고 갔대요. 내 듣기로는 그래서 거기서 잡아 가지고 산성산 줄기를 타고 저기 저 분통리 가마골 고리 넘어서 가가지고 거기서 성문을 나와서 반란군들이.
나 여기 그때는 그 뭐여. 어머니들이 베 짜는 거, 옷 해 입을라고 명베도 짜고, 삼베도 짜고, 그런 거 옷들을 다 뒤져 가요. 그리고 또 식량 같은거. 대밭 속에다 묻어 놓으면 볼금볼금 다 찾아 가지고 딱 메고 가고. 그때는 먹고 살기도 힘들텐데 그 쌀 한바가지 갖다 감춰 놔면 가지고 가며는 그 이튿날은 굶어야 돼. 우리 같은 이들은 그런 현실로 살고 있었어요.
(조사자 : 그러면 소 잡는 굴이 어떻게 생겼어요?)
형태가요. 거가 바우가 이렇게 있고 물이 좋아요. 맑아요. 항상 이렇게 바위 밑으로 이렇게 흘러가는데, 바우가 쫙 깔렸어요. 근디 거기서 소 잡기가 좋아요. 보기에. 그래서 도철이라는 난 도철이 어째서 긍고 했더니 옛날 어르신들 말씀 ‘도치로 쳐서 소를 잡아 가꼬, 간데가 도철이다’
(조사자 : 거기가 물도 있고, 바위도 있고 하니까 작업하기가 좋았다구요?)
네. 아주 좋았습니다.
(조사자 : 근데 다른데 옆에서 안 보여요?)
안 보여요. 그래서 또 마을을 요기 들어가시면 평신기가 있어 평신기. 금성사리가 금성사리를 피해 갈라고, 산성산의 줄기를 타고, 그렇게 해서 넘어 갔어.

다양한 죽제품 생산 이야기
▲제보자= 최성춘(남, 1943년생)
▲줄거리= 장항마을에는 1950년 무렵에 아가씨들이 많아서, 일거리가 없을 때는 죽세품 그 중 비누바구니와 개량바구니, 치, 죽피방석, 죽피자리 등을 만들어 5일장인 죽물시장에 내다팔아 시집 밑천을 만들었다 한다. 당시 황금밭 대나무 한그루는 땅 한 평과 거의 비슷한 값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우리 마을에는 지금 제가 알고 있기로는, 한 그러니까 한 오십년이나 되겄죠. 그 무렵에 우리 마을에 아가씨들이 많이 있었어요. 우리 또래 된 아가씨들이, 그러면 그때는 다른 일거리가 없고 그러니까, 이렇게 바구리를 만들어 내는데, 어른들은 바구리를 만들고 비누바구리도 만들었죠. 저짝 비누바구리는 동그름 히가꼬, 손잡이가 있게끔 비누 넣으면 대바구리로 하면 물이 자연적으로 빠져 부리니까
이거 들고 대바구리를 만들어 가지고 짊어지고, 담양시장에까지 가고, 옛날에 담양시장을 5일장으로 죽세 시장이 있었어요. 크기가 얼마냐. 우리 손가방 주먹만 한거. 비누바구리는 규모는 적고 그래 깆고, 포개 가지고 이렇게 줄대 해서 갖고 가고, 또 이렇게 가정에서 쓰는 동그런 거 테가 예쁘게 헌거, 고것 보다 뭔 바구리냐 그것도 만들고
예. 그런 것도 크게 만든 사람, 치도 이렇게 만들고 쌀 까분 치, 이거 아래침에 영감님들 거 다 돌아 가셨죠. 그 분이 만들고 또 아주 죽세공으로 동그리서 앉아서 방석을 만들면 그 방석이 뭐냐면 속으로 짚으로 엮어 가면서, 대껍닥으로 요리 돌려 가면서, 우리도 만들지 알거든요. 헌데 뭐 그러며는 겨울에는 따습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둥그런 것이 있고, 사각진 것이 있고, 그래 가지고 또 그것 외에 죽피방석이란 것이 있어요. 대자리 모양을 기대런히 따르르 말아서 놓고 그러면 그거이 시원 허기도 하고 뭐 참 좋조. 그래 가지고 돈 있는 사람들은 그런 걸 얘기를, 돈을 주고 맞춤 그 걸 하나 만드는 데는 한 오일 정도 걸리면 그 때 돈으로 상당히 돈 벌이가 됐죠.
(조사자 : 거기다 무슨 무늬 넣고 그랬어요?)
그랬죠. 꽃무늬. 뭐냐면 내가 알고 있기는 뭐 이럴트면 뭐 다이아몬드식으로 넣고 그 넣은데는 죽피에다 물을 들여 가지고 파란물 뭐든 해가지고 이렇게 딱 꽃무늬로 해가지고 그렇게 그면 그 돈벌이가 짭짤하니. 긍게 아마도 아가씨들이 그런 것을 힘을 잡아 가지고 결혼 밑천을 아마도 했을거여.
그래 가지고 거기가 모아 가지고 사랑방 모양으로 밤에 늦게 까지도 여그 모아 가지고 일허고, 밥만 먹으면 와서 그걸 헐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거가서 농담도 하고, 얘기도 하고 만들다가 가설극장에도 가서 굿도 보고 그랬죠. 그렇고 보면 옛날 추억이 그것이 지금 보다도 더 재미있게 살았죠(웃음)
(조사자 : 이 동네는 여러 가지 종류를 만드셨네요?)
네 그렇죠. 죽피도 만들고 아주 전업으로 허는 사람도 있었고, 부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랬죠. 대나무는 주로 왕대는 색상이 이럴트면 하얗고, 분죽은 뽀연히 좋거든요. 그런디 주로 비누바구리는 대판이라는 곳에서 주로 많이 만들고 여그는 몇 집이는 많이 안했지마는 떠는 것도 예술이에요. 가늘에 뜰 놈은 가늘게 뜨고, 해가지고 우리는 그런 걸 헐지도 모른디, 몇 집이 그렇게 했어요. 여기서
(조사자 : 분죽이나 왕대나 다 이용 하셨어요?)
그렇지요. 분죽이나 왕대나 다 이용 헌 디, 만들어 보니까 분죽이 더 거시기도 좋고 질도 많이 나올 수도 있고, 예쁘고 뽀 허니 그것을 햇대는 안되고. 햇대는 그 해 나는 것이 했대. 금죽. 금년에서 나는 것은 못 쓰고 해가 갈수록 그것이 단단하고 질이 좋으니까. 주로 3년 이상 된 걸로 많이 사용했죠.
글고 그때는 우리 마을이 지금 마을 뒤에 가 전체가 대밭이거든요. 근디 대 하나에 땅 한 평에, 그 때 5,000원, 700원인디 대 하나에 3,000원~4,000원 했어. 하~ 대  이렇게 큰 놈 한 나무에 그러니까 금밭이고 했제. 대밭이 있는 사람은 금밭이라고 그랬어. 한 평에 대 하나만 나와도 한 평 값이 나와. 한 평 값이 나와 버리니까.
그랬는디 지금은 인자 사향길로 걸어 가지고 대가 천덕꾸러기가 돼야 부렀제.
그것이 지금 상당히 한 10여년 만들었을 거요. 아가씨들이 그래 가지고 그 뒤로 담양 죽물시장이 없어진 뒤에로 그것도 함께 따라서 도산이 되야 부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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